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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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2. 26. 22:42

똑똑똑

백수린

똑똑똑.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그것은 갓길에 버려진 폐차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가동 멈춘 공장의 배수관 틈새로 폐유가 방울져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남자2는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보았다. 수도꼭지는 분명 잘 잠겨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수도꼭지 손잡이를 비틀어 꽉 잠갔다. 물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잘못 들었나? 남자2는 다시 방으로 들어와 모니터 앞에 앉았다. 중단시켜두었던 컴퓨터 게임을 재생했다. 가까스로 적의 공격을 피했다고 안도하는 순간 또다시 물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괜히 민감해서 그러는 걸 거야, 남자2는 생각했다. 집중하자, 집중. 공부할 때와 달리 게임할 때면 유난히 집중력이 향상되는 그였다. 그렇지만 물 떨어지는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이 정도면 환청일 리가 없었다. 남자2는 다시 방 밖으로 나가 보았다. 화장실 수도관 파이프까지 샅샅이 살폈다. 화장실에는 어떠한 조짐도 없었다. 소리는 점점 더 집요하게 계속 되었다. 소리를 따라 부엌까지 가보았으나 싱크대의 수도꼭지 역시 잘 잠겨 있었다. 환청이었단 말이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물방울 하나가 남자2의 코 위로 뚝,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았다. 환청이 아니었다. 미세한 물방울들이 부엌 천장을 따라서 똑, 똑, 똑 떨어지고 있었다.

똑, 똑, 똑 떨어지던 물방울은 순식간에 물줄기로 변해 부엌의 벽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남자2는 이게 무슨 일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창 밖을 보았으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게다가 여기는 15층짜리 아파트의 8층이었다. 비가 온다 하더라도 빗물이 샐 리는 결코 없었다. 그렇지만 부엌의 천장은 마치 비가 새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부엌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남자2는 상황 파악을 포기한 채 대야를 찾아와 물이 떨어지는 지점에 놓아두었다. 그러나 물이 떨어지는 부위는 점점 더 늘어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남자2는 인터폰 수화기를 들고 경비원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천장에서 물이 새요!

관리사무소 직원이 다녀간 뒤 얼마 안 있어 여자1이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여자1의 얼굴은 약간의 짜증과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라니?

물은 이미 부엌 바닥 여기저기에 고여 있었다. 남자2는 식탁 의자 위에 난감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윗집 수도 파이프가 터진 것 같다는데 사람이 없대.

남자2는 관리사무소 직원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물은 점점 더 많이 쏟아졌다. 온수 파이프가 터진 것인지 부엌은 이내 미지근한 습기로 가득 차올랐다. 여자1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부엌의 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빗자루로 물을 쓸기 시작했다.

─연락은 다 돌렸니?

물론 남자2는 남자1과 여자2에게도 연락을 했다. 그렇지만 남자1의 휴대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여자2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자2는 말없이 여자1을 따라다니며 걸레질을 했다. 그러나 똑, 똑, 똑. 물방울은 닦은 자리 위로 다시 떨어졌다.

남자 1,2와 여자 1,2가 이 집에 살기 시작한 지는 벌써 십수 년이 훌쩍 넘어섰다. 그렇게 오래 사는 동안 이런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집이 낡아서 때때로 화장실의 배수구가 막히거나 방충망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물난리라니. 이곳은 여자1과 남자1이 이 도시에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었다. 십수 년 전, 여자1과 남자1은 도시의 변두리에 방 세 칸짜리 집을 마련했다. 그 때, 그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다. 삶의 곳곳에 불행이 숨어 있더라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젊었던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불행이 지극히 추상적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나지 않고 풍요로운 삶에 대한 기대. 홈 홈 스윗 스윗 홈. 남자1은 이삿짐을 풀던 날, 노래를 불렀다.

물줄기는 멈출 듯,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바닥의 물을 다용도실 쪽으로 쓸어내리던 남자2가 여자1을 흘깃 쳐다보았다.

─도대체 다들 어디 있다니?

허리를 펴고 물이 쏟아지는 천장을 올려다보던 여자1이 탄식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남자2는 다시 한 번 남자1의 휴대전화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전원만 켠다면, 그래서 녹음된 메시지를 듣기만 한다면 남자1은 헐레벌떡 집으로 달려올 것이다. 여자1도 남자2도 그 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남자1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부재했다. 이렇듯 어이없게 8층 아파트의 천장에서 물줄기가 퍼부을 때, 혹은 집 담보 대출금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가 빗발쳤을 때.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관리사무소 직원이었다. 아무리 연락을 취해도 윗집 사람들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집은 어떻게 해요?

