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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人文學에 시詩를 묻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10. 11. 13:37

2014.10.10 소요문학회 특강

인문학人文學에 시詩를 묻다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경희대 교수)

 

 

1.

 

 

이 글의 궁극적인 도달 지점은 시詩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궁구해야할 그 지점은 사실 한 지점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영역이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시를 이야기 하려면 시에 들러붙는 문학이라는 조금 더 넓은 외연外延을 지나가야 하고, 예술이라는 울타리를 통과해야만 한다. 어째든 시는 학學이 될 수는 없지만 그 대신 그 뿌리를 인문학이라는 토양에 의존하고 있음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글은 시에 직접 가닿는 방식을 버리고 인문학이라는 시의 토양을 먼저 검토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고자 한다.

 

 

945년 광복 이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제성장을 이룬 동인 動因으로 남다른 교육열을 꼽을 수 있다. 불과 한 세기 전 만 해도 강상綱常의 윤리가 통용되었던 봉건 사회의 붕괴는 사회 체제의 변화와 더불어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온갖 간난艱難을 헤친 진학의 열망은 개인에게는 부와 명예의 성취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고급인력의 확대는 사회 전반의 발전에 디딤돌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문 學問이 뜻하는 바 지식 확충의 본체가 질문에 있음이 간과되고 오직 지식의 총량으로 지성 知性을 평가되는 근자의 사회적 분위기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의 근인 近因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서양에서의 학문이 자유예술Liberal Arts인 까닭도 단지 학문이 지식의 습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함이다. 그런데 인성의 도야陶冶와 유리된 지식의 도구화는 개인 간의 치열한 무한경쟁으로 내몰고 궁극적으로 진정한 ‘삶의 목표’와 ‘삶의 질’을 왜곡시키는 악순환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는 규격화되고 자아가 상실되는 삶 속으로 빠져드는 위험 상황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지구 상에 살고 있는 70억 인구의 존재는 종족과 국가제도의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몇몇 개의 블록으로 동일화 될 수 없는 개별적, 개성적 존재이다.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성취를 가늠하는 자유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생활화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단순한 지식 -기능과 기술의 습득을 포함한- 의 확충이 가져오는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타인의 삶’을 추종하는 무비판적인 모방의 삶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할 화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금으로부터 이 천 년 전, 로마의 정치 사상가인 시세로 M. Cicero는 Liberal Arts를 'Studia humanitas', 즉 인간학, 또는 인문학으로 정의했다. 인간의 자유를 확장하는 학문, 그렇다면 인문학을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우리의 삶속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 평생을 업으로 삼아도 가 닿지 못할 그 광대한 인문학이라는 우주의 실마리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인문학의 큰 틀은 문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이다. 우리는 문학을 통하여 감성의 정화와 더불어 상상력을 키우고, 철학을 통하여 투철한 비판력을, 역사를 통하여 지나간 사건과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혜안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대중이 그 모든 영역을 체계적으로 접하는 일은 지난한 일이고, 지금은 인문학의 범위가 문사철 文史哲을 넘어서서 인간의 문화활동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 가는 추세에 있기 때문에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는 인문학에의 접근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유형의 결과물로 나타날 수 없는 인문학 학습의 경제적 효용성의 미약함 때문에 그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의 위기에 비례하는 인문학의 필요성의 대두는 필연적이다. 승자 勝者보다 패자 敗者, 가진 자 보다 못 가진 자가 다수인 불평등한 세상에서 이들이 다 같이 존재해야할 이유를 찾아야만 하는 숙제는 인류의 진보와도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탐욕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증식되는 속성을 지녔기에 이에 따르는 폐해를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병에 걸리면 우리는 의사의 치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병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치유하지 않으면 안되는 병이 있다. 자기비하에 비롯되는 패배의식, 고독, 부정적 사고, 죽음에 대한 공포 등등의 이른바 스트레스는 일정 부분 당사자의 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자기치유 즉 힐링 healing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인문학은 이 자기치유(힐링)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대증요법 對症療法은 아니다. 인문학은 새나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곧바로 알려주지 않는다. 인문학은 그 대신 새나 물고기의 습성과 종류를 가르쳐 줄 뿐이다. 수렵자들이 어떤 물고기와 새를 잡을 것인지, 그물을 사용할 지, 총을 사용할 지, 미끼를 던질 것인지 하는 선택의 자유만을 일러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길이 주어질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는 근력을 키워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교양의 허세와 지식의 확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삶의 허접한 장식물에 불과하다. 희노애락 감정의 기복이 심할 때 위로의 수단으로 삼는 음주의 위력은 즉각적이다. 그러나 음주는 일시적인 감각의 마비에 불과하다. 우리가 읽는 수도자들의 명상 가득한 책들은 그들과 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려는 의지와 행동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치유의 큰 반향을 일으키기 어렵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사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학 작품을 통해서는 감정의 정화와 상상력 계발의 단초를 얻을 수 있으며, 철학이 추구하는 모든 현상에 대한 질문과 비판의 논리성을 습득하고 - 비트겐 슈타인은 철학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해소에 있다고 하였다- 역사를 통해서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오늘날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어떻게 재해석 되는가 하는 문제에 천착하게 하므로서 해석력의 증대를 가져온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인문학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학습의 의지를 갖고 있다면 체계적이고 일관적인 계획을 먼저 수립해야 한다. 독서를 통한 인문학의 학습, 강의를 통한 접근, 실제 활동을 통한 인문학의 실천 등 다양한 통로 중에서 자신의 일상과 부합되는 길을 택하는 것이 중요하고 산만한 학습이 아니라 문사철 한 분야에 집중적인 접근을 하는 것도 유효한 선택이 될 수 있다.

