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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서원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9. 14. 18:06


경북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 뒤편 산자락에 새로 짓다시피 복원한 호계서원. 호계서원의 전신인 여강서원은 한때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서원이었다. 호계서원은 안동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퇴계 위패 왼편 상석 놓고 서애·학봉 후손 논쟁 종지부

50억 들여 90칸 11동 건물로 단정하게 복원

이층누각 ‘양호루’에 오르면 안동호 절경이 발아래 쫙~


수몰민 이주단지 ‘예끼마을’ 갤러리 모인 핫플레이스로

1970년대 풍경 간직한 골목마다 정감 어린 벽화도

안동소주 빚는 ‘맹개술도가’선 도수별로 석 잔 시음 캬~



어쩌면 고리타분한 여행지라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이끼가 뒤덮인 고택과 그보다 더 오래된 가치를 소중하게 품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 경북 안동입니다. 안동에는 두 명문 가문과 학맥이 이어온 400여 년의 다툼과 그 갈등에 찍은 종지부의 징표로 지난해 복원된 ‘호계서원’이 있습니다. 두 가문 다툼의 시작부터 화해까지, 호계서원에서 수백 년에 걸친 이야기를 짚어보았습니다. 호계서원이 안동의 오래된 이야기라면, 요즘 젊은 여행자들 사이에서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안동의 예끼마을과 맹개마을은 감각으로 단장한 안동의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다음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만나고 온 안동 여행 이야기입니다.


# 호계서원을 먼저 찾아간 이유

경북 안동에는 전국 어느 곳보다 더 많은 서원이 있었다. 안동 일대의 서원은 모두 56개에 달했다.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이 내려지기 전에 경상도 일대에만 자그마치 600여 개의 서원이 있었는데, 10분의 1쯤이 안동에 있었던 셈이다. 대구의 서원은 29개, 진주는 25개였다. 안동에 서원이 많았던 건 명문 양반 가문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원건립에 앞장섰던 퇴계를 잇는 학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향교가 유학 보급을 위해 설립한 국공립학교였다면, 서원은 지금으로 치면 사립학교다. 조선 중기 이후 사립학교는 공립학교를 능가했다. 서원이 줄곧 향교를 압도했던 건, ‘인물’이었다. 서원에 모셔진 명망 있는 선현들은 유생들의 정신적 지표가 됐고, 사화 등의 탄압으로 낙향한 선비들은 서원에서 후진을 이끌었다. 서원은 유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강학이 우선이었지만, 학덕을 갖춘 인물을 모시는 기능도 했다. 그러므로 서원의 뒤에는 후학들의 정신적 지주로 능히 삼을 만한 학문이 깊은 인물이 있었다. 진작 교육의 기능이 사라진 서원에 여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는 이유다.

안동을 대표하는 서원은, 두말할 것 없이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이다. 서원 난립의 폐단을 보다 못한 대원군의 서원 훼철 조치로 안동의 다른 서원은 모두 문을 닫았지만, 이 두 서원만은 살아남았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으니 더 설명할 게 없을 정도로 이름났다. 퇴계의 자취를 보아야 할 도산서원과 낙동강을 마주 보고 있는 빼어난 정취를 보아야 할 병산서원 얘기는 잠깐 뒤로 미뤄둔다.

대신 안동의 ‘호계서원’을 먼저 간다. 호계서원을 아는 이들은 적다. 그도 그럴 것이 복원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한 호계서원은, 지난해 완공됐으니 안동은 물론이거니와 전국에서도 ‘가장 최근에 지어진 서원’이다. 호계서원을 짓는 데 50억 원이 들었다. 디지털과 원격 교육의 시대에 기와지붕에 툇마루를 단 신축 서원이라니…. 복원된 호계서원의 대들보가 일으켜 세운 가치는 ‘화해’다. 호계서원에는 안동 땅의 내로라하는 두 가문의 수백 년에 걸친 갈등의 이야기가 있다. 서원의 복원에는 두 가문이 400년 만에 화해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안동에서 여태 지켜지고 있었던, 그러나 이제 저물고 있는 것들을 본다. 고택과 종가의 위세와 높은 담장 안쪽에 가려져 있던 안동의 모습이다. 두 가문의 갈등과 화해. 호계서원에서는 그 얘기를 해보자.





낙동강을 끼고 있는 U자 지형 안의 마을이 요즘 안동의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맹개마을. 왼쪽 강 건너편에 농암종택이 있다.

