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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나무를 찾아서] 이 땅의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무를 심은 사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7. 22. 15:27

[나무를 찾아서] 이 땅의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무를 심은 사람

지난 《나무편지》에서 미리 말씀드렸던 나무 이야기를 전해드릴 차례입니다. 구미에서 만난 한 그루의 아주 예쁘게 잘 자라고, 잘 지켜진 모과나무입니다. 구미 선산읍 신기리의 풍광 좋은 언덕 마루에 놓인 ‘송당정사’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옛 정자 앞에 서 있는 예쁜 나무입니다. 나무를 찾아 구미 지역을 부지런히 다니던 중에 선산읍에 들게 됐습니다. 이름난 선비들이 많은 고장으로 이름난 고장이어서, 더 많은 나무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 길이었지요. 그중에 남다른 삶의 과정을 지나온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 선생의 흔적이 있는 신기리에 들어섰습니다. 처음엔 주소를 잘못 검색하는 바람에 신기리 강변까지 가서도, 송당정사를 찾지 못하고 강변길을 오락가락했습니다.

○ 무인으로 시작해 한의학자로 삶을 마무리한 옛 선비 ○

겨우, 멀리서 빼꼼히 내보이는 송당정사의 지붕을 찾고, 마침내 송당정사 입구를 제대로 찾아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아도 한눈에 아늑한 정자입니다. 길 입구에 ‘하마비’가 눈에 보이기에 옛 사람들처럼 걸어서 오르기 위해 자동차에서 내려 송당정사로 올라갔습니다. 길 오른 편으로 나무가 눈에 들어왔지만, 먼저 집의 어른께 인사를 올리려고 왼편의 정갈한 살림집을 찾아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내어 주인 어른께 기척을 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기에 집 뒤편으로 들어섰습니다. 종가인 이 집을 지키는 분은 언덕 위에 계셨습니다. 송당 박영 선생의 19대손인 박혁진 님이었습니다. 이 집을 지키는 종손입니다.

“이 모과나무는 송당 할아버지의 학문에 대한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특별한 나무입니다. 그가 무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생명을 존중하는 실천성리학자이자, 한의학자이며 의사로서 손수 심은 나무이거든요.” 박혁진 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꽤 오래 이어졌습니다. 대부분 송당 박영 선생의 일생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무신으로 입신출세를 시작하여 나중에 성리학자로, 급기야 한의사로 일생을 다채롭게 이어간 남다른 삶의 여정을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들려주셨습니다. 강물에 들어가 온몸을 물로 적신 이 집의 큰 개 세 마리가 착하게 다가와 처음 나타난 나그네에게 물을 털어내는 순하디 순한 ‘난동’만 아니었다면 이야기는 더 계속됐을 겁니다.

○ 《대학》을 이만 번이나 통독하며 학문 탐구에 몰두 ○

선산 지역에서 태어나 자란 박영 선생은 스무 살을 갓 넘긴 1492년에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관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무인으로보다는 문신으로 세상에 나서고 싶었던 의욕이 컸습니다. 양녕대군의 외손인 그는 왕손의 한 명으로 다른 왕손들처럼 천하를 쥐락펴락할 문인으로의 삶을 살고 싶었던 겁니다. 결국 박영은 무과 급제 후 3년 만에 무관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낙동강이 내다보이는 낮은 언덕 마루에 송당정사라는 집을 지은 그는 학문 탐구에 몰입했지요. 그때 그의 공부를 도와준 사람은 이 지역에서 성리학의 정통 학맥을 이어가던 신당(新堂) 정붕(鄭鵬, 1467~1512)이었습니다. 박영은 네 살 연상인 정붕을 스승으로 삼고 학문에 매진했지요.

‘늦공부’라고 생각한 때문인지, 그의 공부는 지독했다고 합니다. 종손 박혁진씨의 이야기에 따르면 《대학》을 2만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는 겁니다. ‘대학동자’라는 별명을 얻은 건 그래서입니다. 그 시기에도 조정에서는 그를 종종 불러냈지만, 박영은 벼슬자리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벼슬이라도 자신의 사정과 입장에 맞춰 내치기 일쑤였지요. 하지만 왜구의 침입과 같은 나라에 위험이 닥쳤다고 판단될 때는 서슴없이 칼을 들고 나서는 천생 무인이었습니다. 그런 사정으로 ‘송당정사’에 머무르는 기간보다 고향을 떠나 한양에 머무른 시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 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공부를 찾아 ○

특이한 건, 이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던 박영이 한의학과 의술로 공부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겁니다. 전장의 지휘관을 지낸 그가 생과 사를 마주하고, 겨우 사선을 이겨낸 병사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야 했던 시간들을 돌아본 겁니다. 그는 자신의 성리학 공부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데에 얼마나 요긴할 것인지를 돌아보았죠. 이른바 ‘실천성리학’이랄 수 있는 분야에 몰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한의학 탐구로 실제 사람의 생명을 돌보겠다고 생각한 거죠. 이미 적지 않은 부상자 치료의 경험을 가졌던 그로서는 의술 공부에 효율이 높았고, 멀지않아 이웃 마을까지 효험 있는 명의로서 이름을 알리게 됐습니다.