 

 

3.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문학은 자기치유의 지름길임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노자도덕경 48장 위학일익爲學日益 위도일손爲道日損 의 구절은 유가와 도가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공자는 사회체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틀’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서는 배움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노자는 공자가 주장하는 그 ‘틀’이야말로 인간과 사회의 평등과 자유를 해치는 요소로 보았다. ‘배움은 하루마다 두터워지고 도는 하루하루 덜어낸다’는 의미는 오늘날 인문학이 지니는 자기치유의 기능, 자유롭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비판적 인간의 전형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식의 두터움은 이것과 저것을 가르고 규격화하는 우를 범한다. 자율에 의한 비판적 삶은 ‘타인의 삶’ 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도道인 것이다.

 

 

너무 앞서가는 면이 있긴 하지만 불후의 명작을 생산한 예술가들은 인문학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기존의 질서와,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찾아가는 모험이야말로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간략하게 한 예를 들어보자, 김훈의 일련의 소설들 「남한산성」, 「칼의 노래」, 「흑산」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그러나 허구의 상상력이 보태진 소설들이다. 과연 청나라에 대한 항쟁이 정의롭고, 현실에 순응하는 화친이 비겁한 것인가? 정말 이순신은 전사한 것인가? 조선 후기의 서학의 탄압은 단순한 종교 탄압인가? 흑산도로 유배당한 정약전의 삶은 그의 아우 정약용에 비해서 과연 비굴하고 보잘 것 없었던 것인가? 하는 소설가의 질문은 일신우일신 日新又日新이 필요한 오늘의 문제이며 오늘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거울이다. 이와 같이 지식(정보)의 획득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이 또 다른 인식의 출발점으로 되돌려지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이 제시하는 화두인 것이다. 인문학은 상식의 파괴, 상식에 안주하는 평범하고 모방적인 삶에서 탈피하라고 권유한다.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자연과학의 법칙성에 함몰되어 귀납되어버린 진리에 무릎을 꿇는 세계에 대한 미의식의 실종이야말로 인문학이 던지는 ‘발견’의 가치를 드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인이며 저명한 카피라이터인 박상훈은 『마음을 움직이는 한 줄의 카피 쓰기』에서 우리 삶에 있어서의 발견의 중요성을 아래와 같이 설파하고 있다.

 

 

저에게 취미와 특기를 묻는다면 ‘두리번거리기’와 ‘기웃거리기’라고 말합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신문을 통한 맥락 읽기, 독서를 통한 시야 넓히기, 시를 통한 새로운 상像 만나기를 계속합니다. 그 과정에 익숙해지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과제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게 됩니다. 즉 ‘발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논어 옹야편에 이르기를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이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이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고 하였다. 천부적인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면 끊임없이 발견의 연습을 하는 것과 그 발견의 연습을 즐기는 것을 몸에 익히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4.

 

 

간략하게나마 인문학적 사유의 내용과 필요성을 이해하였다면 이제 시에 있어서의 인문학적 사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마무리할 순서이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은 필자의 짧은 평문 「시인이 詩人인 이유」 의 발췌로 대신하고자 한다.

 