#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할까


호계서원은 안동호의 호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도산면 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뒤편 언덕 위에 있다. 넓은 부지에 아흔 칸이 넘는 11동의 건물이 잘 정돈돼 있다. 압권은 서원 출입문이면서 이층누각을 겸하는 양호루(養浩樓). 화려한 건축적 기교와 단청하지 않은 단정한 느낌이 적절하게 배합된 누각에 오르면 저 아래 발밑으로 안동호가 내려다보인다. 누각의 정취야 안동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도 병산서원 만대루가 으뜸이다. 이제 막 지어서 시간의 깊이가 새겨지지 않은 양호루를 만대루에 댈 수는 없겠지만, 누각에 올라 호수를 내려다보며 풍류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호계서원의 내력을 따라가 보자. 시작은 퇴계다. 퇴계가 세상을 뜨자 예안 지역의 제자들이 도산서원을 ‘접수’했다. 지금은 예안이 안동 땅이지만, 그때는 예안과 안동의 행정구역이 달랐다. 이에 안동의 퇴계 제자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후손들은 안동의 여강서원에다 따로 퇴계를 모시기로 했다. 안동의 한복판에 아흔두 칸으로 지어진 여강서원은 당시 영남에서 가장 큰 서원이었다. 이 여강서원이 훗날 이름을 고쳐단 게 호계서원이다.

여강서원에 퇴계를 모시기로 했는데, 문제는 제자 류성룡과 김성일의 위패를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였다. 사당 중앙에 퇴계의 위패를 놓은 뒤 둘 중 누구의 위패를 상석인 퇴계 왼쪽에다 두어야 하느냐를 놓고 후학들끼리 논란이 빚어졌다. 류성룡의 후학들은 영의정을 지낸 류성룡이 관찰사로 마감한 김성일보다 벼슬이 더 높으므로 상석인 동쪽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성일의 후학은 생년이 빠른 김성일이 선배이므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맞섰다.

급기야 동안동의 풍산 류씨(류성룡) 가문과 동안동 의성 김씨(김성일) 가문이 나서 영남학파로 예학에 정통한 우복 정경세에게 자문했다. 정경세가 내린 결론은 ‘나이가 아니라 관직 순’이었다. 결국 류성룡을 상석에 배향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으나 논란은 잠재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두 가문의 학맥이 분파하면서 서열 문제는 퇴계의 적통에 대한 시비로 이어졌고 갈등은 격화됐다.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이름까지 붙여진 이 갈등은 안동의 유림을 둘로 갈라놓았다. 병호시비에서 ‘병(屛)’은 류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을, ‘호(虎)’는 김성일 학맥이 차츰 장악한 호계서원을 이른다.

다툼은 치열했지만 그렇다고 두 학맥이 사사건건 대립만 한 건 아니었다. 모두가 퇴계의 제자이고 영남 남인의 일원이었으니 견제를 하면서도 때로 협력을 아끼지 않을 때도 있었다. 중앙정치에서 벌어지는 가문과 학맥의 갈등과 시비는 피를 불러왔지만, 여기 안동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두 가문과 학맥의 경쟁과정에서 내로라하는 후학들이 잇따라 출현했던 건 병호시비가 안동의 유림사회에 자극을 주고 학문적 열정에 불을 댕기는 역할도 했다는 증거다. 수백 년 전의 일을 지금의 시선으로 ‘한낱 사소하고 소모적인 다툼’쯤으로 폄훼할 일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위 사진은 안동을 대표하는 명소 병산서원의 누각 만대루. 아래 사진은 예술마을로 가꿔진 호계서원 하단의 예끼마을 ‘맹개술도가’.


안동 예끼마을의 정겨운 벽화.


# 400년 만의 합의와 화해


병호시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안동 최고의 서원이었던 호계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던 사당은 사라졌다. 호계서원에 있던 퇴계의 위패는 도산서원으로 갔고, 류성룡의 위패는 병산서원으로 갔으며, 김성일의 위패는 낙동강변의 임천서원으로 옮겨졌다.

두 가문과 학맥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대원군은 지금으로 치면 안동시장쯤 되는 안동부사를 불러 해결방안을 모색하도록 지시했다. 김성일 쪽의 유림 600명과 류성룡 계의 유림 400명이 모여 화해를 시도했으나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격분한 대원군은 결국 화해의 상징으로 양쪽 학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한 책 한 권씩을 골라 목판과 판본을 태우고는, 호계서원을 철폐하는 것으로 시비의 불씨를 묻었다. 화해가 아니라 묻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셈이었다.