여자1이 지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직원은 신발을 신은 채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미 흥건히 젖어 있는 부엌을 딱하다는 듯 바라만 보았다. 일단 퓨즈를 내려야 해요. 이러다가 누전이 되면 더 큰 일이야. 그는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신발장 안에 숨겨져 있는 차단기를 내렸다. 냉장고의 기계음이 순식간에 멎었다.

─비상계단이라도 타고 윗집에 가봐야겠어.

직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장비를 가지러 나갔다.

─냉동실에 있는 음식은 다 녹게 생겼네.

여자1이 속상한 듯 천장을 노려보았다. 여자1은 아주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노려보았다. 사실 그것은 여자1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실제로 여자1은 그렇게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노려본 후에 아무 말도 없이 어려운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남자1의 실직 이후 집의 명의를 여자1의 것으로 옮기고 병원의 진료 시간을 연장해서 가계를 책임져 나가는 식으로.

관리사무소 직원 몇 명이 커다란 장비통을 가지고 집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다용도실과 인접한 베란다의 벽면을 부수자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비상계단의 몸체가 드러났다. 직원 중 한 명의 몸이 계단을 따라서 위쪽으로 사라졌다. 물은 점점 더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거실 쪽까지 물이 퍼져나갔다.

─젖으면 안 되는 물건들부터 일단 치워.

물이 불어나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여자1이 말했다. 여자1과 남자2는 거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쿠션이며 책 따위의 젖을 수 있는 물건들을 모두 옷장 속에 챙겨 넣었다.

남자1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관리사무소 직원 중 하나가 9층의 비상문을 열고 윗집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관리사무소 직원이 물난리가 난 9층의 상태를 보고 경악했을 때, 남자1은 남자2의 음성 메시지를 듣고 경악하고 있었다.

─물난리가 났다니 무슨 말이냐?

남자2가 전화를 받자마자 남자1은 귀청이 떨어질 만큼 크게 소리를 질렀다. 허무맹랑한 만화영화의 한 장면에서처럼, 돼지나 개 따위와 함께 떠내려가는 허공의 집이 남자1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남자2는 남자1에게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여자1조차도 그 질문은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온대. 병원에나 가.

남자2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여자1은 흠뻑 젖은 걸레를 묵묵히 짜고 또 짰다.

─병원 문 닫고 들어왔어.

한참 만에 여자1이 대답했다. 남자2는 여자1이 환자들에게 죄송하다고, 집안 사정이 있다고 말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여자1은 애초 앞치마보다 의사 가운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여자1이 병원 일에 더욱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남자1이 일을 그만 둔 직후부터였다. 남자2는 여자1을 훔쳐보았다. 물 때문인지 땀 때문인지 여자1의 옷이 젖어 있었다. 9층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물이 계속 떨어질 것 같았다. 여자1에게 그냥 방에 들어가 쉬라고나 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남자2는 이내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말없이 빗자루를 들었다. 빗자루가 지나가는 방향대로 물길이 흩어졌다.

집에 오자마자 남자1도 집의 꼴을 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남자1은 바짓단을 걷어 부치고 물살을 가르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뭐부터 할까?

남자2는 남자1에게 빗자루를 건넸다.

─미안해,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전화기를 꺼 놔서.

여자1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줄기가 점점 잦아들었다. 위층 파이프 교체가 끝났나 보네, 남자2가 천장을 올려 보며 말했다. 여자1과 남자1도 남자2를 따라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거실 바닥은 온통 물에 잠겨 있었다. 남자2는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살을 가로지르며 걸어가 양동이 속의 물을 비워냈다. 물에 젖을까봐 플러그를 뽑은 채 급한 대로 비닐을 씌워 둔 전선과 전자기기들로 인해 집안은 더 어수선했다.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온 관리사무소 직원 역시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윗집도 아주 난리예요, 직원이 말했다.

─파이프는 다 고친 건가요?

여자1이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다 빼내도 내일까지 퓨즈는 올리지 마세요. 직원은 뚫었던 벽을 다시 막고 총총히 사라졌다.

