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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역 가는 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 13. 10:31

 

시인은 말했다 … 시 속 풍경이 바로 여기구나

[중앙일보] 입력 2013.01.11 04:00

그 길 속 그 이야기 (34) 경북 봉화 승부역 가는 길

 

승부역 가는 길이 거의 끝나고 있다. 이제 이 돌다리만 건너면, 낙동강 너머에 승부역이 기다리고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기차역이 있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길이었다. 많은 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길이라고 했다. 어느 시인은 시 속의 풍경을 옮겨놓으면 이와 같을 것이라 했고, 어느 여행작가는 이 길을 걷고서 산속에 박혀 있는 섬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고 추억했다. 전국 방방곡곡 두 발로 디디지 않은 길이 없다는 도보여행가 신정일 선생이 주저 않고 꼽는 가장 예쁜 길도 바로 여기를 지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칭찬해 마지않는 길의 풍경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던 건, 사람이 길에게 부여한 이름이었다. 승부역 가는 길. 경북 봉화에 가면 석포역에서 승부역까지 철길 옆에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있는데, 이 길의 이름이 ‘승부역 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길을 끝까지 다 걸으면 기차역이 나온다는 말이었다. 여태 전국의 허다한 길을 걸으며 궁금했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번에 알았다. 길이 끝나는 곳에는, 외로운 기차 역 하나 서 있었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승부역 승강장 모습.
600일을 기다려 만난 길

승부역은 예부터 오지여행의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파다했던 소문 몇몇을 인용하면, 승부역은 강원도 태백시와 경상북도 봉화군이 경계를 이루는 내륙 깊숙한 지역,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에워싼 가파른 골짜기 안에 꼭꼭 숨어 있다. 주변 산세가 하도 험해 자동차로는 갈 수가 없고 기차로만 갈 수 있다. 역에서는 주변 산에 가려 하늘이 세 평밖에 안 보인다는 소문도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011년 4월 ‘승부역 가는 길’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하자마자 길에 대해 알아봤다. 신록 우거진 봄도 좋고 낙동강 상류에 발 담글 수 있는 여름도 좋지만, 다들 눈 쌓인 겨울이 최고라고 입을 모았다. 눈앞에 그림 하나가 그려졌다. 눈 쌓인 연봉(連峯)과 그 아래 꽝꽝 언 낙동강 상류 물길, 강물 옆에 놓인 낡은 기찻길과 기찻길을 따라 이어진 순백의 길.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 장면만큼은 눈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애면글면 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겨울이 왔다. 봉화군청 정상대 계장에게 전화를 걸어 눈이 내리면 꼭 연락을 달라고 부탁을 넣었다. 승부마을 주민 홍재남(58)씨 전화번호도 알아내 따로 부탁을 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눈만 오시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2011∼2012년 겨울 영동지역은 폭설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백두대간 서쪽 기슭의 내륙 산간지역은 겨우내 가뭄에 시달렸다. 봉화군청에서 눈 소식을 전한 건 지난해 2월 하순이었다. 봄을 찾겠다고 이미 남도 바닥을 헤매고 다닐 때였다.

 그리고 올겨울. 초입부터 많은 눈이 내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정상대 계장도, 홍재남씨도 지난겨울의 부탁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내 지난해 연말 연락이 왔다. “밤새 8㎝가 내렸는데, 내려오시겠어요? 눈길이 험하긴 한데.” 길이 아무리 험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무려 20개월, 다시 말해 600일 넘게 기다린 눈인데. 아니, 길인데. 다시 눈앞에 그림이 그려졌다.

 

승부역 가는 길 중간에 서 있는 ‘승부리’ 이정표.
세 시간을 걸어도 뽀드득 소리뿐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승부역은 자동차로도 갈 수 있었다. 석포역에서 승부역까지 12㎞ 길에는 비록 거칠긴 해도 시멘트가 덮여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오해가 생겼을까. 승부역이 놓여 있는 지형부터 알아야 한다.

 행정구역상 승부역은 경상북도 봉화군에 속한다. 승부역 가는 길의 시작점인 북쪽의 석포역도 봉화군 소속이다. 그러나 승부역 주변 마을의 생활권은 강원도 태백시다. 주민들은 강원도 강릉행 기차를 ‘들어온다’고 하고, 경북 영주행 기차를 ‘나간다’고 한다. 행정구역은 경상북도이지만, 생활구역은 강원도에 맞춰져 있다.