병호시비는 지난 2009년 양쪽 문중이 나서면서 해결의 전기를 맞았다. 문중의 대표가 ‘류성룡 왼쪽, 김성일 오른쪽’이란 위패 위치를 합의하면서 끝나는 듯 했으나 안동의 유림들 사이에서 ‘이 문제는 종손 간에 합의할 사항이 아니라 학파 간에 결론 내려야 하는 것’이란 주장이 나오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종지부는 그로부터 4년 뒤인 2013년에 찍혔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해 1976년 임하면의 공원에 옮겨진 뒤 초라하게 쇠락해가고 있던, 강당만 남은 호계서원의 복원을 추진하던 경상북도가 두 가문과 학맥에 기발한 중재안을 냈다. 류성룡을 퇴계 위패의 동쪽에, 그리고 김성일을 서쪽에, 그리고 그 옆에 김성일의 후학인 이상정을 배향하자는 제안이었다. 한쪽에는 높은 자리를, 다른 한쪽에는 두 명의 자리를 보장하는 화해안이었다.

양 학파가 이에 동의하면서 400년에 걸친 병호시비는 결국 끝났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다시 짓다시피 복원해 세운 것이 바로 지금의 호계서원이다. 이런 사연이 있으니 호계서원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은 위패를 모시는 사당 존도사(尊道祠)일 수밖에…. 400년 만에 화해한 배치대로 놓인 위패를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사당 안은 텅 비어있었다. 평소에는 비워두고 제향 의식을 할 때만 위패를 놓는 것이리라.

호계서원은 말끔하게 새로 지어져 안동의 고택이나 서원에서 느낄 수 있는 세월의 묵은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수백 년 이어진 안동 유림의 갈등과 경쟁의 시작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호계서원은 각별하다. 안동을 찾는 이들은 모두 경관을 보고 가지만, 여기에서만큼은 안동을 그동안 지탱해온 것들을 희미하게나마 느껴볼 수 있다.



안동호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세워진 호계서원의 이층누각 양호루


# 류성룡의 병산서원, 김성일의 임천서원


호계서원을 보았다면, 병호시비를 촉발한 양 당사자, 그러니까 류성룡과 김성일을 모신 서원을 함께 둘러보는 게 순서겠다.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바로 안동 하회마을에서 가까운 풍천면의 병산서원이다. 병산서원은 류성룡을 둘째 치고서라도, 낙동강을 마주 보고 있는 정취와 경관만으로 최고의 서원으로 꼽힌다. 지금은 출입을 막아 오를 수 없어 못내 아쉽지만, 병산서원의 누각인 만대루에 앉아 보는 주변 경관은 가슴이 저릿저릿해질 정도로 근사했다. 병산서원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배롱나무꽃이 피는 이즈음이다. 병산서원의 배롱나무꽃은 빗속에서 절정을 향해가고 있다. 긴 장마와 폭우로 서원 앞의 낙동강 물도 많이 불어나긴 했지만, 그 일대에 폭우 피해는 없다. 지금 병산서원 강당 툇마루에 앉으면 만대루 너머로 몸집을 불린 채 흘러가는 낙동강의 당당한 모습을 대할 수 있다.

김성일의 위패를 모신 임천서원은 송현동 호암마을 깊은 곳에 있다. 송현동 일대는 원주에서 안동으로 이어지는 중앙선 복선전철 공사가 한창이다. 내년에 이 구간이 개통되면 서울 청량리에서 송현동에 새로 지어진 신 안동역까지 1시간 20분 만에 닿게 된다. 전철이 낙동강을 넘어가는 철교가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자리에 임천서원이 있다.

양 문중과 학맥이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서원의 이름값으로 겨루면 임천서원은 병산서원에 어림도 없다. 임천서원도 낙동강을 마주 보고 있지만, 주변의 풍경이나 정취는 병산서원에 비해 한참 모자란다. 게다가 임천서원은 안타깝게도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쇠락한 느낌이 역력하다. 돌담이며 건물 곳곳이 온통 이끼로 뒤덮였고, 풀과 나무들이 기와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있다. 임천서원의 쇠락은 그곳을 찾는 발길이 뜸한 이유가 가장 커 보였다.