─물이 더 이상 안 떨어진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그치만 해가 지기 전에 다 정리해야해. 불이 끊어졌잖아.

벌써 다섯 시였다. 해가 점점 짧아지고 있으니 곧 땅거미가 내려앉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모두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세 사람은 서둘러 물을 퍼 날랐다. 물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이 동네로 이사를 한 이후 한 번도 집을 옮기지 않았다. 그 사이 지하철이 들어오고, 명문 사립고등학교가 이사 오고, 학원들이 밀집하기 시작했다. 집값은 날이 갈수록 올랐다. 여자1이 동네에 작은 피부과를 개업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 때는 피부과가 요즘처럼 돈을 많이 벌던 시기가 아니었다. 상가 안에 아주 조그만 피부과를 개업했을 때, 남자1은 관엽식물이 담긴 커다란 화분을 선물이라고 보내왔다. 뭘 이런 걸 다. 여자1의 말에 남자1은 쑥스러운 듯 딴청을 피웠다. 공기 정화에 좋대. 동남아 등지가 원산지라는 그 식물의 이름은 행복나무였다. 그 나무가 아직 살아있던가?

그 때, 남자2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여자2였다. 일 끝내는 대로 최대한 빨리 들어 갈게. 여자2가 빠르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맨날 지만 바빠, 누군 할 일이 없냐!

남자2가 폴더를 닫으며 허공에 소리를 쳤다.

─바로 안 들어온대? 셋이서는 오래 걸릴 텐데.

남자2의 말에 남자1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찬장에 고여있는 물을 닦던 여자1이 어이없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맨날 놀면서 이제 들어온 사람은 누군데.

그 말은 혼잣말 치고는 너무 컸다. 그래서 남자1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자1은 닦고 있던 걸레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아니, 솔직히 내가 제일 먼저 뛰어와야 하는 게 말이 돼? 이 집에서 돈을 누가 버는데. 내 환자들 다 떠나면 밥은 누구 돈으로 먹을 거야?

걸레가 물 속으로 떨어지면서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다.

─연락을 못 받았잖아!

─그러니까 전화기는 왜 꺼 놔, 할 일도 없이.

여자1의 목소리가 더 높아졌다. 남자2는 한숨을 쉬었다.

─그만 좀 해. 할 일이 태산인데.

남자1은 다시 양동이로 물을 퍼나르기 시작했다.

─너는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어?

여자1이 물 속에 처박힌 걸레를 다시 건져내며 말했다. 남자2는 입을 꾹 다물고 눈길을 피했다. 물줄기가 잦아들고 치우는 사람도 이제 세 명이나 되니까 바닥의 물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남자2는 물을 쓸면서 천천히 방 쪽으로 가보았다. 다행히 물이 번지지 않아서 방은 부엌과 전혀 다른 세계인 듯 평화로워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남자2는 옷장에서 점퍼를 꺼내 컴퓨터의 본체를 덮어두었다. 책장의 각종 문제집과 참고서들도 아직은 물에 젖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2는 오답노트와 요약노트를 책상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에 번지면 끝장이야. 그렇지만 물에 번지는 게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내심 들기도 했다. 벌써 몇 번째 낙방인지 몰랐다. 여자2가 연이은 낙방 끝에 시험을 포기한 이후, 바톤 터치하듯 이어받은 의학전문대학원 입시 시험 준비였다. 원래부터 없었던 공부에 대한 의욕은 갈수록 떨어졌다. 올해는 학원에 간 날보다 안 간 날이 더 많을 정도였다. 보나마나 또 낙방. 의사가 되면 폼도 나고 좋겠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여자1의 기대는 그악스러울 만큼 커져갔다.