인은 늘어나는데 시를 읽는 독자가 줄어드는 현상에 난감해하는 것이 오늘의 시단詩壇이다. 더 적확하게 말한다면 시인이 되는 관문이 넓어져 일 년에도 수 백 명의 신인이 등장하고 수 백 개의 잡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들이 범람하는 저 편에서 시를 힐링healing이나 교양의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 대중大衆들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만 할 일은 아니다. 교육 수준의 향상으로 전문적인 수련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열망이 시의 생활화에 가까이 있다는 순기능과 동시에 문학보다는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영화를 비롯한 음악과 같은 대중 예술에 관심을 두는 지식인 층이 두꺼워졌다는 비관적 사실의 혼재 混在가 반드시 문학(시)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문학(시)에 대한 외면이 대중예술의 무한한 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문학교육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고 진단하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지구상의 유일한 존재인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 욕구의 표현은 존재의 집인 언어를 통해 구사될 때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지는 법인데, 우리 학교 교육은 문학 작품의 읽기와 쓰기를 비롯한 자기 표현력 증대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에, 이 점이 학교 교육 현장에서 개선이 된다면 문학의 저변 확대는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교육의 현장에서 많은 기성세대가 시 창작에 관련된 강좌에 관심을 두고, 뒤늦게 등단의 열망을 감추지 않는 현상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단이 당면한 문제가 -문명사적인 측면에서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도구인 언어의 소멸이라는 비관적인 추세에 놓여 있다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러한 비관적 전망으로부터의 탈피 내지는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문자 행위의 중요성은 반등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시인은 끈질긴 기다림의 자세로 대중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만큼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좋은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주장을 펴고 좋은 시의 뼈대에 대해 고민해 왔다.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좋은 시에 대한 정의는 시 창작에 관심을 둔 사람들에게는 난마亂麻와 같은데, 임보 시인의 「시창작론」은 간단명료하게 좋은 시의 기준을 설명해 주고 있어 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 요점을 정리한다면 첫 째 독자에게 이로운 글, 둘 째 재미가 있는 글, 세 째 작품은 아름다운 언어구조물 이어야 한다는 것이 임보 시인의 좋은 시의 기준이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이롭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글 이라는 얼개는 독자들의 개인적 성향과 인식 수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롭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글의 개별적이고 상대적 인식을 포용하기 위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 글 쓰는 이의 치열한 체험인 것이다. 체험이란 무엇인가? 본능에 의존하는 욕망을 의식 없이 분출하는 삶이 아니라 욕구를 통제하고 투철한 자기반성을 통하여 삶을 긍정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나서는 일체의 활동을 체험이라고 한다면 그 체험을 언어를 통해 구현(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시 쓰기의 첫걸음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아도 詩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언言과 사寺의 구조를 통해서 단순히 언어가 머무는 사원이 시詩라고 단정하는 것은 성급함이 있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언지 詩言志의 의미를 궁구한다면 시詩는 언言의 기표記標와 기의記意를 부여잡고(지持), 자신의 체험을 올곧게 드러내는 행위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읽어 보자.

 

 

적멸 寂滅

 

 

                             임송자

 

 

담장이 고욤나무에게 기대었는지

고욤나무가 담장에게 기대었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깊어지기로

단단히맘 먹은 것이다

 

 

바람도 어깨를 낮추고 들어가는 집

빈 집의 뒤뜰에 아주 오래 되었을

캄캄한 고욤나무 한 그루

추억을 달여 먹는 노인 같다. 비스듬히

 

 

번열 煩熱을 제거하고 갈증을 그치게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고욤나무 열매

그 착한 품성이

빈 집을 거느리며 산 것이다

 

 

나는 바람보다 더 낮게 허리를 구부리고

고욤 털던 먼 날의 왁자함을 눌러 밟으며

그 집에 들어 서 보는 것이다

수십 년 묵은 저 고요와

수만 섬이나 되는 저 적막을

어디 가서 만날 수 있으랴

간신히 서 있는 나무는

죽어서도 할 일이 많다는 듯

허공에 팔을 들고 저녁 새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적멸寂滅」 은 새로운 시법을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는 없으나 좋은 시의 요건을 두루 갖춘 시의 전범典範으로 삼을만하다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새로운 시를 쓰려고 노력하기 전에 우리가 통과해야할 과정은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일이다. 고사된 고욤나무를 ‘추억을 달여 먹은 노인 같다’라고 형상화 한다던가 ‘수 십 년 묵은 저 고요와/ 수만 섬이나 되는 저 적막을’과 같은 치밀한 묘사력은 오랜 시간 말을 다듬고 가라앉힌 공력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가 아름다운 묘사에 그친다면 교언영색 巧言令色의 병폐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시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한 질문이다. 레드 클라우드 Red Cloud라는 인디언 추장은 탐욕에 가득 찬 백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나무가 죽고, 마지막 남은 강물도 썩고, 마지막 남아 있던 물고기마저 잡혔을 때 인간은 황금은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돈으로 아무 것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때서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적멸」」 마지막 부분을 다시 살펴보자.

 

 

죽어서도 할 일이 많다는 듯

허공에 팔을 들고 저녁 새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소멸이다. 우리 선조들은 ‘늙어 죽는 것’을 복 福으로 여겼다. 나이가 들면 보약을 먹지 않고 죽을 때가 되면 곡기를 끊고 서서히 적멸의 순간을 기다렸다. 이렇게 의연하고 향기로운 죽음은 죽음에 대한 사색을 넘어 내면화하려는 의지의 발동 없이는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어야 할까? 엄밀히 말해서 인人은 치인 治人, 즉 다스리는 사람, 근본根本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이다. 왜 시인을 시가詩家가 아니고 詩人이라고 부르는 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