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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원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10. 29. 15:44

56년 전인 1964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800년 수령에 걸맞은 거대한 몸집에다 풍성한 가지와 수형의 균형과 비례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잎에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 있던 지난 주말의 모습인데, 이번 주말 무렵이면 이파리가 온통 노랗게 물들 것으로 보인다.



구룡사 무인찻집에 앉으면 단풍이 한눈에

30년간 막혔던 ‘치악 4경’성황림, 토요일마다 다시 열려

운곡 솔바람 숲길, 한시간 남짓 ‘편안한 탐방’

출렁다리 유명한 소금산, 내년엔 미디어파사드 들어서



수도권과 지방을 가르는 경계선 위의 도시. 강원 원주 얘기입니다. 적잖은 여행자원이 있습니다만, 원주는 그동안 여행자들로부터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전적으로 위치 탓이 큽니다.

원주는 심리적으로 ‘수도권과 지방의 접경’에 있습니다. 원주가 심드렁한 곳이었던 건 이런 어정쩡한 물리적·심리적 거리 때문입니다. 원주는 일상의 공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의 공간도 아닙니다. 주변 공원을 방문하듯 당일 나들이로 가기에는 너무 멀고, 하루 이틀 일정으로 다녀오기에는 너무 가깝다는 얘기입니다.

수도권 나들이로는 더 가까운 곳을 찾고, 여행으로는 더 먼 곳을 찾게 마련이지요. 원주는, 그래서 참 억울했겠지요.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약점이었던 어정쩡한 위치가 코로나 시대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점이 된 것이지요. ‘거리두기’ 수칙으로 숙박 여행이 부담스러워지면서 당일치기 여행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거리는 일상의 수도권 공간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여행의 공간인 원주야말로 코로나 시대 당일치기 여행에 딱 적합한 여행지가 된 것입니다. 약점이었던 조건이 변화된 상황에 따라 강점이 된 것입니다. 원주를 새삼 주목한 건 그래서였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부자유스러우나마 여행을 떠나고자 한다면, 여기 원주를 권합니다. 큰 엄두를 내지 않고도, 방역수칙을 잘 지켜가면서 슬쩍 다녀올 수 있는 곳입니다.


# 과소평가된 단풍이 붉게 물들다

원주에는 치악산이 있다. 모르는 이가 많지만 치악산은 설악산이나 지리산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립공원이다. 그것도 근래 지정된 게 아니라 자그마치 36년 전인 1984년에 국립공원이 됐다.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1000m가 넘는 고봉이 여덟 개나 있는 웅장한 산세는 국립공원이란 이름값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믿어줄지 모르겠지만, 북한산 백운대에서 원주 치악산을 본 적이 있다. 지금처럼 차고 맑은 가을날 이른 아침이었다. 멀리 용문산 백운봉 뒤쪽으로 치악산의 능선이 먹으로 칠한 듯 또렷했다. 서울의 북한산에서 원주 치악산까지는 직선거리로 100㎞. 높은 산에 올라야 하고 미세먼지 없이 쾌청한 날에만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원주는 ‘육안으로 보이는 곳’이다.

치악산은, 북한산과 마찬가지로 도심형 국립공원이다. 원주시에 있고, 도심에서의 접근성도 좋다. 치악산은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도 이름났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건, 그래 봐야 설악산 단풍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강원도에 단풍으로 이름난 산이 어디 하나둘인가. 치악산 단풍이 아무리 좋다한들 속초와 양양의 바다까지 끼고 있는 가을 설악산을 이길 수야 없지 않은가. 이런 평가는 ‘설악산 단풍과 비교했을 경우에만’ 그렇다.

치악산의 단풍은 강원도의 다른 명산에 밀려 과소평가됐다. 계곡의 경관은 이렇다 할 게 없지만, 치악산은 숲이 워낙 크고 짙어 가을이면 온 산에 단풍색이 치렁치렁한 게 특징이다. 이런 풍성한 단풍 때문에 치악산은 예로부터 ‘붉은 적(赤)’ 자를 쓴 적악산(赤岳山)으로 불렸다. 적악산의 단풍은 지금 한창이다. 오는 주말까지 적악산에서는 화려하고 풍성한 단풍을 만날 수 있다.