정말 독하게 마음 먹고 공부하는 체질이었던 모양입니다. 한의학 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뒤에 그는 《경험방(經驗方)》 《활인신방(活人新方)》 과 같은 한의학 관련 주요 저술을 남기기까지 했으니까요. 게다가 나중에는 조정에서 내의원제조를 역임할 정도였다니, 대단한 일 아닌가 싶습니다. 독학으로 성취한 한의학의 경지가 이미 높은 수준이었다는 걸 알려주는 거죠. 무신으로 시작해서, 성리학을 거쳐 한의학과 의술까지……. 그런 선조를 자랑스러워 하는 후손 박혁진씨는 “결국은 모든 학문의 궁극적 귀결점이 사람을 살리는 데에 모아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인 듯해요. 요즘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융합학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이야기합니다.

○ 평범한 백성이 흔히 겪는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

아! 나무 이야기를 아직 하지 않았네요. 박영 선생이 나무를 심은 건, 한의사로서 이름을 알리던 때였습니다. 5백 년 전쯤입니다. 그가 심은 나무는 모과나무였습니다. 하고한 나무 가운데에 그는 왜 모과나무를 심었을까요? 후손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약재로 쓰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모과나무의 열매는 먹을 수 없지요. 하지만 약재로는 오래전부터 요긴하게 쓰였지요. 기침 감기를 비롯해, 구토 설사와 위장병에 효과가 좋았습니다. 기침, 감기, 설사, 복통……. 백성들 누구나 흔히 겪는 병입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이 흔한 병에 제대로 된 치료법이 없다는 걸 안타까워 한 박영은 하나의 백성이라도 평안하게 보살피고 싶었던 겁니다.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질병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백성이 가장 흔하게 치르는 병을 낫게 하고 싶었던 거죠. 그가 모과나무를 선택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영이 오백 년 전 그때 심은 모과나무는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언덕을 오르며 흘깃 보았던 모과나무, 바로 오늘 《나무편지》에 사진으로 담은 나무는 250년쯤 된 나무입니다. 박영이 심고 키우던 나무가 죽자 그의 후손들이 선조의 귀한 뜻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그 나무의 후계목으로 그 자리에 키운 겁니다. 〈구미 신기리 송당정사 모과나무〉입니다. 나무는 높이가 10미터까지 자랐습니다. 여느 모과나무에 비하면 큰 편에 속합니다. 게다가 뿌리 부분에서부터 이미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사방으로 고르게 펼친 나무 줄기는 아름다운 수형을 이루었습니다. 모과나무는 우리나라의 전 지역에서 잘 자라지만, 이만큼 아름다운 수형으로 자란 모과나무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 “하늘과 인간을 꿰뚫었다”는 미수 허목의 비문 ○

나무 앞에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남은 건,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옛 사람의 마음이 그 안에 담긴 때문입니다. 또 옛 사람의 뜻을 오래 기억하려는 후손들의 손길도 나무를 더 아름답게 한 이유일 겁니다. 박영이 죽음에 들자 같은 사림파의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하늘이 사문을 버리지 않아(天不喪斯文)/이 땅에 사람이 있었다(東隅尙有人)”로 시작하는 장편의 만시(挽詩)를 남겼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이 이 땅에 남긴 사람으로 기억할 사람이 심고 키운 한 그루의 나무, 지금 나무 앞에 서서 스스로 순하고 착해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의 《나무편지》가 택도 없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마쳐야겠습니다. 아, 참! 송당 정사 앞에 세워 놓은 비碑를 만난 건 덤으로 얻은 즐거움이었습니다. 박영 선생이 돌아가시고 130여 년이 흐른 1540년에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이 박영의 학문이 ‘하늘과 인간의 가르침을 꿰뚫었다(貫天人之敎)’는 등의 내용으로 짓고, 손수 써서 세운 것입니다.

이제 그때 그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사람을 위해 사람이 심은 나무만 남았습니다. 야릇한 질병의 횡행과 사람의 가슴에 비수되어 꽂히는 어지러운 말들이 일상적으로 횡행하는 이 즈음, 한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이 땅의 참 화평을 기원하며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은 큰 선비가 그립고 그립습니다.

고맙습니다.

- 모두가 더 건강하고 화평하기를 기원하며 심은 나무 앞에서 7월 20일 아침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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