남자2가 의사가 되기를 학수고대하는 사람은 여자1만이 아니었다. 여자1의 아버지는 여자2와 남자2가 의대 시험에 낙방하자 그 모든 책임이 남자1의 유전자에 있다는 듯 남자1을 비난했다. 그는 결혼하기 전부터 남자1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결혼할 무렵 남자1은 유명 외국계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빈농의 자식이었던 남자1은 그것만으로도 집안의 자랑거리였지만 여자1의 아버지 눈에는 변변치 않은 놈일 뿐이었다. 친일 행적으로 한 때 재산을 많이 모았던 그는 전쟁을 겪으며 재산보다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는 이치를 터득했다. 여자1의 아버지는 의사 딸과 의사 사위를 원했다. 미안해요. 결혼 승낙을 받으려던 남자1이 재떨이에 맞고 쫓겨나던 날, 여자1은 남자1 앞에서 눈물을 찍어내었다. 괜찮아. 평온한 바다는 결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는 법이니까. 남자1은, 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인생을 지배한다거나 진정한 성공은 성공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따위의, 때에 맞지 않는 명언들을 남발하곤 했다. 여자1은 남자1이 외우고 있는 명언들이 남자1의 자신감과 세련됨을 드러내는 하나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쉽게 믿어버렸다. 안전한 선택을 최선이라 믿어온 여자1은 남자1과의 결혼을 쟁취하는 일이, 자기의 무미건조했던 청춘을 의미 있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착각했다. 당시 제약회사 사원들은 약국의 “셔터맨”이 되는 로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1의 직장 동료들은 그의 결혼 소식에 조금씩 배아파 했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1은 이제 병원의 “셔터맨”이 되었으니 그 때 그 동료들은 선견지명을 가졌던 것이 틀림없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전등을 켤 수 없어 집 안은 어느새 캄캄해졌다. 빛이 사라지는 속도만큼 빨리 불안이 증폭되었다. 조금 더 있으면 해가 아주 사라져버릴 것이었다.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할 무렵 여자2가 출발한다며 전화를 했다. 여자1은 다급하게 외쳤다. 양초나 손전등 좀 잔뜩 사오라고 해. 남자1은 거실의 물을 하수구가 있는 베란다 쪽으로 몰고 있었다. 미처 치우지 못했던 물건들이 물 위로 둥둥 떠다녔다. 누군가가 벗어 던진 양말 뭉치나 어디서 쏟아졌는지 모를 면봉 따위의 것들이. 그 중에는 색색의 천으로 만들어진 오리 인형들도 있었다. 물 위에 널브러져 떠다니는 오리들은 더러운 물에 젖어 볼품없이 초라했다. 남자1이 물을 모는 방향에 따라 수십 마리의 오리들은 뒤뚱거리며 흘러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 오리들을 건져 올리려 하지 않았다.

수십 마리의 오리들을 집에 가져온 사람은 남자1이었다. 남자1이 회사를 그만 둔 이후에도 여자1은 식구들의 삶을 예전처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여자1이 개업 병원의 의사였으므로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가정처럼 집을 팔거나 사교육비를 줄일 필요는 없었다. 식구들은 남자1의 실직 그 자체보다 남자1이 실직했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질까 봐 더 두려웠다. 남자1은 한동안 적절한 시간에 집을 나섰다가 적절한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왔다. 여자1은 할인 기간을 이용할지언정 언제나 백화점에서 가족의 옷을 샀고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남자1의 실직을 한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무엇보다 여자1이 가장 곤란했던 점은 부부동반 고등학교 동창 모임 같은 데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여자1이 졸업한 명문 여고 출신들은 하나같이 본인들이 사회의 요직에 진출했거나 아니면 그런 남편을 둔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은 성공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는 일을 속물적이라고 여겼다. 성공이란 기대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을 때 주어지는 부수적인 보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들은 실패한 자에게 자비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들이 몰인정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들은 인맥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건강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여자1은 동창회에 나갈 때면 그녀가 알고 있는 가장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여자1은 남자1이 사진이나 음악 따위의 예술 분야에 취미를 갖기를 바랐다.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직장을 때려치운 예술가 남편. 그것이 실직한 남편보다는 모양새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남자1은 예술적인 것에 소질도 관심도 없었다. 남자1은 몇 번 재취직을 시도했으나 그에게 허락된 일들은 모두 식구들이 살아온 중산층의 삶과 어울리지 않은 것들 뿐이었다. 남자1은 배운 것도 본 것도 너무 많았다. 더구나 남자1의 아내는 의사였다. 그는 잘나가는 여자1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몇 번의 구직 시도 끝에 남자1은 사업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남자1은 자신이 사업을 하기에는 순진하고 충동적이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었다. 몇몇의 사업 구상과 실패 후, 사진을 찍을 줄도 모르고 악기에 대한 관심도 없는 남자1에게 남은 유일한 취미는 인형을 뽑는 것 뿐이었다.

