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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 대처한 네 가지 자세 ②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7. 29. 17:27

 

[박종인의 땅의 歷史]

"간신을 몽둥이로 죽이고 관을 깨뜨려 목을 또 베었다"

조선일보

[222] 폭군에 대처한 네 가지 자세 ②/끝 - 간신 임사홍과 의로운 내시 김처선

이미지 크게보기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 25-5번지 일대는 풍천 임씨 선산이다. 고종 왕비 민씨 생가 부근이다. 성종~연산군 때 관료 임사홍도 여기에 묻혀 있다. 총명하고 정의로웠던 젊은 관료 임사홍은 길고 긴 재야 생활 끝에 폭군 연산군의 혀처럼 행동하는 간신으로 변신했다. 중종반정이 벌어진 1506년 9월 2일 임사홍은 몽둥이로 격살됐다. 그달 26일 반정 세력은 임사홍 관을 부수고 또 한번 그 목을 베어버렸다. 파괴를 면한 묘 앞에 1997년 그 후손들이 비석을 세웠다. /박종인 기자

 

젊은 그는 문장에 능하고 총명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곧잘 하다가 뭇사람들 눈 밖에 나 궐 밖을 떠돌았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매, 그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다, 죄다 죽이고 폐주에게 젖은 낙엽처럼 붙어살았다. 어리석고 난폭하고 음탕한 권력자에게 아녀자들을 바치며 살았다. 연산에게 증오감을 보인 아들까지 희생시키며 자기 자리를 보전하였다. 패기 있고 정의로웠던 젊은 날을 버리고, 사욕과 복수심에 눈이 멀어 생을 망가뜨리고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국가를 말아먹은 임사홍(任士洪·1445~1506) 이야기다.

패기 넘치는 관리 임사홍의 추락

성종이 재위 9년째인 1478년 4월 1일 한성에 황사비가 내렸다. 어떤 이는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 그리 많은 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성종은 이를 하늘이 왕에 내리는 경고, 재변(災變)이라고 규정하고 이 경고를 해결할 방안을 내놓으라 명했다. 그때 성종은 세조 쿠데타 공신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는데, 이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성종은 예를 들었다. "내 세금이 과했는가?" "내가 공사를 자주 했는가?" "내가 내린 형벌이 적절치 못했는가?" "내가 사람을 잘못 썼는가?" "내가 탐학한 수령을 못 적발했는가?"(1478년 4월 1일 '성종실록')

황사비가 내린 이유를 묻겠다고 해놓고 왕이 그 이유를 미리 밝혀버렸으니 훈구대신들에게는 아프기 짝이 없는 구언교지였다.(정출헌, '황사비와 구언전지', 고전산문, 한국고전번역원, 2017) "뭐 먹을래? 나는 짜장면" 하는 이 고약한 직장 상사 앞에서 대신들이 그제야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는데, 주로 사치를 금하고 술을 금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왕실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 임사홍이 다른 말을 내놓았다. "마음만 반성하면 되지 자연현상 때마다 금주(禁酒)를 해대면 어찌 살라는 말인가. 금해봤자 벼슬아치들은 무사하고 백성들만 적발될 뿐."(1478년 4월 21일 '성종실록')

도승지 임사홍은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능하며 직언을 서슴지 않는 관료였다. 그런 그가 왕도, 사림도 기대 않던 말을 하니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임사홍은 그날로 사림에게 '소인(小人)'으로 찍혀 퇴출 대상이 되었다.

 

 

임사홍의 맏아들 광재는 선대 예종의 사위였다. 성종은 유능한 관리이자 왕실 사돈인 임사홍을 변호했지만, 삼사(三司)를 장악한 사림은 처단을 요구했다. 결국 임사홍은 그 다음 달 의주로 유배형을 당했다. 서자 출신으로 세조에게 눈에 띄어 출세한 유자광도 싸잡혀 동래로 유배당했다.(1478년 5월 8일 '성종실록')

정3품 통정대부 도승지 임사홍은 백수로 10년을 살았다. 10년 뒤 성종은 임사홍에게 절충장군 부호군 관직을 하사했다. 종4품이자 실권 없는 무반직이다. 삼사가 전원 반대했지만 성종은 관철시켰다. 또 3년 뒤 성종은 딸 휘숙옹주를 임사홍 넷째 아들 숭재에게 시집보냈다.(1491년 8월 27일 '성종실록')

하지만 임사홍은 여전히 백수였다. 조정을 장악한 사림은 전원이 그를 소인이라 부르며 관직 중용을 거부했다. 1494년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등극했다. 문득, 한 많은 임사홍에게 시대가 열렸다.