.▲ 치악산의 절집 구룡사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치악산 구룡소 주변 풍경. 숲이 붉고 노란 단풍으로 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구룡소에서 물길을 따라 세렴폭포까지 이어지는 순한 탐방로는 가을 단풍을 즐기기에 제격이다


# 단풍 물든 절집에서 차 한잔


치악산 국립공원은 구룡지구, 부곡지구, 황골지구, 금대지구, 성남지구 등 다섯 개 지역으로 나뉜다. 가장 일반적인 코스가 구룡지구에서 구룡사를 거쳐 비로봉으로 올라가는 탐방로다. 비로봉까지 다녀오지 않고 구룡사 주변만 둘러봐도 화려한 단풍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금강소나무 숲길을 따라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걸으면 이내 구룡사 일주문인 원통문이다. 부도탑과 국사단을 지나면 절집 앞마당 200살이 넘는 은행나무 앞에 마주 서게 된다. 뭐가 그리 급한지 구룡사 은행나무는 이미 진노랑의 절정에 도달해 분분히 낙엽을 떨구고 있다.

은행나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가을에 원주까지 간 길에서 꼭 보고 와야 할 은행나무가 있다. 일찌감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800살 된 은행나무 ‘반계리 은행나무’다. 나무가 건너온 시간도 시간이지만 부채처럼 펼친 가지마다 구름처럼 잎을 달고 있는 모습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산속의 구룡사 은행나무는 단풍의 절정을 지나고 있지만, 반계리 은행나무는 들판에 있어서인지 아직 노랑보다는 초록이 더 짙다. 하루하루 단풍색으로 물드니 이번 주말이라면 은행나무는 제법 단풍이 물든 모습을 보여줄 듯하다.

구룡사 경내를 벗어나자마자 계곡을 건너는 현수교가 있는데, 그 아래 계곡이 구룡소다. 구룡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아홉 마리 용이 의상대사와 한바탕 대결을 벌였던 자리다. 치악산 등반은 쉽지 않다. 구룡소를 지나 세렴폭포까지는 1시간 남짓 산책 수준의 길이 이어지지만, 그 뒤의 세렴폭포에서 비로봉까지 이어지는 탐방로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가파른 길이다. 오죽하면 바위가 사다리처럼 가파르다 해서 ‘사다리병창길’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산행 난이도 중 ‘매우 어려움’ 구간이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는 길이라 내내 전망이 빼어나지만, 본격 등산보다 치악산 단풍을 즐기는 게 목적이라면 세렴폭포까지만 다녀와도 충분하다.

구룡사에서 주변 경관을 운치 있게 즐기는 팁 하나. 절집 담 너머로 맞은편 숲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에 ‘차와 이야기’란 현판을 건 한옥 누각이 있다. 사찰에서 운영하는 무인 찻집이다. 차와 다구 등을 갖추고 누구나 들어가 스스로 차를 달여 마실 수 있도록 해놓았다. 찻값은 정해져 있지 않으니 차를 마신 뒤 적당히 보시하고 나오면 된다. 소슬한 가을바람 속에서 창밖의 단풍을 보면서 은은한 차향을 즐기는 맛이 훌륭하다.



치악산 구룡사. 절집 담 너머로 맞은편 숲을 바라다볼 수 있는 육각 지붕의 한옥 누각은 ‘차와 이야기’란 현판을 건 무인 찻집이다.


# 신들이 사는 숲, 성황림


산행객의 발길이 잦은 구룡지구 말고, 치악산 국립공원의 다른 네 개 지역에는 행락객들의 발길이 뜸하다. ‘거리두기’의 단풍 명소로 더할 나위 없다. 상원사를 지나 치악산 남대봉으로 이어지는 탐방로의 들머리인 치악산 남쪽, 성남지구 얘기부터. 성남지구에는 치악산 성황신을 마을 수호신으로 섬기는 서낭숲(당숲)이 있다.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국립공원이 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한 숲, 치악 8경 중 제4경인 ‘성황림’이다.

