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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옛 사람들의 자취가 남은 아주 특별한 한 그루 은행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0. 30. 13:38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

[나무를 찾아서] 옛 사람들의 자취가 남은 아주 특별한 한 그루 은행나무

  은행나무에 가을이 내려앉았습니다. 지역에 따라 아직 이른 곳도 있긴 하겠지만, 아마도 우리나라 대개의 지역에 서 있는 은행나무들에는 골고루 노란 가을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입니다. 충남 서산시의 번잡한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서산향교 경내에 서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의 잎에도 조금씩 노란 단풍 빛이 깊어갑니다. 서산향교의 은행나무를 찾아본 것은 지난 시월 십구일이었습니다. 열흘 쯤 전입니다. 그때에는 나뭇잎의 가장자리에만 겨우 노란 빛이 올라온 상태였습니다만, 열하루가 지난 오늘 쯤에는 아마도 노란 빛이 더 짙어졌을 겁니다. 얼마나 더 노랗게 물들었을지 궁금합니다.

  ○ 충남 서산의 향토사 기록에 남아있는 은행나무 ○

  서산향교를 처음 지은 건 조선 초인 태종 6년(1406)입니다. 처음에는 서산읍성의 서문 밖이었다고 합니다. 서산읍성 서문의 위치는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데요. 대략 서산의 서쪽으로만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부터 백년 쯤 지난 선조 7년(1574)에 서산군수로 부임한 최여림(崔汝霖, 1524 ~?)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전합니다. 우리의 서산향교 은행나무는 바로 그때에 서산 지역의 명문가였던 청주한씨 일가의 선조의 한 분이 심은 나무라고 전합니다.

  이는 그 가문의 후손인 한여현(韓汝賢, 1571~?)이 그의 부친 한경춘(韓慶春, 생몰년 알 수 없음)과 함께 선조15년(1582)에 시작하여 광해군11년(1619)까지 37년에 걸쳐 완성한 서산지역 최초의 군지 郡誌 《호산록 湖山錄》에 남아있는 기록입니다. 《호산록》은 서산군수로 부임한 고경명(高敬命)의 제안으로 집필한 서산지역의 대표적인 기록물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한여현의 선조가 네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돼 있는데, 지금의 서산향교 은행나무는 그 가운데 살아남은 한 그루라고 보면 될 겁니다. 기록대로 1524년에 심은 나무이니, 지금으로부터 오백년 전 쯤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서산향교 은행나무는 오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유학의 가르침을 따르는 선비들이 즐겨 심어 ○

  지금까지 우리 곁에 살아있는 나무들 가운데에 가장 오래 전에 이 땅에 출현한 나무로는 우선 은행나무를 꼽습니다. 무려 삼억 년 전에 이 땅에 자리잡은 나무이니까요. 대멸종의 위기를 이겨내면서까지 우리 곁에 살아남은 식물로, 태곳적의 화석에서 은행나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화석 식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생명력이 무척 강한 나무이기는 하지만, 은행나무는 스스로의 번식이 어려운 나무입니다. 사람이 심어 키워주어야 널리 번식할 수 있는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은행나무 역시 저절로 자란, 즉 자생하는 나무라기보다는 사람이 심어 키운 나무라고 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은행나무를 많이 심어 키운 건,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의 일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려 한 유학자들은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따르려 했지요. 후학을 가르칠 번듯한 건물을 마련할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공자는 그 시절에 큰 나무 아래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학문을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그렇게 공자의 학당이었던 곳을 행단 杏壇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여기에서의 행杏이 은행나무를 가리킨다고 본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서 행은 ‘살구나무 행’인데, 은행나무의 행 역시 같은 자를 씁니다. 그래서 아직도 행단의 행이 살구나무냐 은행나무냐에 대해서 이견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행단의 행을 은행나무로 해석한 것이 분명합니다.

