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신하는 임금이 아니라 의를 따르는 것이다"
조선일보 입력 2020.07.22 03:13 | 수정 2020.07.22 10:22
[221] 폭정에 대처한 네 가지 자세 ①시인 어무적과 대사간 류헌
이미지 크게보기경복궁 근정전. 경복궁은 임진왜란에 불에 탈 때까지 조선 왕국의 법궁으로 사용되던 궁궐이다. 연산군은 이 궁궐에서 사치와 방탕과 여색을 누리며 살았다. 그 폭정으로 인해 백성 삶은 도탄에 빠졌다. 왕권을 감시해야 할 삼사(三司: 홍문관·사헌부·사간원)는 연산군에 의해 일찌감치 입이 닫힌 상태였다. 시인 어무적은 그 암울한 시대를 날카로운 언어로 고발했고, 곧은 사내 류헌은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코로나19 역병 창궐 전인 올해 봄에 촬영했다. /박종인 기자
1494년부터 1506년까지 연산군 재위 기간을 겪었던 네 사내에 관한 이야기다. 이름은 어무적(魚無跡), 류헌(柳軒), 김처선(金處善)과 임사홍(任士洪). 순서대로 직업은 시인, 감사원장 격인 대사간, 왕의 심부름꾼 환관과 간신(姦臣)이다.
연산군 때 사람인 어무적(魚無跡)은 아비가 양반이요 어미는 관비인 얼자(孼子)다. 평생 변변한 벼슬 하나 하지 못했으나 글은 잘썼다. 같은 시대 살았던 허균은 그가 쓴 시 '유민탄(流民歎)'을 동방 제일이라고 평했다.(허균, '성소부부고'25, 성수시화) '유민탄'은 '흩어진 백성을 위해 탄식함'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아 사람들아 살기 어려워라/ 흉년에 너희 굶을 때/ 나 너희 구하려는 마음은 있으나/ 구할 힘이 없구나/ 사람들아 사람들아 불쌍도 하여라/ 추운 날 이불도 없는 너희들인데/ 저들은 너희 구해줄 힘은 있되/ 구하려는 마음은 없구나'('유민탄' 부분, '속동문선'5권)
그 자신이 대접 못 받고 힘없는 처지이니 나라 백성 사는 꼬라지가 거지 같아도 도울 힘이 없다는 말이다.
그때 백성 삶은 비루한 지식인 하나가 구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절대적인 빈곤이 문제였다. 빈곤은 폭정에서 나왔다. 1499년 왕실 족속 생일에 올리는 생선이 4800마리였고 관청용 사슴 육포는 사슴 많은 강원도와 함경도가 각각 2127근과 2851근이었다. 사슴 살지 않는 고장에서는 이를 모두 사서 조달하거나 사슴 사냥길에 아예 집을 버리고 떠도는 판이었다.(1499년 3월 27일 '연산군일기')
이는 사소한 예였다. 어무적에 따르면 공물 조사를 나온 서울 관리들은 귀를 닫았고, 강압에 질린 백성은 입을 닫고 살았으니(京官無耳民無口·경관무이민무구: '유민탄') 모순이 해결될 리 만무했다.
이에 1501년 연산군 7년 한여름, 어무적이 과감하게 왕에게 상소했다. "금년 봄에 주상께서 내린 구언교지(내용을 탓하지 않는 상소를 구하는 교지)에 아무 충언이 없기에 한 말씀 올리나이다." 어무적은 '근본을 바로잡고' '입을 꽉 다문 선비들 입을 열게 하고' '여자와 술을 멀리하여 백성들 재물을 넉넉하게 하고' '불교를 금하고' '토목사업을 중지하라'고 충언했다. 연산군은 이 상소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1501년 7월 28일 '연산군일기')
상소를 올리고 보니 어무적 앞에 기이한 풍경이 펼쳐졌다. 고향 김해 주민이 귀한 매화나무를 잘라버리는 게 아닌가. 매실 진상 요구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또 시를 썼다. '향기 풍기는 군자, 세상에 없다/ 백성이 밥 한 그릇 먹으면/ 벼슬아치들 침 흘리며 달려든다/ 매화에 황금 열매가 달리면/ 갑절로 거둬들이고/ 걸핏하면 매질이다/ 이 모두 매화 탓이니/ 어찌 베어버리지 않겠는가'('작매부·斫梅賦: 매화를 잘라버리다', '패관잡기')
시를 읽게 된 김해 원님이 고맙습니다, 라고 할 리 없었다. 어무적은 관리들을 피해 도망다니다 객사했다. 그 자신이 유민(流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치광이가 더 미쳐가기까지
홍문관과 사간원, 사헌부 삼사(三司)는 제도적으로 왕에게 간섭과 충언과 직언을 할 권리와 의무를 가진 기관이다. 판단 기준은 합리성이요 처신은 투명한 사람을 가려 뽑는 삼사 관원을 사람들은 청요직(淸要職)이라고 불렀다.
1493년 10월 27일 연산군 아버지 성종이 삼사 관리에게 물었다. "신하가 왕명을 따르지 않으면 의리에 합당한가?" 종3품 홍문관 전한(典翰) 성세명이 이리 답했다. "신하는 의(義)를 따르고 임금을 따르지 아니합니다(人臣之道從義而不從君·인신지도종의이부종군)."(1493년 10월 27일 '성종실록') 성리학적 윤리가 골수까지 스민 사림(士林)에게는 대의(大義)가 왕보다 위였다.