성황림은 원주시 신림면 성남2리에 있다. 면의 이름이 신림(神林), 그러니까 ‘신의 숲’으로 지어진 건 당연히 성황림 때문이다. 5만4414㎡(1만6000여 평)의 성황림에는 50여 종의 활엽수가 군락을 이뤄 자라고 있다. 따로 경계를 긋거나 길을 닫지 않았어도 오랫동안 마을 주민들은 성황림을 신성시하며 보호했다. 그러던 것이 성황신과 당숲을 미신으로 터부시하면서 숲이 가진 신성(神性)은 무너졌다. 성황림 한복판으로 도로가 놓였고, 급기야 신이 깃든 숲이 행락객들이 몰려드는 유원지가 됐다. 성황림의 훼손이 심해지자 1990년대 초반 보호철책을 두른 뒤 출입을 막았다. 그렇게 30년, 한 세대에 걸쳐 사람들의 발길을 막으면서 숲은 점차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당집이 복원됐고, 당집 양쪽의 아름드리 전나무와 엄나무에 금줄이 다시 쳐졌다.

성황림은 1년에 딱 두 번, 4월 초파일과 중양절(음력 9월 9일)에만 일반에게 개방돼 왔는데, 최근 들어 문턱이 좀 낮아졌다. 성황림 마을 주민들이 매주 토요일에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성황림을 밟아볼 수 있게 된 것. 20명 이상의 참가자가 있을 때 체험행사가 열리는데, 참가자들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성황림을 둘러보고 인절미 만들기 체험 등을 즐긴다. 성황림은 연중 이른 봄 숲이 연두색으로 물들 때가 가장 아름답고, 복자기나무가 선명한 붉은빛으로 물드는 이즈음이 두 번째로 아름답다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 엇갈린 길…왕과 스승과 노파

치악산은 원주뿐만 아니라 강원 횡성과 영월에도 걸쳐 있다. 치악산국립공원 다섯 개 지역 중에서 유일하게 부곡지구는 원주가 아니라 횡성 땅이다. 2016년 새 탐방로가 열리면서 개방된 부곡지구는 산행객의 발길이 가장 뜸한 곳. 부곡지구 탐방로가 치악산 비로봉을 오르는 가장 순한 길이라고 하지만, 그거야 다른 치악산 탐방코스에 비교해서 그렇다는 얘기. 부곡지구에서 비로봉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다.

부곡지구는 꼭 산행이 아니어도 푸근한 산간 마을의 경관이나 문화유산에 깃든 이야기 때문이라도 일부러 가볼 만한 곳이다. 부곡지구로 들어가는 부곡계곡에 ‘태종대’라는 바위 벼랑이 있다. 계곡의 단애가 조선의 3대 왕인 태종의 이름을 얻게 된 이야기는 이렇다.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었던 운곡 원천석. 고려 망국의 한과 무상함을 읊은 시조 ‘회고가’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운곡의 회고가를 읽어보자.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에 지나가는 객이 눈물겨워 하노라.”

조선 건국 후 벼슬을 버리고 물러난 운곡은 치악산으로 숨는다. 태종은 스승 운곡을 찾아 정사를 논의하기 위해 부곡계곡까지 왔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때의 얘기가 태종의 구술로 ‘태종실록’에 등장한다. 태종이 말을 타고 와서 머물렀던 곳이라 해서 ‘주필대’라고 불리던 것이 후대에 태종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단애의 벼랑 아래에는 1723년 새긴 ‘태종대(太宗臺)’ 글씨가 선명하고, 단애 위의 비각 안에는 ‘주필대(駐필臺)’ 글씨가 새겨진 작은 비석이 있다.

태종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노구사(老구詞)’도 있다. 태종을 따돌리려는 운곡 원천석의 부탁을 받고, 스승을 찾아온 태종에게 거짓으로 길을 가르쳐준 노파가 임금을 속였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깃든 사당이다. 노파의 넋을 기리는 사당은 그가 빠져 죽었다는 부곡계곡의 노구소(老구沼) 근처에 있다.