연산군의 기 싸움과 임사홍의 부활

임숭재의 아내 휘숙옹주는 연산군이 예뻐하는 누이동생이었다. 중종반정 세력이 쓴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임숭재는 '자기 여동생을 연산군과 동침하게 하고, (왕이 좋아하는) 처용무를 추며 왕 앞에서 온몸 마디마디로 재롱을 떨어 왕의 악(惡)을 키우는 데 못 하는 일이 없었다. 병들어 죽게 되자 숭재가 왕에게 남긴 말은 "미인(美人)을 바치지 못한 게 한"이었다.'(1505년 11월 1일 '연산군일기')

그런 아들 덕에 임사홍은 부활했다. 등극 2년째, 연산군은 임사홍의 품계를 한 등급 올리라 명했다. 삼사에서 "간교함이 한이 없으므로 불가하다"고 반대했다.(1496년 7월 25일, 8월 5일 '연산군일기')

기(氣) 싸움이 시작됐다. 1497년 4월 3일 연산군이 그에게 정3품 가선상호군 품계를 내렸다. 대간이 전원 사표를 내버렸다. 연이은 반대 속에 그해 12월 27일 연산군은 임사홍의 품계를 올려 종2품 가선대부 상호군으로 삼아버렸다. 임금 매제인 아들 '빽'과 거친 임금의 기 싸움 와중에 임사홍은 위세도, 벼슬도 수직 상승해갔다. 이렇게 임사홍의 품계를 상승시키고 마침내 연산군이 "임사홍을 관직에 기용하라"고 대놓고 명했다.(1503년 1월 21일 '연산군일기') 절치부심에 와신상담하던 임사홍이 드디어 입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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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극, 그리고 아들의 희생

그사이 무오사화가 터졌다. 죽은 사림 거두 김종직이 세조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무오사화를 기획한 간신은 김종직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유자광이었다. 그런데 그 아들 유방 또한 사건에 연루됐음이 드러났다. 유자광은 연산군에게 아들 사면을 탄원했고 연산군은 유방을 석방하라고 명했다.(1498년 8월 23일 '연산군일기') 임사홍 둘째 아들 희재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됐다. 이목이라는 사람 집에서 임희재 편지가 나왔는데, 내용이 불손했다. 연산군은 임희재를 곤장 100대와 유배형에 처했다.(1498년 7월 27일 '연산군일기') 아비는 무사했다.

 

사람 취급 못 받았던 환관이었지만, 김처선은 혀를 잘리고 사지가 잘리고 배를 화살로 뚫리면서도 연산군이 벌이는 폭정을 면전에서 비판하며 죽었다. 사진은 서울 노원구 월계동 비석골근린공원에 서 있는 석물들. 골짜기 위쪽 초안산에 버려진 내시(환관) 무덤들에서 모아온 석물들이다.

 

그리고 문제의 갑자사화가 터졌다. 연산군이 재위 내내 벼르고 있던 친모 윤씨 폐비 사건을 공론화한 것이다. 연산군은 10년째인 1504년 봄부터 피바람을 일으키며 연루자들을 죽여 나갔다.

연산군에게도 복수였고, 임사홍에게도 복수였다. 중종반정 세력이 쓴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공조참판으로 조정에 복귀한(국사편찬위, 실록 인물정보) 임사홍은 '오래도록 폐출돼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죄를 얽어 사건을 만들었다.' 임사홍을 비롯한 정승들과 판서들은 혐의를 확정한 자들을 처형하고 참시(斬屍·시체를 목 자름)하자고 결의했다.(1504년 윤4월 20일 '연산군일기')