남자1은 인형을 뽑았다. 흔히 그런다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거나 여자1에게 손찌검을 하는 대신 문구점 앞에 놓여 있는 뽑기 기계에서 인형을 뽑았다. 남자1에게 그런 집념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맹렬하게, 남자1은 오리 인형 뽑는 일에 몰두했다.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정교하게 각도를 조절해서 오리를 집는 그 순간. 남자1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순간이었다. 숨을 참고 양미간을 찌푸린 채 인형에 집중하는 남자1의 옆모습을 식구들은 좀처럼 상상할 수 없었다. 하루에 한두 개씩의 인형을 집어오던 남자1이 다섯 개, 열 개씩 오리 인형을 집으로 가져 오기 시작했을 때. 여자1과 남자1이 가장 많이 싸웠던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남자1이 언제부터 오리 인형들을 그만 뽑아오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뒤집어져서 배가 허옇게 드러난 오리들.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어디에 있었던 걸까. 남자2는 물살을 가로질러 가서 오리를 건져낼까 하다가 관둔다. 철컹, 문 여는 소리. 진짜 장난 아니구나, 하는 여자2의 목소리. 세 명의 식구들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쏟아지는, 아파트 복도의 환한 불빛 때문에 눈이 시렸다.

여자1이 시킨 대로 손전등을 사서 귀가한 여자2는 어둠과 물에 잠겨 있는 집안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거 엄청 많이 치운 거야, 넌 힘든 거 다 지나고 온 거 알지? 그런 여자2에게 남자2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바빠서 그런 건데 그럼 어떻게 해?

팩 쏘는 듯한 여자2의 반응에 남자2는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했다.

─니가 바쁘냐? 내가 더 바쁘지?

─조용히들 해, 니네가 나보다 더 바쁘냐?

여자1의 말에 여자2와 남자2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 없던 남자1이 갑자기 들고 있던 비를 바닥에 던졌다.

─알았다고. 할 일 없이 노는 놈이 먼저 튀어 오지 못해서 죽을 죄 졌다고. 됐냐?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자1의 큰 목소리였다. 남자1의 머릿속으로 잘나가는 아내로 인해 주눅 들었던 날들의 설움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남편 기를 세워줄 줄 아는 참한 아내들도 얼마나 많던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똑. 멈춘 줄 알았던 물방울이 침묵 사이로 다시 떨어졌다. 물방울이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동심원이 느리게 퍼져 나갔다. 여자2는 의자를 가져다 놓고 올라가 냉장고 위에 쌓인 물을 닦아냈다. 남자2는 찬장 속의 그릇들을 꺼냈다. 윗집 낡은 바닥을 타고 흘러내린 황토색 물이 그릇마다 가득 담겨 찰랑거렸다. 남자2가 그릇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그 안에 담겨 있던 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내렸다. 에이 씨. 녹물인 듯, 쇠냄새 나는 물이 티셔츠 위로 쏟아졌다. 여자1은 남자2가 꺼낸 그릇들을 싱크대에 쌓았다. 설거지는 남자1의 몫이었다. 똑. 물방울이 남자1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는 건가? 남자1이 수심에 찬 얼굴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순간, 위태롭게 쌓여있던 그릇 탑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당신이란 사람은.

깨진 그릇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여자1이 중얼거렸다. 서둘러 치운다고 치웠지만 어둠은 그보다 더 빨리 내려앉았다. 미처 건져내지 못한 사기 조각들이 어둠 속을 유영하다가 맨살에 닿았다.

─쌓은 건 당신이잖아.

남자1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또 시작이야. 여자2와 남자2는 짜증이 치밀었다. 남자2는 숨을 죽였다. 이럴 때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근데 우리 넷이 함께 있는 거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

분위기를 전환시켜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여자2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우리 옛날엔 여행도 많이 다녔잖아.

