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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의 시창작론

상식 常識과 감상 感傷과의 싸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9. 20. 17:21

상식 常識과 감상 感傷과의 싸움

나호열

 

하루에도 몇 편의 시를 읽고, 책 몇 권을 - 다 읽지는 못해도 - 들척거린다. 이런 일이 요즘은 시들하다. 혹자는 이런 나의 푸념에 핀잔을 퍼부을지도 모르겠다. '팔자 좋은 놈이군!'

그러나 나는 여전히 팔자 좋은 놈은 아니다. 방식만 다를 뿐이지 생계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것은 여늬 사람과 다름없으며 자잘한 희노애락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일도 고만고만하니까 말이다.

 

 

어째든 다른 사람의 시를 읽고 내 시(?)를 쓰고 책을 읽는 일이 생계에 직접 부딪치는 일이 될 때 글을 쓰고 읽는 일은 그리 녹녹한 짓거리가 되지 못함은 틀림이 없다. 무감각과 권태는 일의 반복으로부터 빚어지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 아닌가? 일탈과 도피는 예술의 지평에서는 파격과 환상으로 환치되면서 환영받을 만하지만, 건강한 일상인들에게는 커다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창작자와 독자와의 관계에 접근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수행하는 일이 시들한 까닭은 창작자의 역할을 미리 알아버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일상의 파격破格으로, 일상을 벗어난 환상幻想의 영역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

 

 

 

송구하게도 당대當代의 수준 높은 작품의 성찬을 손쉽게 받아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오만해져서 웬만한 작품들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된 일이 적잖은 고민거리로 남게 되었다. 당대의 수준 높은 작품은 과연 무엇일까? 어떤 조건을 갖춰야 수준 높은 작품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사실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문학은 자연과학이 아니다, 문학은 자연과학처럼 측정의 엄밀한 도구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문학에는 비평가가 있다. 문학이론을 공부하고 고도의 미학적 수련을 거친 사람들의 말을 잣대로 받아들인다. 그런 비평가들의 입장 또한 계량화 되지 않았으므로 그 또한 믿을 만하지 않지만,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과의 연합에 의해 그들의 주장을 이데올로기로 만든다.

규격화되고 유행에 민감한 작품들이란 대체로 이데올로기로 둘러싸인 허상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수준 높은 작품이란 민족과 통일을 이야기하는 거대 담론도 아니고 소소한 일상의 잔상을 수놓은 단순한 서정도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으면 싶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 행위의 본령은 앞서 말한 파격과 무한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환상의 날개를 갖는데 있다. 시인이나 작가가 다루는 주제나 대상이 무엇이던 간에 인간의 조건과 존재에 관한 해답 없는 질문이라면 그 질문이 자신에게 던지는 편견과 오만에 대한 야유라면, 고백이라면 어떨까?

 

 

나는 감동을 얻기 위해서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나의 촉수와 지식이 감동을 얻기 위한 자료들을 자동입력 해 놓았다는 것을 안다. 어디서 본 듯한, 어디서 들은 듯한 구도자의 말씀쯤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많은 작품들을 뒤적거리며, 진흙 속에서 진주알을 찾는 기분, 모래 한 알 속에서 우주를 찾겠다고 허튼 짓을 해대는 그런 작품과 조우하기 위해서 나는 글을 읽는다.

 

 

 

 

나는 자나깨나 시에만 매달려 시가 없다면 자신의 인생도 없다는 말하는 사람, 시만이 가장 고귀한 가치라고 주장하는 사람, 시를 쓰는 까닭에 자신을 훌륭한 존재라고 믿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내가 시를 쓴 시인인 까닭에 훌륭하다. 굳이 시를 쓰려고 고심하지 마라.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무엇인가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인간에겐 이보다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일이 많다. 시는 무작정 시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재능이 있어 할 수 없이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쓰는 삶의 일부일 뿐이다.

 

 

 

 

 

 

오세영 교수의 글은 자극적이고 역설적이다. 그러나 위의 글을 곧이 곧대로 읽어서는 그 진의를 헤아리기는 어렵다. 시인으로서의 오세영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시를 쓰는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시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장난삼아 혹은 유희 삼아 시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의 시론을 조금 더 언급해 보자.

 

 

 

시 쓰기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쉬운 것을 쉽게 쓴 시, 둘째, 쉬운 것을 어렵게 쓴 시, 셋째,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쓴 시, 넷째,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쓴 시가 그것이다. 첫째는 산문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 아직 유치한 단계이다. 둘째는 능력 부족이거나 남을 속이려는 시인의 작품이다. 셋째는 자기도 모르는 것을 쓴 것이니 의욕은 과하나 머리가 아둔한 경우이다. 넷째, 시에 대해 나름으로 달관의 경지에 든 시인의 작품이다. 이 네 가지 유형에 우열의 순서를 매긴다면 우수한 것부터 ①넷째, ②첫째, ③둘째, ④셋째가 될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시야말로 시의 상지에 속한다.

 

 

 

 

 

훌륭한 요리사는 재료를 탓하지 않는 법이다. 글을 씀에 있어서도 다루지 못할 소재나 주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공부를 더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놓고 본다면 많은 사람들이 쓰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주제와 소재를 선택하고 있다는 말이다. 계절의 아름다움, 삶의 무상함, 사랑과 그리움 같은 정서가 입맛에 당기다 보니 글의 내용도 해답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생각들이다.

 

 

'상식常識과 감상感傷과의 싸움'을 부연해 보면 '상식의 파격, 感傷의 환상 전복 顚覆' 이렇게 풀이해 볼 수 있겠다. 새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부단한 인식의 훈련과 자기성찰에서 맑게 닦여진다. 일시적인 감정感情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 법이다. 깨달음이라고까지 할 수 없어도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여야 하는 이유', ' 내가 이 세상에서 아름다워져야 할 이유'를 찾는 일은 무망한 일인 것 같아도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참다운 가치이며, 작가나 시인은 그 참다운 가치를 성경도 아니고, 불경도 아니고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신문예 2020 겨울호, 숨시 2020 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