내친김에 원천석의 묘역까지 길을 이어보자. 원천석의 묘는 원주 행구동에 있다. 무학대사가 잡아줬다는 묫자리는 한눈에도 특별해 보이는데, 사실 문외한의 눈에는 누에머리처럼 길게 밀고 나간 지형 끝에 있는 아내의 묘가 들어선 자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묘역 인근에는 원천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창의사’가 있고, 주변에는 맨발로 솔숲을 걸을 수 있도록 조성해놓은 숲길 ‘운곡 솔바람 숲길’이 조성돼 있다. 전체 거리가 3㎞가 채 안 되는 숲길. 느릿느릿 걷는다 해도 1시간이면 넉넉한 편안한 길이다.

원주시가 내년 선보일 예정으로 준비 중인 미디어파사드. 소금산 출렁다리 아래 암벽에서 영상으로 만든 거대한 고래가 유영하는 모습.


# 출렁다리, 그리고 케이블카와 에스컬레이터


이건 원주의 좀 오래된 얘기.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쯤 원주를 대표하던 관광지는 간현유원지였다. 섬강으로 흘러드는 삼산천 물길 위로 중앙선 철교가 지나는 풍경을 가진 간현유원지는, 물놀이하거나 강변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전형적인 다목적 ‘유원지’였다. 유원지의 주인은 대학생. 간현유원지는 1980년대 초반까지 대학생들의 단골 단합대회(MT) 장소였다. 대학생들은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지금은 폐쇄된 중앙선 간현역에서 내려 강변 백사장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굽고, 소주를 마시고, 통기타를 쳤다.

중앙선 대신 경춘선 강촌역과 대성리역 일대가 단합대회 명소로 떠오르면서 간현유원지는 차츰 잊혔다. 쇠락해 스러져버릴 것만 같았던 간현유원지가 다시 주목받으며 명소로 떠오른 건 2018년 소금산에 설치된 출렁다리 덕분이었다. 가마득한 직벽의 산 이쪽저쪽을 가로지르는 소금산 출렁다리는 개통 첫해 자그마치 185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모았다. 전국 곳곳에 출렁다리가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것도, 소금산 출렁다리의 기록적 성공이 직접적인 계기다.

사실 소금산 출렁다리는 치밀한 연구나 계산, 혹은 분석으로 지어진 건 아니다. 대학원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한 원창묵 원주시장이 기암과 산악미로 이름난 중국 장자제(張家界)를 다녀온 뒤에 벤치마킹을 지시해 출렁다리가 놓인 것이었다. 벤치마킹은 계속되고 있다. 출렁다리의 기록적 성공에 힘입어 소금산에는 아슬아슬한 잔도가 놓이고 있다. 장자제처럼 산에다 케이블카와 에스컬레이터도 들여놓을 계획이다. 국립공원쯤 된다면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일. 하지만 간현은 ‘유원지’다. 그게 맞는 일인지 아닌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우리에게 없었던 새로운 곳이 되리라는 것이다.

소금산 출렁다리 아래 바위 직벽에는 내년 초 바위를 스크린처럼 활용해 야간에 영상을 상영하는 미디어파사드가 들어선다. 일부 영상을 완성해 지역 주민이나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시사회 등을 개최하며 영상을 수정하고 있다. 마침 시사회가 열려 가보았는데, 어두운 직벽의 바위에 꽃이 피거나 고래가 바닷속을 유영하는 장면이 빛으로 역동적으로 그려졌다. 화면의 규모도 크고 색감도 화려했다. 이런 영상 콘텐츠에다가 치악산 상원사에 전해지는 ‘은혜 갚은 까치’나 태종대 등 원주만의 얘기를 덧댈 예정이다. 그러고 보면 원주는 ‘경계’다. 수도권과 지방의 경계, 그리고 자연 명소와 인공 관광지의 경계….


■ 반계리 은행나무

어마어마한 크기만으로도 마주 서는 순간 탄성을 자아내는 반계리 은행나무는 온통 노랗게 단풍으로 물들었을 때가 최고지만, 단풍잎이 다 떨어진 뒤에 떨어진 은행잎이 주위를 양탄자처럼 덮고 있을 때의 정취도 그에 못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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