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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이별의 정’을 오동나무에 빗댄 옛 시인의 절창 한 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5. 18. 21:40

[나무생각] ‘이별의 정’을 오동나무에 빗댄 옛 시인의 절창 한 수

지난 주 《나무편지》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오늘 《나무편지》에서는 우리의 옛 사람 가운데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히는 황진이의 시 한 수 보여드립니다. 제목 《奉別蘇判書世讓》만으로 일러드렸던 시입니다. 우선 전문을 보겠습니다. 아, 참! html 로 옮겨지는 중에 한자가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제 홈페이지 솔숲닷컴 http://solsup.com 에 와서 보시면 제대로 보실 수 있습니다.

奉別蘇判書世讓
- 黃眞伊

月下梧桐盡
霜中野菊黃
樓高天一尺
人醉酒千觴
流水和琴冷
梅花入笛香
明朝相別後
情與碧波長

○ 이 땅 최고의 시인 ‘황진이’의 절창 한 수 ○

대개의 경우, 한시漢詩의 멋과 맛을 한글로 온전히 옮기에는 쉽지 않습니다만, 황진이가 남긴 한시는 비교적 한글로 옮겨도 원문의 느낌을 그리 많이 훼손하지 않는 듯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글로 바꿔 쓰면 이렇게 됩니다.

삼가 소세양 판서와 이별하며
- 황진이

달빛 아래 오동나무 잎 다 지고
들국화 서리 맞고 노랗게 피었다
하늘 닿을 듯 높은 지붕의 정자에서
취한 줄 모르고 술잔 이어간다
거문고 울음 따라 흐르는 물 차갑고
매화 꽃 향기는 피리 가락에 스민다
밝아오는 아침에 님 떠나보내면
사무치는 그리움 물결처럼 끝없으리

소세양蘇世讓과의 이별을 앞두고 지은 시이니 시인은 제목을 《삼가 소세양 판서와 이별하며》라고 했습니다만, 시에 표현한 느낌을 고스란히 담아내기에는 모자란 제목이지 싶습니다. 지난 해에 낸 제 책 《나무가 말하였네》에서는 그래서 《마지막 오동잎 지고》라고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시인이 표현한 여러 이미지 가운데에 오동나무 이미지가 가장 강렬하지 싶은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오동나무만으로 이 시의 심상을 모두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피리 가락에 스미는 ‘매화 꽃 향기’도 그렇고, 서리 맞고 피어나는 ‘노란 들국화’도 이미지는 강렬하니까요. 하지만 이별을 앞둔 시인의 마음에 가장 절실했던 이미지는 아무래도 오동나무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 언제나 ‘이별을 채비’하는 한 그루의 나무 ○

지난 《나무편지》에서 딸 아이를 낳으며 심는 오동나무에는 ‘아비의 이별 채비’라는 이미지가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더불어 이 땅의 가을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오동나무 낙엽입니다. 옛 사람들이 우리의 가을을 ‘오동추梧桐秋’라고 표현한 것도 그래서이겠지요. 가을 낙엽이 모두 그렇지만 오동나무처럼 넓은 잎을 가진 나무가 한 잎 두 잎 허공으로 날려보내는 낙엽 풍경은 가슴을 ‘쿵’하고 칠 만큼 강한 인상을 강렬합니다. 그러니까 오동나무는 봄과 여름 사이의 경계에 피어나는 꽃도 좋지만 아무래도 가을 낙엽이 백미 아닐까 싶은 겁니다.

다시 오늘의 시를 돌아보지요. 이별을 앞둔 시인은 시의 첫머리에서 오동나무 잎이 다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별의 순간이 왔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실제로 시인 황진이와 판서 소세양이 이별한 계절이 봄인지 가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는 그 때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입니다. 뒤에 보면 봄에 피어나는 매화 꽃 향기를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시인은 계절의 상징으로 나무와 꽃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나무와 꽃에 담긴 이미지를 드러내고 싶었던 거라고 보는 게 온당하지 싶습니다. 매화 꽃과 오동나무 낙엽을 동시에 볼 수는 없으니까요. 시인의 실수나 오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대상에 담긴 심상을 빌려오려 한 시인은 계절을 초월했습니다.

○ 오동나무 꽃 진 길 위로 조심스레 발걸음 놓으며…… ○

나무에서 이별의 이미지를 끄집어내고, 다음 날 동이 트면 떠나보내야 할 님과의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인의 애절한 마음이 참 간절합니다. 시인이 남긴 몇 안 되는 시편들이 모두 절창이지만, 이 시는 이별시로 더 없이 아름답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짚어집니다. 이 시에 얽혀 전해오는 재미있는 뒷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 시는 그 자체만으로 오래 여운이 남습니다.

벌써 오동나무 꽃이 떨어졌다는 소식입니다. 이제 백일을 미처 채우지 못한 ‘춘안거春安居’ 생활을 조심스레 해제하겠습니다. 낯선 곳의 나무를 향한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늘 조심하는 방법을 새기며 이 땅의 나무들을 향해 길 위에 오르겠습니다. 다음 《나무편지》부터는 길 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띄우게 될 겁니다.

오늘의 사진은 위에서부터 1. 꽃개오동나무 품종의 꽃. 2. 절집 마당 가장자리에 서 있는 오동나무, 3. 벽오동의 푸른 줄기, 4, 오동나무 열매, 5, 개오동나무 열매, 5. 벽오동 열매입니다. 오동나무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나무들의 차이를 살펴보세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더 조심스레 건강 지키시기 바랍니다.

- 오동나무 꽃 진 여름의 문턱을 넘어 길 위에 오르며 5월 18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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