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세월의 모진 풍상 이겨내고 천연기념물로 우뚝 선 향나무
오래 친하게 지내던 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되었습니다. 서산 애정리 송곡서원 향나무 한 쌍이 그 나무입니다. 자주 찾는 천리포수목원 오가는 길에 들르면서 알게 된 나무이지요. 처음에는 서산에 사는 가까운 친구가 알려주어 찾아보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별다른 생각 없이 수목원 오가는 길에 들르면서 수인사를 하고 지내던 친한 나무입니다. 한 쌍의 향나무가 좋기도 했지만, 그 못지않게 향나무 곁의 솔숲이 더 좋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송곡서원 솔숲은 이제 다시 보기 어렵게 돼 안타까운 마음 큽니다. 칠십 여 그루의 큰 소나무가 무성하게 잘 자라면서 이룬 아름다운 솔숲이었던 이 숲은 지난 2010년 서산 지역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곤파스의 습격을 받아 그야말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고 말았어요. 대부분의 소나무는 쓰러지고 말았지요. 지금 남아있는 소나무는 그 뒤에 새로 심은 소나무들입니다. 위의 사진은 태풍의 습격 이전의 울창했던 솔숲의 풍경입니다.
○ 조선 전기의 선비 유윤이 어린 시절에 심은 나무 ○
송곡서원 향나무 한 쌍 역시 태풍 곤파스의 습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두 그루 중 한 그루의 향나무는 굵은 줄기 중간이 부러져 애초의 헌칠했던 풍채의 상당 부분이 손상됐지요. 칠십 여 그루의 소나무를 모두 쓰러뜨린 태풍의 피해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습니다. 예전의 풍채에 비하면 아쉬운 형태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라 안에서 첫 손에 꼽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향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태풍 곤파스를 이겨낸 송곡서원 향나무는 무려 육백 년이나 이 자리에서 살아온 나무입니다. 한 쌍의 향나무를 누가 심었는지까지 알려진 흥미로운 나무이기도 합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지역 출신으로 조선시대 전기에 활동한 선비 유윤(柳潤, ? ~ 1476)입니다.
지금의 송곡서원자리에 옛날 조선시대에는 서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선비 유윤이 어린 시절에 이 서당에서 공부를 했고, 나무를 좋아하던 유윤은 어린 시절에 바로 이 한 쌍의 향나무를 손수 심어 키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선비 유윤을 ‘나무를 좋아하는 선비’라고 한 건 단지 이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 때문만은 아닙니다. 뜻밖에도 서산 지역과는 거리가 있는 충북 청주 지역에서도 유윤과 관련한 나무를 찾아볼 수 있지요. 유윤은 단종 폐위 후 벼슬을 버리고 충북 청주의 무동(지금의 청원군 연제리)에 머물며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유윤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있어서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향나무가 유윤이 심은 나무라고 말해왔습니다.
○ 자신을 나무에 비유할 만큼 나무와 더불어 산 선비 ○
벼슬에서 물러난 유윤은 조용히 지내고 싶었지만, 그의 학문과 경륜을 높이 여기던 세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를 불러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유윤은 임금의 부름을 사양하며, 자신을 마을 뒷동산의 모과나무처럼 말 없이 살아가는 무동(楙洞)처사라고 했습니다. 즉 모과나무를 뜻하는 무(楙)자에 빗댄 이름이었습니다. 말없이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나무에 빗대어 이야기할 정도로 그의 삶은 나무와 밀착해 있었던 것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더 흥미로운 것은 유윤이 가리켰던 마을 뒷동산의 모과나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청원군 연제리의 그 모과나무는 우리나라의 모과나무 가운데에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 가운데 하나인데, 이 나무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유윤이 죽고 2백 년 쯤 흐른 뒤인 숙종 때에 서산 지역의 후학들은 유윤이 심은 한 쌍의 향나무 앞에 홍살문을 세우고, 그 안쪽에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서산 지역에서 뿌리를 내린 서산정씨의 시조인 정신보를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가 나중에는 유윤을 비롯한 서산 출신의 선비 여덟 명의 위패를 추가했습니다. 서원의 이름은 ‘송곡’, 즉 소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칠십 여 그루가 모여서 이뤄낸 솔숲도 그때의 소나무의 후예들이 이룬 숲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서원 앞마당에서 자연스레 서원목이 되어 자라난 향나무는 그로부터 긴 세월에 걸쳐 십미터 넘는 큰 키로 자랐습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한 나무입니다.
○ 앞으로도 오래 우리 곁에서 옛 선비의 숨결을 전해주기를…… ○
마침내 송곡서원 향나무는 지난 2018년 5월에 천연기념물 제553호로 지정 완료됐습니다. 송곡서원 곁의 아름다운 솔숲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까닭에 이곳을 들르면 유난히 허전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무도 이 땅에 살아가는 생명체인 이상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떠올려야 하겠지요. 이제 안타까움은 그만 기억 속에 넣어두어야 하겠습니다.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큰 나무로 살아남은 한 쌍의 향나무가 오히려 더 고맙고 장한 건 그 안타까움이 깊은 때문인지 모릅니다. 단순히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을 그저 좋다고만 할 게 아니라,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 곁을 지켜주며 옛 선비의 숨결을 느끼게 해 주기를 바라야 하겠습니다.
여름이 조금 일찍 다가온 느낌입니다. 급기야 일부 지역에는 아직 유월인데 벌써 폭염경보가 내렸을 정도입니다. 이번 주 중에는 장마전선이 북상하면서 전국에 비가 내리고. 비온 뒤에 기온이 좀 내려갈 것이라는 예보가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여름에 우리 사는 마을에 찾아올 무더위의 기세가 만만치는 않을 듯합니다. 이번 주에는 대학의 학기말 평가를 비롯한 학과의 모든 일을 다 마무리해야 합니다. 비교적 분주한 한 주일이 될 겁니다. 학교 일을 모두 마치고 나면, 그 동안 미뤄두었던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날씨가 걱정입니다. 건강 잘 챙기면서 더 많은 나무 찾아 더 오래 나무 곁에 머무르겠습니다. 모두 건강 조심하셔서 평안한 여름 잘 채비하시기 바랍니다.
○ 후반기 상동도서관 《나무강좌》 초청을 채비합니다 ○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립니다. 올 후반기 부천 상동도서관의 《나무강좌》 소식입니다. 참가 신청은 이번 주 중에 열게 될 상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받을 예정입니다. 후반기 나무강좌 대강의 계획은 위의 그림표를 참고하세요. 참가 신청 페이지가 마련되면 곧 《나무편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많은 참가 신청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폭염 경보 속에서 깊은 산 나무를 찾아 떠나며 6월 25일 이른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드림.
솔숲닷컴(http://solsup.com)의 '추천하기'게시판에 '나무 편지'를 추천하실 분을 알려 주세요.
접속이 어려우시면 추천하실 분의 성함과 이메일 주소를 이 편지의 답장으로 보내주십시오.
○●○ [솔숲의 나무 이야기]는 2000년 5월부터 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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