임사홍의 아들 희재 또한 갑자사화 때 목숨을 잃었다. 무오사화 때 유배형으로 죽다 살아났으나, 그가 써놓은 글이 문제였다. 허균의 형 허봉(1551~1588)이 쓴 '해동야언'에 따르면, 어느 날 임사홍 집에 들렀던 연산군이 '요순을 섬기면 태평성대이거늘, 진시황은 무슨 일로 사람들을 괴롭혔나'라 쓴 병풍을 보았다. 연산군이 필자를 물으니 임사홍이 "아들 희재가 썼다"고 답했다. 분노한 연산군이 "내가 그를 죽이려 하니 경의 뜻은 어떤가" 하고 물으니 사홍이 꿇어앉으며 "일찍 아뢰고자 했는데, 제 아들이 원래 성품과 행실이 불순하다"고 답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희재는 항시 그 아비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허봉, '해동야언' 무오당적: 허봉은 이 일화를 '무오사화' 관련 항목으로 기록했는데, 역사적 맥락으로 볼 때 갑자사화가 더 신빙성이 있다.) 무오사화 지휘자 유자광이 자기 아들을 살린 탄원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화다. 그래서 임사홍의 아들 희재는 살점이 조금씩 뜯겨 나가는 끔찍한 능지처사형을 당했고(1504년 10월 28일 '연산군일기'), 아비 임사홍은 이후 승승장구했다. 딱 2년을.

배신의 대가, 조소와 죽음

 

이미지 크게보기1997년 임사홍 후손들이 세운 묘비. ‘신하 된 도리를 지키다가’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비석 옆에는 갑자사화(1504) 때 연산군이 죽인 임사홍 둘째 아들 임희재의 후손도 입석에 동참했다고 적혀 있다.

 

1505년 봄날, 연산군이 대신들에게 일렀다. "서울로 부른 기생은 공물(公物·공적인 재산)이니 첩으로 삼지 말라." 모두가 "지당하십니다"라 답했다. 연산군이 또 물었다. "임금과 신하는 한마음이어야 하니, 임금 앞에서 서로 따지고 드는 것은 옳지 않다." 임사홍이 답했다. "정치는 물 흐르듯 거스름이 없어야 하니 지당하시나이다."(1505년 5월 29일 '연산군일기')

넉 달 뒤 임사홍은 채홍사(採紅使)로 연산군에게 바칠 기생을 고르러 개성으로 떠났다. 그런데 미모와 노래와 태도 가운데 노래에 능한 여자가 없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연산군이 이리 답했다. "선비들에게 수십 년 배척받던 자를 내가 특별히 물에서 건져줬으니 힘을 다해 나라를 위해야 하거늘 사홍은 참으로 소인이구나."(1505년 9월 18일 '연산군일기')

그때 임사홍 나이 예순이었고, 벼슬은 병조판서요 봉작은 종1품 숭록대부였다. 아들을 희생시키고 얻은 껍데기밖에 없는 권력이었다. 자기를 10년 넘도록 바닥으로 떨어뜨린 사림들에게 복수는 했지만, 그 자신이 즐길 권력은 없었다. 겉은 권력 냄새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으나, 폭군의 혀에 불과했다. 그 폭군은 일찌감치 무오사화 때부터 "임희재 아비가 소인(小人)이더니, 아들도 똑같구나"라며 사홍을 업신여긴 터였다.

이듬해 9월 2일 밤 중종반정이 터졌다. 임사홍은 반군에 의해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그달 26일 반정 세력은 땅에 묻힌 임사홍을 관에서 끄집어낸 뒤 목을 잘랐다.

"상감은 다리 없어도 걷겠소?"

대신들이 기생은 공물이며 논쟁은 금지라는 말에 "지당하십니다"를 외치기 한 달 전 환관 김처선이 죽었다.(1505년 4월 1일 '연산군일기') 김처선은 "임금 네 분을 섬겼지만 전하처럼 행동하는 이는 없었다"고 연산군에게 직언을 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연산군은 그를 화살로 쏴 넘어뜨리고 다리를 잘라버리고는 일어나라 명했다. 김처선은 "상감은 다리가 없어도 걷소이까"라 힐난했다. 연산군이 그 혀를 잘라버리고 배를 갈라버렸는데, 죽을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아니하였다.(조신, '소문쇄록', 1525(?)) 그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이게 전부다. 장황한 임사홍 기록보다 강하고 장엄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9/20200729001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