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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2주기, 추모집 '나는 나를 기억한다' 출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9. 25. 21:34

하늘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From 청년 최인호

입력 : 2015.09.24 03:00

[내일 최인호 2주기, 추모집 '나는 나를 기억한다' 출간]

고인의 遺志 따라 기획… 제목도 생전에 직접 정해
1권은 청년기 문학적 자서전, 2권엔 미발표 작품 첫 공개
"습작원고 뭉치, 내 키만 해"

'나는 나를 기억한다' 책 사진
내일(25일)은 작가 최인호(1945 ~2013)의 2주기. 고인이 하늘나라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청년 최인호 월드'로 초대랄까. 두 권으로 출간된 추모집 '나는 나를 기억한다'(여백 펴냄)이다.

늘 개구쟁이 소년 같던 작가는, 침샘암 투병으로 힘들 때조차 활기찬 어조로 출간 계획을 밝히곤 했다. 그중에는 사후 출간에 대한 단계별 유지(遺志)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해 1주기 무렵 작가의 딸 다혜씨와 손녀 정원이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딸의 딸', 지난 3월 법정 스님의 기일에 맞춘 스님과의 대담집 '꽃잎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 그리고 이번 2주기의 뜻은 '나는 나를…'이었다. 출판사 여백의 김성봉 대표는 "작가 최인호의 청년 시절 문학적 기록과 미공개 습작 노트를 각각 묶은 것"이라면서 "작가의 유지에 따라 사전에 기획된 책"이라고 했다.

제목은 오스트리아의 명 지휘자 카를 뵘(1894~1981)의 자서전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를 읽고 생전에 작가가 정했다.

1권의 부제는 '시간이 품은 나의 기억들'. 고인의 유년과 청년 시절을 기록한 일종의 문학적 자서전이다. 사대문 안 서울 한복판의 덕수초등학교와 서울중고교, 연세대를 나온 '순금의 서울내기' 최인호. 같이 자던 아버지의 젖꼭지를 빨고서 달콤함을 느꼈다는 엉뚱한 소년 최인호의 비밀과, '오입쟁이'들의 단골이었던 여관집 독탕 방 하나를 전세 15만원에 신혼방으로 빌려야했던 청년 최인호의 가난이 이 안에 있다. "내 진실로 지금까지 여인에게 사랑한다는 수식어를 지나치게 남용했다손 치더라도 이제 나는 그것을 삭제하고 오로지 우리 정숙에게만 줄란다"로 시작하는 작가의 프러포즈 편지도 처음 공개됐다.

작가 최인호는 연극·영화까지 가로질렀던 전방위적 작가였다. 자신의 습작 노트에 직접 그린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왼쪽). 직접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맡아 1966년 7월 공연한 연극 ‘메리·크리스마스’의 팸플릿과 초대권.
작가 최인호는 연극·영화까지 가로질렀던 전방위적 작가였다. 자신의 습작 노트에 직접 그린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왼쪽). 직접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맡아 1966년 7월 공연한 연극 ‘메리·크리스마스’의 팸플릿과 초대권. /여백 제공
문학의 전성기였던 시절, 작가의 문학적 무용담도 한자리에 모았다. 공군 복무 중이던 1966년 12월 24일 밤, 눈 내린 연병장에서 벌거벗고 기합을 받다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 예의 여관집 독탕 방에서 배 깔고 누워 고이 잠든 아내 곁에서 하룻밤 만에 출세작 '타인의 방'을 쓸 때의 에너지, '창작과 비평'에서 저항의식을 더 넣어 원고를 수정해달라고 요구하자 거부하고 "앞으로는 절대 이 잡지에 글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의 패기가 특유의 생생한 언어로 묘사되어 있다. 약관 26세의 나이로 '별들의 고향'의 조선일보 연재를 시작할 때, 작가는 이렇게 다짐했다.

"두 개의 원칙. 하나는 소설 읽는 재미를 하루하루의 신문을 통해서 철저히 느끼도록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문장이 새롭고 독특해야 할 것이며 스토리의 전개를 통해서 연재소설의 호흡을 조절할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생명력에 의해서 독자를 사로잡을 것. 나머지 하나는 주인공의 이름이 기억되어 마치 자신의 첫사랑인 양 친근하게 느껴져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럽게 기억되어질 것을 염두에 둘 것."(234쪽)

2권은 미공개 작품 모음집이다. 부제는 '시간이 품은 나의 습작들'. 중학교 1학년 시절 작품도 있는 데다 발표하지 않은 작품인 만큼 당연히 치기(稚氣)도 느껴지지만, 최인호 문학의 세계관과 감수성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중학교 때 쓴 '낙엽에게 전하는 말' '얼굴' '처녀암' '4.19이후', 특유의 악동 이미지와 낭만성의 씨앗을 느끼게 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반항 뒤에 오는 것' '전설이 있는 가을' '그사람', 초기 단편들을 연상시키는 대학 시절의 '꿈에 별을 보다' '메리크리스마스' '젠틀 킴' 등이 수록됐다. 50년 넘게 남편의 육필원고를 보관한 아내 황정숙씨 공이다. 암호에 가까운 것으로 이름난 작가의 악필(惡筆)을 이번 출간을 위해 거의 6개월에 걸쳐 '번역'했다고 한다.

작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노트에 습작했다. 겉표지에는 호기롭게 '최인호 소설집'이라고 적었다. "대학 때까지 습작한 원고 뭉치가 내 키로 하나쯤"이라고 했을 만큼 엄청난 분량이었다. 이번에 공개된 중학교 1학년 때의 습작노트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독자 여러분은 이 글을 읽고 이 소설을 유치하다고 생각지 마시오.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소설책의 겉장을 열지 마시오."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한다. 물리적으로 숨이 멈췄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 사실마저도 잊혔을 때. 작가는 '나는 나를 기억한다'고 했지만, 우리 역시 아직 당신을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