외국계 회사에 다니던 남자1은 다른 집 가장들보다 휴가가 많았다. 남자1은 흰색 엑셀에 모두를 싣고 여기 저기 다니기를 좋아했다.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만 리를 여행하는 것이 더 유익한 법이지. 남자1은 매 여름, 자동차에 시동을 걸 때마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여행 관련 명언을 읊었다. 공주박물관과 경포대를, 대전엑스포와 스키장을 배경으로 그들은 수많은 사진들을 찍었다. 박제되어 있는 단란한 4인 가족. 여행을 다녀오면 그들은 남자1의 지휘 아래 사진들을 앨범에 정리해두었다. 그럴 때의 남자1은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사람처럼 자못 경건한 얼굴이었다. 칠남 이녀 중 맏이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한 남자1. 그는 사진에 담겨 있는 4인 가족의 모습을 볼 때마다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남자1이 입사 시험을 준비하며 시청했던 AFKN 외화의 가족 형태를 닮아 있었다. 궁핍으로부터 벗어나 보다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 남자1은 그가 꿈꾸는 찬란한 미래의 증거를 3x5 사이즈로 네모 반듯하게 재단해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옛 생각에 기분이 조금 풀린 남자1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너네는 어디가 제일 좋았냐?

여자2와 남자2가 망설이지 않고 외쳤다.

─미국!

그러니까 여자2가 초등학교 4학년이고 남자2가 아직 꼬마였을 때, 그들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남자1의 고공 승진을 자축하는 여행이었다. 그 때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하물며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본사로 출장이 잦았던 남자1이 사오는 지우개 달린 노란 연필이나 포니가 그려진 도시락통 따위가 선망의 대상이던 그런 시대였다. 식구들에게 미국을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남자1의 숙원 사업 중 하나였다. 안전벨트를 맨 채 이륙을 기다리는 그 짧은 사이 남자1은 말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니까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은 책을 한 페이지만 읽는 거나 다름없는 셈이지. 그러나 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가족 중 누구도 그 말을 분명히 들은 사람은 없었다.

─미국 중에서 어디?

흐뭇하게 과거를 회상하던 남자1이 물었다.

─디즈니랜드!

─고래 본 거!

─우리가 언제 디즈니랜드에 갔냐.

─고래야 말로 못 봤거든? 비가 와서.

─무슨 소리야, 그 날 햇빛이 얼마나 쨍쨍했는데.

남자2와 여자2는 과거의 찬란했던 기억을 떠올리는데 너무 도취된 나머지 그들의 기억이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여자1과 남자1의 기분도 점차 누그러졌다. 고작 사십대 초반이었던 그들은 분수 쇼로 유명한, 라스베가스의 호텔 앞에서 계면쩍어 하며 서양인들처럼 입을 맞췄다. 분수 쇼가 자아내는 낭만적 정취와, 식구들과 해외여행을 올 수 있을 정도로 안락한 삶을 이뤘다는 자족감이 가능하게 한 입맞춤이었다.

─그렇지! 여행 가방!

말없이 정리에만 몰두하던 여자1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방치해두었던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를 어디선가 꺼내왔다.

─엄마 집에라도 맡기고 와야겠어.

─거기까지 가려고?

남자1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

여자1은 이미 녹기 시작한 고기와 생선, 냉동 만두와 냉동 피자 따위의 음식들을 트렁크에 담았다. 불 꺼진 냉장고의 선반 위에는 먹다 남긴 아이스크림 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미 녹아버려 그저 짙푸르고 누르튀튀한 액체가 되어 버렸을 아이스크림. 기묘한 무늬를 그리며 끈끈하게 녹아내리고 있을 아이스크림을 더 이상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여자1이 트렁크에 물건들을 다 채워 넣을 무렵, 해가 거의 져버려 그릇들을 어디로 옮겨야할 지 더 이상 분간할 수가 없었다. 여자2가 현관 앞에 놓아두고 온 손전등을 찾으러 갔다. 걸을 때마다 의자나 문틀에 부딪치는지 허공에는 툭, 하는 둔탁한 소리와 아, 하는 여자2의 새된 비명 소리가 교차하듯 울렸다. 손전등을 켜자 빛이 생겼다. 많이 치운다고 치웠지만 아직 바닥은 젖어 있었다.

─오늘 밤에 여기서 자는 건 무리야.

남자1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그거 처갓집에 갖다 놓을 거면 같이 나가서 찜질방에라도 가자고.

여자1은 모처럼 남자1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어수선한 집을 두고 나간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여자2는 나가기 전에 대야 속의 물을 하수구에 마지막으로 흘려보냈다. 남자2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그 틈을 타 허리 운동을 했다. 천장의 벽지는 물에 젖어 이미 울고 있었다. 물이 닿았던 목재 바닥 역시 조금씩 썩어갈 것이었다.