 승부마을이 경상북도와 격리된 이유는 승부역 바로 뒤에 우람한 산줄기가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이 산을 넘지 못하고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다른 광역단체로 장을 보러 다니고 학교에 간다. 승부역 다음 역이 양원역인데, 철길로 3.7㎞ 거리다. 그러나 자동차로 두 기차역을 오가려면 무려 58.4㎞를 이동해야 한다. 두 기차역을 바로 잇는 도로가 없어 석포역까지 나온 다음에도 한참을 에둘러 가야 한다. 승부역에 자동차로 갈 수 없다는 건, 봉화 사람에게 해당하는 표현이었다.

 승부역 가는 길은 의외로 걷기에 편했다. 대체로 평탄했고, 자동차 두 대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십 년쯤 전 이 길을 걸었던 시인은 먼지 폴폴 날리는 자갈길이라고 적었지만, 승부마을 주민들은 십 년쯤 전 길에 시멘트를 덮었다고 기억했다. 시인의 기억과 주민의 기억은 한두 해 차이일 터다. 아무튼 그 시절에도 마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버스가 왔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었지만, 자동차는 거의 없었다. 석포역에서 승부역까지 가는 길에는 마을 세 개가 드문드문 들어앉아 있다. 결둔마을·마무이마을·하승부마을, 이 세 마을을 합쳐 승부마을이라고 부른다. 그래도 민가 43호 주민 70여 명이 전부다. 세 시간 남짓 걷는 길이 내내 한적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아니다. 한적하다는 표현은 싱겁다. 차라리 적요했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만 이 적적한 골짜기에 울려 퍼졌으니까.

 

1 하승부마을의 겨울 풍경. 우거지가 겨울 볕 아래에서 잘 마르고 있다. 2 하승부마을 어귀 고추밭. 눈 쌓인 밭은 그대로 설원이 된다.
길이 끝나는 곳에 기차역이 있었다

문헌에 따르면 승부마을은 옛날 전쟁이 났을 때 이 마을에서 승부(勝負)가 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결둔마을도 군이 주둔한 마을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삼국시대 군사 요충지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 승부마을은 ‘부(富)를 잇는다(承)’는 뜻의 ‘승부(承富)’를 쓴다.

 하승부마을에 들어왔다. 넓은 구릉을 따라 10여 가구가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한갓진 두메산골의 겨울 풍경 그대로였다. 농가 벽에는 우거지가 마르고 있었고, 주민 몇몇이 당귀를 널고 있었다. 승부마을의 주 수익원은 당귀, 대추, 그리고 옥수수다. 그러고 보니 예까지 걸어오면서 논을 본 기억이 없다. 낙동강만 부지런히 길을 쫓아다녔다.

 하승부마을에서 1㎞ 정도 더 들어가야 승부역이 나왔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건, 70m 길이의 주황색 출렁다리였다. 승부역에 가려면 마지막으로 낙동강을 건너야 했다.

 승부역은 정말로 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었다. 까마득한 봉우리가 역사(驛舍)를 둘러싼 모습이 영락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병풍처럼 에워싼 산 아래로 터널이 뚫려 있었다. 이 터널만이 산 너머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다.

 다리를 건너 플랫폼에 들어섰다. 글씨를 새긴 큼지막한 자연석이 앞을 가로막았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1960년대 역무원이 썼다는 글이다. 이 글에서 ‘승부역 하늘은 세 평’이라는 소문이 발원했다.

 승부역은 1956년 처음 문을 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 개통한 철도 노선이 강원도 태백 철암역과 경북 영주역을 잇는 영암선인데, 그 영암선을 내면서 승부역도 들어섰다. 십 년쯤 전만 해도 찾는 이가 없어 기차역으로서 수명을 다할 뻔했다가 최근 들어 오지여행 성지로 떠오르면서 활력을 되찾았다. 역무원 최영일씨가 나와 알은 채를 했다. “여행 오셨어요? 좋은 데 오셨습니다.”

 그럼요, 좋은 데 왔지요. 얼마를 기다려서 왔는데…. 산이 높아 해가 일찍 졌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걸음을 재촉했다. 출렁다리를 건너다 되돌아본 승부역은 이미 어둠에 묻혀 윤곽만 흐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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