이듬해 12월 24일(양력 1495년 1월 20일) 성종이 죽었다. 다음 날 오전 7시 선왕 염습이 거행되고 문무백관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곡(哭)을 했다. 염습이 끝나고 제사상에 제물을 올릴 차례가 왔다. 차기 왕인 세자는 바로 일어나 인정전 밖으로 나갔다. 우의정 신승선이 세자에게 "도로 들어가서 모든 예가 끝나면 나오시라"고 아뢰었다. 세자가 거부하자 좌의정 노사신이 "임금은 일반 사람과 다르다"며 재촉을 하는 것이다. 그제야 세자는 인정전으로 돌아갔다.(1494년 12월 25일 '연산군일기') 우리나라 나이 스무 살인 차기 왕이 등극하기도 전에 아랫사람에게 간섭을 당한 것이다.
다음 날에는 불교식 제사 수륙재를 지내지 말라고 간섭이 들어왔고, 이듬해 6월에는 성종 국상 기간에 술집을 들락거린 성종의 처남이자 새 왕 외삼촌인 윤탕로를 왜 처벌하지 않느냐고 삼사에서 아우성쳤다. 수륙재를 강행하려는 국왕에게 삼사는 한 달 동안 93번 반대 의사를 밝혔다. 윤탕로 처벌을 요구하는 간쟁은 석 달 동안 자그마치 214번이었다.(송웅섭, '연산군 초반 정치적 갈등에 대한 구조적 접근', 인문과학연구20, 2015)
집권 후반기 총체적 미치광이 짓거리를 하기 전부터 연산군은 어무적이 본 대로 환락에 미쳐 있었다. 왕권에 집착하는 새 왕과 이들 삼사의 갈등은 예견된 일이었다. 모든 시작은 모든 끝의 원인이었다.
암군, 족쇄를 벗어던지다
그리하여 집권 4년째인 1498년 7월 연산군은 삼사를 장악한 사림의 수장 김일손을 제거하고 그 일파도 처형과 유배형을 내렸다.(무오사화) 그리고 연산군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거늘, 앞으로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았다.
넉 달 뒤인 11월 9일 김영정을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했다. 실록 사관은 김영정이 "사대부가 모두 염증이 나서 피하므로 용렬하고 나약한 영정이 헌부의 장이 되었다"고 평했다.(1498년 7월 29일, 11월 10일 '연산군일기')
암군 연산군을 상징하는 두 비석. 왼쪽은 경기도 고양에 세운 ‘금표비’. 고양과 김포를 사냥터로 만든 뒤 출입금지령을 새긴 비석이다. ‘법을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고 새겨져 있다. 오른쪽은 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묘 묘비. ‘왕(王)’이 아니라 ‘군(君)’이다.
입맛에 맞고 순한 사람을 검찰총장에 앉혔으니, 이후 정치는 뻔했다. 바깥으로는 만백성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는 난동을 부리고〈2020년 7월 15일 '땅의 역사' 참조〉 안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별의별 비상식적인 혐의를 씌워 체포하고 고문한 뒤 기발하기 짝이 없는 형벌로 처형하는 미치광이 작태를 벌여나갔다.
1504년 성종 왕비인 친어머니 윤씨 복위를 시도하다가 이를 반대하는 신하들 가운데 '손바닥이 뚫리고' '배가 갈라지고' '온몸이 마디마디 잘리는' 형을 당한 이가 부지기수였고, '죽인 뒤 한참 지난 해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을 받은 이도 부지기수였다.(갑자사화) 집권 초부터 집착했던 여색(女色)과 식도락과 사치는 더 심해져갔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무리가 '연산군일기'를 저술했지만, 절반을 접고 읽어도 처절하고 참혹한 시대였다.
마지막 남은 대사간, 류헌
'모든 일을 먼저 정한 뒤에 회의에 넘기니 재상들은 다시 이의가 없고 모두 하교가 지당하다고만 했다.'(1504년 4월 23일 '연산군일기')
모두가 암군(暗君)에게 머리를 조아릴 때 입을 연 사람이 대사간 류헌(柳軒)이었다. 연산군 1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 이래 류헌은 그 모든 풍경 속에 입장해 곧은 소리를 해댔다. 류헌이 주로 문제 삼은 부분은 재정이었다. 집의 시절인 1500년 왕실 금고인 내수사의 이자 놀이를 문제 삼았고, 4년 뒤인 1504년 또다시 이 문제를 꺼내 들어 재물에 미친 연산군 역린(逆鱗)을 건드렸다.(1500년 8월 14일, 1504년 6월 4일 '연산군일기')
1500년 외직으로 쫓겨났던 류헌은 1504년 대사간으로 복귀했다. 복귀하자마자 그가 내던진 말은 "왜 내수사 이자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가"였다. 왕명 절대복종을 요구했던 연산군은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연산군은 "류헌이 어짊을 알지만 죄주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1504년 6월 17일 '연산군일기') 6월 25일 연산군이 직접 류헌의 형량을 선고했다. 곤장 100대와 제주도 유배 및 관노로 신분 추락. 목숨만 부지할 뿐, 모든 것을 빼앗는 중형이었다. 다음 날 류헌은 왕이 보낸 승지 권균 감시하에 곤장을 맞고 제주도로 떠났다.
끝이 아니었다. 실록에는 이듬해 4월 25일 '류헌을 법에 따라 장 80대에 처해 유배지로 돌려보냈다'라고 기록돼 있다. 분이 풀리지 않은 군주가 류헌을 불러내 추가형을 언 도하고 집행한 것이다.
이 또한 끝이 아니었다.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 시대가 왔다. 1506년 10월 13일 제주도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유배에서 풀려나 배를 탔던 류헌이 해적 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생사불명이던 류헌은 결국 대마도 왜구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암군 시대는 갔지만 마지막 곧은 사내도 떠난 것이다. 허망하되 의롭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2/20200722000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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