─그럼 이제 갈까?

여자1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1이 트렁크 손잡이를 받아 쥐었다. 트렁크의 낡은 바퀴가 거실 바닥에 부딪쳐 덜덜덜, 소리를 냈다. 남자1이 나가려고 문고리를 철컹, 하고 돌리는 순간 그 뒤를 따라 나서던 여자1이 거실에 놓인 식탁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안 되겠어, 조금만 쉬었다가 가.

남자1은 트렁크를 현관에 놓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남자1도 여자1의 대각선 즈음에 놓인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여자1과 남자1을 뒤쫓던 여자2도 식탁 의자를 하나 끌고 와서 여자1과 남자1 사이에 앉았다. 하는 수 없이 남자2도 의자를 들고 그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거실은 섬뜩할 정도로 컴컴했다. 여자2가 밝혀 놓은 손전등의 불빛만이 이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마지막 징표처럼 어둠을 균열시켰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 왔다. 몇 시간동안 서서 물을 퍼다 나르고 그릇들을 옮기는 일은 적지 않은 육체노동이었다. 거실의 동서남북에 제각기 떨어져 앉은 네 명은 흡사 망망대해에 떠 있는 네 개의 외로운 섬처럼 보였다.

─피해 보상은 받을 수 있겠지?

그들은 물에 젖어 망가졌을지도 모르는 전자레인지와 텔레비전 그리고 깨진 그릇들을 일제히 떠올렸다.

─당연히 받아내야지.

─우리 이사 가면 안 될까?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아.

여자2는 천장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취직도 못한 게 이사타령이냐는 말이 나올까봐 여자2는 말을 뱉어놓고 이내 후회했다. 취업 실패 이후 등 떠밀리 듯 대학원에 입학한 지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의전 입시 실패 이후 취직 준비를 했지만 여자2는 어디에도 채용되지 못했다. 어쩌면 남자2의 말처럼 여자2가 너무 뚱뚱한 탓인지도 몰랐다. 어떻게 취직도 못하냐며 한심스럽게 바라보던 여자1의 눈빛을 여자2는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자1에게 대들어보고 싶었지만 여자2는 한 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입학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올지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사를 어떻게 가냐. 재개발이 될지도 모르는데.

사실 여자2가 이사를 가자고 말은 꺼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심지어 여자2조차도 진심으로 이사를 갈 생각은 없었다. 몇 번 이사를 생각해본 적은 있었지만 계획은 번번이 유보되었다. 처음엔 남자1이 집 담보 대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겨우 대출금을 다 갚고 나자 몇 년째 추진 중이던 아파트 재개발 계획의 윤곽이 드러났다. 종부세 반대, 재개발 추진 성명 운동 등 그들은 아파트 주민들이 추진하는 모든 일에 앞장섰다. 좋은데 시집가기 위해서, 혹시라도 붙을지 모르는 의전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기 위해서는 아직 이 주소지의 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위기만 넘기면……. 그들에게 집이란 가족이 중산층의 삶에서 낙오하고 있지 않음을 증명해주는 마지막 자존심을 의미했다. 네 사람은 저마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불빛을 받아 괴기스럽게 일그러진 서로의 얼굴만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번뜩였다.

열대우림에 와 있는 것 같구나, 여자1이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말했다. 더운 습기 탓에 집 안은 정말 열대의 숲처럼 후텁지근했다. 무릎까지 걷어 올린 모두의 바짓단은 물에 젖어 이미 색이 더 짙어져 있었다.

─모처럼 넷이 있으니까 말인데…….

남자1의 말에 무방비 상태의 그들 사이로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것은 남자1이 명예퇴직 당했음을 식구들에게 알릴 때, 혹은 새로운 사업 구상에 대해 공표할 때의 서두였다.

─최, 알지? 최가 자기네 라이브 까페에 와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 하더라고.

여자2와 남자2는 숨을 죽인 채 여자1의 눈치를 살폈다. 라이브 까페? 그 정도면, 사실은 애들 아빠가 음악을 좋아해 왔었다고 말해도 사람들이 설득되지 않을까? 설마 또 투자를 한다는 건 아니겠지? 여러 가지 계산들이 여자1의 머릿속에서 바삐 이루어졌다. 라이브 까페라고? 또 말아먹는 거 아냐? 여자2와 남자2는 얼굴을 찌푸렸다. 쪽팔리게. 그래도 백수인 것보단 낫겠지.

