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허공에 흩어지는 참혹한 말들 사이로 말없이 떠오르는 나무
길을 가다가 멈춰야 할 만큼 눈에 확 들어오는 풍경을 만났습니다. 풍경의 중심에는 물론 나무가 있었습니다.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 하늘로 불쑥 치솟아오른 나무 줄기의 끝 부분만 보여드렸던 나무입니다. 지난 답사 중에 구미시의 외곽에서 만난 나무입니다.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는 두 그루의 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겠다고 미리 말씀드렸는데요. 그 가운데 별다른 이야기 없이 풍경만으로도 충분하다 싶은 느티나무부터 보여드립니다. 〈구미 백현리 느티나무〉입니다. 백현리는 구미시의 동쪽 산동면에 속하는 작은 마을입니다.
○ 환경자원화시설의 일환으로 지은 야외공연장을 지키는 나무 ○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백현리에 속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사는 마을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지도를 살펴봐도 마을까지는 꽤 먼 거리입니다. 〈구미 백현리 느티나무〉는 산동참생태숲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됩니다. 산동참생태숲은 산림문화관과 함께 ‘구미에코랜드’에 속한 숲입니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최근 구미시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로 추진한 ‘환경자원화시설’ 자리입니다. 2005년에는 설치를 결정한 뒤, 2011년 1월에 준공한 393,072 평방미터 넓이의 큰 규모의 시설이지요. 환경자원화시설 부지의 북쪽 가장자리 언덕 아래 길가, 나무가 서 있는 자리의 언덕 위로는 현대식 건물 한 채와 그 옆의 축구장이 빼꼼히 올려다 보입니다.
축구장에서는 한창 축구에 열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넘어옵니다만 그밖에 다른 인기척은 거의 없고, 바로 옆의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도 많지 않은 한적한 곳입니다. 축구장 옆의 현대식 건물은 .‘주민편익시설’이라는 이름의 현대식 건물로 주민 화합 공간을 비롯해 목욕탕과 조망 좋은 카페테리아와 문화강좌실이 있지만,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보였습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특별한 행사가 아닌 한, 일상적으로 이용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넓은 규모의 시설을 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꽤 근사한 시설로 보입니다.
○ 큰 그늘을 드리우기보다는 연극이 끝난 뒤 배우처럼… ○
나무는 ‘환경자원화시설’의 야외공연장에 서 있습니다. 환경자원화시설 추진 과정에서 야외공연장으로 꾸민 거죠. 공연장 가장자리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는 6백 년 정도 이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나무입니다. 마치 ‘연극이 끝난 뒤’처럼 약간은 썰렁한 느낌의 텅빈 공연장에서 바라보는 사람 하나 없이 지난 6백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외로이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나무는 하늘로 16미터 넘게 가지를 뻗어올렸고, 사람 가슴높이에서 잰 줄기 둘레는 7미터 쯤 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찬 나무입니다. 이번 구미 답사에서 만난 나무 중에는 6백 년 넘은 은행나무를 한 그루 만나기도 했는데, 그 나무와 함께 가장 오래 된 나무입니다.
〈구미 백현리 느티나무〉는 여느 느티나무와 조금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거개의 느티나무는 곧게 솟아오른 굵은 줄기 아래 쪽에서 뻗어나오는 가지부터 사방으로 넓게 펼치면서 큰 그늘을 이루지요. 그런데 이 느티나무는 옆으로 뻗기보다는 위로 높이 솟아오른 쪽으로 양분을 더 많이 활용한 듯합니다.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진 것도 여느 느티나무와는 조금 다른 모습입니다. 갈라진 줄기는 모두 수직으로 오르다가 가지 끝 가까이에 이르러서 마치 제 무게가 힘겨워 옆으로 펼친 듯한 모습입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적잖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수관폭이 비좁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 바람에 사람을 품는 나무 그늘은 좁지만, 줄기 안쪽으로 난 가지들이 빽빽해서 나무 한 그루로서의 모습은 성긴 곳 없이 무성합니다. 더 옹골찬 모습이라고 해도 될 듯합니다.
○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내는 말들이 허공에 흩어지고 ○
나중에 자료를 살펴보니, 이 자리는 예전에 밭이었다고 합니다. ‘야외 공연장’으로 조성하기 전의 모습이 사뭇 궁금해집니다.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밭을 품고 있던 시절의 나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질 수밖에요. 나무가 가지를 펼치지 않고 높이 오르는 쪽으로 큰 데에 무슨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마을이 곁에 없어서 오래 전의 사정을 이야기해 줄 사람을 찾기도 어려워 일단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궁금증이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다시 찾아와 나무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 어른들을 찾아뵈올 수도 있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그렇게 말 없이 홀로 서서 적당한 궁금증과 그에 알맞춤한 그리움으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래 남곤 합니다.
수도권의 교통 정체를 피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재우쳤던 답사 일정은 특별한 느낌의 〈구미 백현리 느티나무〉에서 마무리하고, 붉게 타오르는 저녁 노을 바라보며 돌아오는 뿌듯한 답사길이었습니다. 다음 《나무편지》에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심은 나무’라 해도 될 만한 특별한 모과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어지러운 말들이 쏟아지는 날들입니다.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을 떠돕니다. 생각이 나눠지고, 사람도 나눠집니다. 가슴에 들어와 자리하는 말은 많지 않고, 허공을 맴돌고 맴돌다 흩어집니다. 그래도 말들은 끊이지 않습니다.
육백 년의 긴 세월을 아무 말 하지 않고도 가장 많은 말을 바라보는 사람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남기는 나무를 가만가만 더 오래 바라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고맙습니다.
- 말 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많은 말을 남기는 나무를 바라보며
7월 13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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