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생각] 버빗원숭이와 이팝나무가 언어로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
버빗원숭이의 언어에 대한 글을 읽는 중이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여기는 원숭이들 사이에 분명한 소통의 수단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언어’의 정의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뒤로 미룬다 해도, 분명한 건 버빗원숭이들 사이에 단순한 ‘소리’를 뛰어넘는 ‘언어’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포식자가 공중에서 날아올 때와 땅 아래에서 나타났을 때에 그들이 동료들에게 전하는 말은 달랐습니다. 동료 버빗원숭이들은 그 말에 따라 행동 방식이 달랐습니다. 분명히 내용을 가진 언어에 근접한 신호를 발화한 것이고, 다른 버빗원숭이들은 명백히 알아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포식자에게 쫓기는 버빗원숭이는 거의 한 시간 동안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는 겁니다. 굳이 말로 위험 상황을 전달해야 할 동료가 없기 때문이었지요.
○ 꽃 활짝 피운 이팝나무의 언어를 생각합니다 ○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과 의미를 밝히는 책을 잠시 덮어두고 길을 나섰는데, 길가에 즐비한 이팝나무 가운데 멀리 내다보이는 몇 그루의 가지 끝에서 뭔가 보솜한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에 서 있는 이팝나무를 보니, 아하! 이팝나무 하얀 꽃이 벌써 피어난 겁니다. 더 멀리 내다보니 이미 온 가지에 하안 꽃을 풍성하게 피워낸 이팝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내는 지금 이 땅의 봄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개화입니다. 그러고보니, 오월이군요. 삼월 사월은 언제 다 지나갔는지요. 책상 앞에 틀어박혀 책만 보는 간서치(看書痴) 노릇을 하며, 책상 옆에 탑처럼 쌓여 올라가는 책들의 높이보다 빠르게 이 땅의 봄이 우리 곁을 떠나가는 중입니다. 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이팝나무 곁에 잠시 머물러서 나무의 말, 나무의 언어를 생각했습니다.
버빗원숭이처럼 나무도 곁에 서 있는 다른 이팝나무에게 뭐라 말을 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생물학에서 버빗원숭이의 다양한 말을 눈치채게 된 것도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닙니다. 음성학 연구의 괄목할 만한 발전 끝에 겨우 알게 된 겁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다양한 발성을 모두 해석하는 건 아직 언감생심이지요. 그들의 ‘웅웅’ 거리는 소리가 사람의 청각 기관으로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똑같은 소리를 놓고도 그 소리를 듣는 동료 버빗원숭이들의 행태는 다르게 나눠집니다. 언어에 의한 소통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동물에게 언어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나마 자연계 중에서 호모 사피엔스에 가장 가까운 종인 버빗원숭에게서나 겨우 하나 둘 알아채기 시작한 겁니다.
○ 사람의 DNA와 98.4%가 똑같은 생명과 더불어 ○
나무는 진화 과정에서 비교적 사람과 많이 떨어져 있는 종입니다. 현대 인류의 DNA와 고작 1.6%밖에 다를 게 없는 생물 종이 버젓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사정에 비춰보면, 나무는 우리와 무척 다른 종류의 생명체라 해야 하겠지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나무들 사이에도 분명한 의사소통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뿐입니다. 나무들에게도 버빗원숭이처럼 그들 특유의 언어가 있을지 모릅니다. 마치 우리가 박쥐의 소통수단인 초음파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단순한 의사소통이라는 상징적인 소통 수단, 그 이상의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침묵의 이 봄, 도시의 거리에 늘어선 나무들은 어떤 언어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중일까, 궁금해진 건 그래서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찾기 위해 골몰하는 진화생물학에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생물과 사람의 다른 점과 같은 점, 비슷한 점을 찾아내려 애씁니다. 물론 그 동안 매우 놀랄 만한 결과도 많이 얻어냈지요. 진화생물학이라는 학문이 흥미로운 건, 자연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의 위치와 의미를 짚어낸다는 점입니다. 더 흥분되는 건, 수십억 년의 역사 속에서 진화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이 끊임없이 진행형이라는 겁니다. 아직 완결되지 않은 부분이 많을 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연구 성과가 속속 밝혀지면서, 이전의 연구 결과를 한 단게 진전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또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서점의 서가를 뒤적이고는 ‘보관함’ 목록에 몇 권의 책을 추가합니다.
○ 반어법을 배우는 중인 도시의 꽃을 바라보며 ○
이팝나무에 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도시의 길가에서 나무가 꽃 피우는 걸 시인 손택수는 명시 “나무의 수사학”에서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이미 알았던 겁니다. 나무는 분명히 자기만의 언어를, 문법과 수사법까지 구사할 수 있는 명백한 언어가 있다고 시인은 노래했습니다. 이제 다시 길 위에 올라 반어법이든 명령법이든 은유법이든 나무의 언어와 ‘나무의 수사학’에 귀 기울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 자연과 공존하지 못해 한 해의 봄을 그대로 허공에 날려버린 이 침묵의 봄에 우리가 몸 깊은 곳에 새겨 넣어야 할 자연의 외침입니다. 더불어 그것만이 자연과 더불어 이 땅에서 우리가 더 오래 건강하게 살아가는 가장 올바른 길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에서 이야기한 버빗원숭이 이야기는 《총균쇠》의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지은 또 하나의 명저 《제3의 침팬지》 214~257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사진 가운데 맨 위 사진은 경남 양산 신전리 이팝나무이고, 그 다음 석 장은 제 작업실 앞 길가의 이팝나무 꽃이며, 그 다음 두 장은 그 이팝나무에서 맺은 열매입니다.
- 이팝나무 꽃 활짝 핀 도시의 거리에서 5월 4일 아침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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