  ○ 서산시를 대표하는 은행나무로 오백년을 살아 ○

  지금 남아있는 유학과 관련한 건축물 주변에는 살구나무가 아니라 오래된 은행나무가 살아 있는 것은 당시 유학자들이 해석한 행단의 행이 은행나무였다는 이야기라는 증거지요. 오래 된 향교, 서원이 그렇습니다. 이처럼 은행나무를 좋아하는 분위기는 유학자들 바깥으로도 번졌던 모양입니다. 특히 유학을 숭상하는 반면 억압의 대상이었던 불교에서까지도 은행나무를 좋아했던 분위기는 이어졌지요. 우리나라의 절집에 은행나무가 많은 것도 그 예로 보아야 하지 싶습니다. 그 처음 시작이 유학자들에 의해서인지 불가의 스님들인지는 정확하지 않아도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시대의 절집에서도 은행나무를 많이 심어 키운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서산향교를 서문 밖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은행나무 네 그루를 심은 것도 그런 까닭에서라고 보는 게 맞지 싶습니다. 서산향교의 명륜당 앞, 조붓한 마당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그로부터 오백년 동안 서산향교의 역사를 품고 살았습니다. 긴 세월을 살아남은 나무는 높이가 33미터까지 솟아올랐고,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는 4.3미터나 되는 규모로 크게 자랐습니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나라 안의 여러 은행나무와 비교해 봐도 매우 큰 나무에 속합니다. 1982년에 이 은행나무는 서산시 나무로 지정됐고, 이어 2008년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3호로 지정됐습니다. 그만한 가치가 충분한 나무입니다.

  ○ 무엇보다 기근이 풍성하게 발달한 특별한 나무 ○

  열매를 맺는 암나무인 서산향교 은행나무는 여전히 생식활동이 왕성해서 해마다 두 가마나 되는 은행을 맺는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서산향교를 찾았던 그 날도 은행나무는 내가 걷는 발걸음 뒤로 하나 둘씩 투둑투둑 은행 열매를 땅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이 나무를 처음 만나 본 건, 2003년 9월이었습니다. 지금은 절판시킨 책 《옛집의 향기, 나무》를 집필하기 위해 나라 안의 온갖 고택을 떠돌던 때였지요. 그때 이 나무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나뭇가지에 무수하게 매달린 크고 작은 기근이었습니다.

  유주 乳柱라고도 부르는 기근! 서산향교 은행나무에는 이 기근이 참 많습니다. 오십센티미터 넘을 만큼 길게 자란 기근은 물론이고, 이제 막 새로 돋아나는 기근까지 스무 개가 넘는 기근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은행나무의 기근이 아주 특별한 현상이라 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나무에서 이토록 많은 기근이 달린 건 인상적입니다. 서산향교 은행나무는 그래서 나는 서산향교 은행나무를 오랫동안 ‘기근이 많이 달린 은행나무’로 인상지워 기억해 왔습니다. 역시 이번 답사에서도 은행나무 가지에 매달린 기근을 헤아리며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볼 수록 신비로운 모습입니다.

  ○ 이 아름다운 가을 빛을 더 풍요롭게 맞이하기 위하여 ○

가을 햇빛이 중천을 넘어가는 오후에 서산향교에 들어서서, 어둑어둑 땅거미 지는 시간까지 향교 안을 서성였습니다. 짧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서산향교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뭇 적막감이 도는 옛 건축물 안에서 가을 날 오후 시간을 보내며 옛 사람들의 자취를 하나 둘 짚어 본 시간은 쓸쓸했지만, 적막해서 평안했고 고요해서 더 풍요로웠습니다.

  더러는 가을 빛을 충분히 끌어올린 나뭇잎들이 긴 겨울잠을 위해 하나 둘 낙엽되어 떨어집니다. 주말에는 한낮 햇살이 사뭇 뜨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주말 지나며 아침 기온은 더 쌀쌀해졌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셔야 할 날들이지만, 그래도 이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설 여유 찾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이 땅의 가을을 더 풍요로운 마음으로 맞이하기를 바라며 10월 30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