안동을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빠짐없이 들를 정도로 관광명소가 된 병산서원과 변변한 안내표지판도 없고,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 쇠락해가고 있는 임천서원. 병산서원에 발길이 잦고, 다녀간 사람들이 오래 기억하는 건 병산서원의 빼어난 자연경관 덕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학자의 학덕을 기리는 서원이, 생전의 학문적 성과나 인품이 아니라 들어선 자리의 경관에 따라 번성하기도, 쇠락하기도 한다는 게 어쩐지 좀 허망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말이다.


관리의 손길이 닿지 않아 이끼가 뒤덮인 채 퇴락해가고 있는 임천서원.


# 예끼마을 술도가, 맹개마을 메밀꽃

지금까지가 낡고 오래된 안동 얘기였다면, 지금부터는 안동의 ‘새로운 곳’에 대한 얘기다. 안동은 지금까지 전통마을과 고택 등을 둘러보는 ‘과거’가 중심이 되는 여행지였다. 그러나 관광지로서의 안동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를 가장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복원한 호계서원 아래 안동호반의 도산면 서부리 ‘예끼마을’이다. 예끼마을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몰민을 수용하기 위해 산비탈을 깎아 만든 이주단지다.

댐 건설 과정에서 수몰민 수용을 위해 뚝딱뚝딱 조성한 이주단지 마을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른바 ‘핫 플레이스’가 된 건 지난 2018년 마무리된 안동시의 ‘이야기가 있는 마을 조성사업’이 계기가 됐다. ‘예끼’란 마을 이름은 ‘예술에 끼가 있다’는 뜻이란다. 예술을 앞세운 마을답게 예끼마을에는 갤러리 3곳과 작가들이 기거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레지던스가 한 곳 있다. 옛 관아의 집무실 건물을 면사무소로 쓰다가 한옥 갤러리로 바꾼 ‘근민당(近民堂)’도 근사하고, 전시실에 길고 좁은 창을 내 창밖으로 보이는 마을 풍경이 전시 미술품처럼 느껴지는 갤러리도 인상적이다.

마을 골목에는 1970년대식 풍경을 남겨두기도 했고, 너무 과하지 않은 정도의 벽화를 그려 넣기도 했다. 오래된 이발관도 있고 생막걸리 잔술을 파는 대폿집도 있고, 세련된 느낌의 카페도 있지만, 예끼마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맹개술도가’였다. 여기는 밀로 안동소주를 빚는, 말 그대로 술도가다. 술을 팔긴 하지만 술과 안주를 내주는 술집은 아니다. 안주는 팔지 않고, 술도 술도가에서 빚은 세 가지 도수의 소주를 작은 잔에다 조금씩 따라준 뒤에 맛을 보게 하는 정도다. 술집이되 음주를 하는 곳이 아니라 ‘시음’을 하는 곳이란 얘기다. 이렇게 술만 팔기 뭣해서 커피까지 팔고 있으니 ‘카페 겸 술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 업태는 사뭇 다르다.

술도가가 이름으로 삼은 ‘맹개’는 낙동강변의 오지마을이다. 도산면 가송리의 맹개마을은 2007년 귀농한 농업법인 ‘밀과 노닐다’의 백성호 대표가 14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마을이다. 퇴계가 도산서당에서 청량산을 오가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던 경관 위에 있다. 말이 마을이지, 오지 중의 오지인 맹개마을의 주민은 백 대표 가족이 전부다. 백 대표는 맹개마을에서 밀과 메밀 농사를 짓고,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손님을 받으며 빵 만들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농암종택 인근 강변에서 강 건너편의 맹개마을까지는 트랙터를 타고 낙동강 물길을 건너 들어가야 한다. 맹개마을의 매력은 ‘단절과 고립’이다. 트랙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경험에서는 마치 진공 오지마을로 건너가는 듯한 판타지가 느껴진다. 맹개마을이 가장 낭만적일 때는 메밀꽃 필 무렵이다. 예년이면 9월 중순쯤 메밀꽃이 피는데, 올해는 긴 장마로 아직 메밀을 심지 못해 9월 말쯤이나 꽃을 볼 수 있을 듯하다.




■ 맹개술도가의 진맥소주

맹개마을에서 수확한 유기농 통밀로 빚은 증류주가 진맥소주다. 알코올 도수 53도와 40도, 22도짜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밀로 만든 소주는 진맥소주가 유일하다. 귀농해 밀 농사를 짓다가 술을 담가 만들었던 게 시작인데, 공교롭게도 조선 초 안동의 선비 김유가 쓴 500년 전의 요리서 ‘수운잡방’에 밀로 만든 소주 얘기가 나온다. ‘진맥’이란 이름은 수운잡방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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