─한 번 해 봐.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을 끝마친 여자1이 말했다.

─해 보세요. 우리가 응원하는 거 아시죠?

여자2와 남자2 역시 다정한 오누이처럼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1은 가족의 지지에 너무 감격해서 식구들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어쨌거나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여자2가 입을 열었다.

─기억나? 그 때, 우리 미국에 갔을 때.

그들 중 누구도, 붉은색 혼다를 렌트해서 대륙을 횡단하던 날의 기억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그 날의 모습은 각각 달랐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없는 옥수수밭 너머로 해가 몇 번이나 지고 떠올랐다. 끝도 없지? 이것이 아메리카, 아메리칸 드림이야! 남자1은 마치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했다고 착각한 유럽인들처럼 들뜬 가슴으로 지평선을 향해 가속페달을 밟았다. 그들은 디즈니랜드로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엄청난 규모의 맥도날드가 황무지 중간에서 돌연 튀어나왔다. 넷은 맥도날드 옆 주유소에서 렌터카에 기름을 채우고, 치즈버거 세트 두 개와 해피 밀 세트 두 개를 시켰다. 히어 오어 투고? 남자1은 자신만만한 말투로 대답했다. 투고. 그 때, 해피 밀 상자 속에서 나왔던 플라스틱 도널드 덕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똑,

똑,

똑.

쉿, 들어봐. 여자1이 다급한 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모두 동작을 멈췄다. 틀림없이 무슨 소리가 났다. 다시 물이 떨어지는 것일까. 그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모두 귀를 기울였다.

똑, 똑, 똑.

똑, 똑, 똑.

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누가 왔나봐, 여자2가 말했다. 그것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누구지, 이 시간에? 아직 저녁 식사를 할 법한 시각이었으므로 사실 누군가가 집을 방문하기에 그리 늦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미 해가 졌고 온 집은 정전으로 어두웠기 때문에 가족 중 누구 하나 아직 이른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쿵, 쿵, 쿵. 문 밖의 사람은 보다 세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왜 문을 두드리는 거지? 식구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전기를 끊어 초인종도 울리지 않으니 외부인이 문을 두드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을 하기에 너무 지쳐 있었다. 갑자기 공포가 엄습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식구들은 모두 숨소리도 내지 않고 문 쪽을 응시했다. 바깥의 누군가가 현관문의 손잡이를 철컥, 철컥 비틀어 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어쩌면 문 밖의 저 사람은 윗집의 파이프 교체 상황을 알려주러 온 관리사무소 직원이거나 낡은 파이프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하러 온 윗집 주인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앉은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뛰었다. 식은땀이 났다. 쾅, 쾅, 쾅. 문 밖의 사람은 집안에 들어오기 위해 문을 부수기라도 하려는 듯이 난폭하게 문을 두드렸다. 이제는 창 밖에도 어둠이 가득했다. 바닥은 아직 물에 젖어 있었다.

또 다시 시작이군. 남자1이 체념하듯 읊조렸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찬란한 조명이 차례로 꺼지던 폐장 무렵의 디즈니랜드가 떠올랐다. 나는 걷고 있지, 메인 스트리트 유 에스 에이. 흥겨운 노랫소리에 맞춰 사라지던 화려한 퍼레이드. 안녕, 안녕. 가면 쓴 무용수들이 연기를 멈추던 순간. 불빛이 사라지면 여기가 폐허처럼 보이더라도 이곳은 꿈의 도시랍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쾅, 쾅, 쾅. 바깥에서 문을 두드릴 때마다 온 집의 유리가 곧 허물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파르르, 진동했다. 창 밖에서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서두르는 차들이 무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도 곧 지나갈 거야, 누군가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그것은 기도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했다. 식구들은 이 순간만 모면하면 이내 평화가 찾아오리란 것을 알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들은 수많은 위기의 순간마다 그래왔듯이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들이 쥔 서로의 손은 차갑고 축축해 마치 시체의 것처럼 섬뜩했다. 그러나 이 순간을 또 견뎌내야 했으므로 그들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붙잡은 그 손을 조금 더 꽉 움켜쥐었다.

백수린 / 1982년 인천 에서 태어났으며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