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나호열의 시창작론

펜을 잡으면 모두가 시인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9. 2. 21:06

펜을 잡으면 모두가 시인이다

나호열

 

2017년 구리문예대학에서 사 개월 동안 인생과 시를 함께 음미했던 시간이 벌써 그립고 아쉽습니다. 시와 관련된 무수한 정의와 이론들은 시를 쓰기 위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에 얽매인다면 자신만의 시를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지만 강을 건너고 난 뒤에 배를 걸머지고 갈 수는 없는 이치처럼 여러 시론들은 시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리문예대학에서 만난 여러분 중에는 이미 시인으로서 활동하는 분들도 있고 이제 막 시에 관심을 가지신 분들도 계신 까닭에 공개된 지면에서 소중한 작품들을 언급하는 것은 시의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기에 염두에 두어야 할 시와 관련된 짤막한 이야기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시의 골격에 해당되는 주제에 관련된 것이고 두 번째는 글의 도구인 언어의 쓰임새에 대한 것입니다.

 

1. 회사후소의 의미를 생각하자.

 

회사후소繪事後素는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신주와 고주의 해석이 분분함은 익히 아는 바인데. 문질빈빈文質彬彬 (바탕이 순연하고 예의를 갖춤), 질승문質勝文(바탕이 순연한데, 예의를 갖추지 못함), 문승질文勝質(겉으로 예의는 차리는데 바탕이 순연하지 못함), 문질공박文質共薄(예의도 못차리고 바탕도 순연하지 못함)의 논의는 시(?)를 쓰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는 입장에서 시인 모두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고봉을 노래하지만 그렇지 못한 불행한 경우도 쉽게 목도할 수 있는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회사후소는 인간의 본질과 겉(예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면 그것이 참된 인간이 아니라는 뜻에서 사람이 ‘아름다운 자질이 있은 뒤에야 문식文飾을 가할 수 있음과 같은 것이다’ 라는 해석이 가능하고, ‘그림을 그릴 때 흰 물감이 제일 뒤에 온다’는 해석은 그림을 그리는 데 먼저 색색의 물감으로 모든 형체를 구현하고 제일 나중에 흰 물감으로 그 형체를 명료하게 드러내어 광채나게 하는 것, 즉 인간의 예禮라는 것은 온갖 갖가지 삶의 경험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최종적으로 그 인격의 완성을 마감한다는 뜻으로도 새겨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회사후소가 예술론의 입장으로 반영된다면 작가나 화가의 순연한 예술혼이 그대로 작문기법이나 회화기법으로 투영되어 드러나는 것이 가장 좋은데, 만약 둘 중 선후 가치를 잡아야 한다면, 기법 위주 작품보다는 순연한 예술혼이 우선 먼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작품과 그 작품을 쓴 시인의 인격을 동질화하는 것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리 만족할만한 해석이 되지 못합니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흠모한 까닭에 만고에 빛나는 교향곡을 작곡했다고 해서 그를 매국노라고 몰아세우지 않으며, 고갱이 저 남태평양의 섬에서 젊은 처녀들과 문란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문명을 벗어난 원시의 생명감을 그린 그의 작품을 블랙리스트에 올리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소 素 는 시를 쓰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이나 인생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합니다. 창작의 의미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입니다. 상식에서 벗어난 독특한 세계관을 지닐 때 독창성과 개성을 지닌 작품의 골격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렌즈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적응방식이 어떠한가를 점검하고 반성하고 탐색하는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무릇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으니, 책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어 이치와는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고 이치를 많이 궁구하지 않으면 지극한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으니, 이른바 이치의 길에 빠지지 않고 말의 통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윗길이 된다. 시라는 것은 성정性情을 읊조리는 것이다. 성당 盛唐의 여러 시인들은 오직 흥취興趣에 주안을 두어, 영양이 뿔을 거는 것 같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 묘한 곳은 투철하고 영롱하여 꼬집어 말할 수 없으니, 마치 공중의 소리와 형상 속의 빛깔, 물 속의 달,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어도 뜻은 다함이 없다.

 

언유진이의무궁 言有盡而意無窮 !

 

2. 언어의 쓰임새에 대해 생각하자

 

이미 시를 접한 분이라면 시의 요의가 생략과 압축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즉, 생략이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는 일이오, 압축이 문장의 줄임이 아니라 표현을 줄이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실제의 시 창작에서 생략과 압축에 성공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사전적 정의가 내려진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어머니의 사전적 정의는 ‘자식을 낳은 모든 여자’입니다. 그러나 개개인의 어머니는 각각 다른 개성과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시 말하면 ‘어머니’라는 단어는 동시에 희생, 봉사, 인내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상식적으로 그리움의 대상으로 덧씌워집니다. 이럴 때 시는 상식적인 진술에 함몰되고 단순한 의사전달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시의 언어나 문장은 진술이 아니라 표현입니다. 표현은 사전적 정의의 단어들을 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정서를 다른 단어들과의 결합 또는 문장을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기쁘다’라고 말하면 듣는 이는 곧바로 기쁜 이유에 대해 반문합니다. 이것이 진술입니다. 표현은 이 ‘기쁘다’라는 느낌을 다르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즉 다르게 이야기함으로서 ‘기쁘다’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것이지요. 「언어에 대한 성찰」이라는 글에서 필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언어에 대한 자각은 몇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로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회화에 사용되는 언어들과 문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들이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근거 없이 문학 작품에 일상적인 언어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작품의 현실성과 극적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사투리나 비속어, 유행어가 한정적으로 차용될 수 있지만 그런 자각의 의도가 없이 무차별하게 사용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둘 째로 비유의 참신성을 위한 노력이다. 많은 부분에서 직유는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고 은유의 기법도 환유의 기법에 그 영역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쉽지 않은 작품들은 복잡한 은유의 중복적 구조와 언어의 유추가 확대되고 깊어졌다는 데에 그 어려움이 있다. 일부러 독자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전문적인 평론가들을 향해서 글을 쓰는 작가는 없다. 작가들은 쉽게 왔다가 쉽게 바람처럼 떠나는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세계에 다가오는 깊은 사유를 지닌 독자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좋은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갖자는 것입니다.

 

좋은 시를 써보겠다는 마음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 하는 활력소라고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하면 일상생활 속에서 보편화된 존재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이 우주에 오직 하나뿐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 지속적인 자기 성찰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인 까닭에 부단히 글을 쓰는 활동을 이뤄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조해서 드린 말씀 중에 독자에게 동감 同感을 구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 共感하f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구절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옥고를 내 주신 작품의 감상은 개별적으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8월

나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