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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린천 미산계곡 1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9. 2. 12:41

‘美山洞天(미산동천)’ 알고있나요 ?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  개인산방의 널찍한 풀밭 마당 끝에 세워진 정자에 앉으면 내린천 물굽이가 암봉을 휘감으며 흘러가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코끝을 스치는 솔숲의 향기, 그리고 시원한 물소리가 어우러진다.
# 근육질의 물길이 여울을 따라 흘러가는 내린천 상류의 미산계곡.

내린천이란 이름은, 그 물이 구비구비 흘러가는 홍천군 내면의 ‘내(內)’자와 인제군 기린면의‘린(麟)’자를 합쳐서 붙인 것이다. 내린천이란 구비구비 이름이 주는 울림과 내밀한 느낌에 비해, 그 이름이 붙여진 내력은 참 멋대가리가 없지 싶다.

오대산 깊은 골에서 발원한 내린천이 계방천과 자운천과 만나서 몸집을 불려 급한 여울이 돼서 흘러가는 곳이 바로 미산계곡이다. 말이 계곡이지, 미산계곡의 규모는 산자락의 틈사이로 졸졸 흘러가는 산중 계곡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산계곡은 웬만한 강폭에 버금갈 정도로 넓다. 미산계곡의 여울을 급하게 우당탕탕 흘러가는 내린천의 물소리는 청량하기 이를데 없다.

미산계곡은 내린천의 상류 쪽에 속한다. 급하게 흐르는 여울의 물과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만나는 이곳의 물길은 ‘근육질의 느낌’이다. 내린천 하류 쪽의 물색이 진한 녹청색의 유장한 맛이라면, 이곳 상류의 물색은 맑고 또 투명하되, 불끈불끈 힘이 느껴진다.

미산계곡의 초입인 인제군 상남면 미산리. 마을에는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진 민박집들이나 식당들이 간간히 눈에 띄지만, 물길을 거슬러 올라갈 수록 민가는 적다. 물길 저편의 앞뒤로 막힌 가파른 산비탈에 도무지 물건너로 통할 길이 없어 보이는데도 집들이 들어서 있다. 독가촌도 있고, 두 세 가구만 우두커니 서있는 마을도 있다. 모양새로만 보자면, 아예 수해로 고립된 마을 형국이다.

# 쇠줄에 도르래를 달아서 내린천을 건너는 사람들.

저렇듯 오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들고 날까. 궁금증은 곧 풀렸다. 마을 주민들은 허공에 굵은 쇠줄을 경사지게 매놓고는 도르래를 달아 매달려서 강을 넘는다. 물살이 거센데다 바닥이 바위투성이라 배를 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리를 놓아본들 여간 튼튼하지 않고서는 큰 비가 내리면 다 떠내려가 버리니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쇠줄과 도르래다. 미산계곡에는 이렇게 물길을 넘나드는 곳이 모두 4곳이 있다. 첨단의 시대에 쇠줄과 도르래라니….

아예 쇠줄에 튼튼한 곤돌라를 만들어놓고, 모터를 달아 구동하는 곳도 있다. 산비탈이 대부분인 물 건너 쪽에 그나마 너른 평지가 있어 ‘대궐터’로 불리는 곳에서 아내와 함께 거주하고 있는 신장호씨는 혼자 뚝딱거리며 ‘자동 곤돌라’를 만들어 냈다. 물 이쪽과 저쪽에 쇠줄을 두 개 잇고, 엘리베이터와 같은 탈 것을 달아서 전기모터로 구동한다. 간혹 외지인들이 복분자와 산더덕, 오가피, 두릅 등을 길러내는 신씨의 농산물을 구입하기 위해 곤돌라를 타고 들어온다. 곤돌라에 올라 발아래로 여울을 따라 흘러가는 내린천을 아슬아슬 내려다보는 맛이 그만이다. 김씨는 “이곳에 출렁다리라도 놓아서 걸어서 건너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지인들이 이렇듯 독특하고 이색적인 탈거리를 포기할는지는 알 수 없다.

# 개인산 자락 아래 꼭꼭 숨은 산방의 문을 두드리다.

미산계곡에서 물 건너 집이나 계곡은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다. 빤히 바라보여도 다리가 없으면 건너지 못하는 탓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그 물건너 가장 깊은 곳은 어디일까. 그렇게 찾아나선 곳이 바로 ‘비조불통’ 계곡이다. 새가 아니면 닿지 못한다는 곳. 물건너 저쪽 편에 계곡이 있다는데, 깊은 여울 탓에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물 이쪽 편도 우람하게 솟은 암봉의 뒤쪽으로 길이 나있는 탓에 도무지 물가로 접근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몇 번을 그 길을 오르내리다가 ‘미산동천’이란 글이 흐릿하게 새겨진 비석을 보고, 핸들을 급히 꺾어 내린천에 바짝 붙은 비포장길로 들어섰다. 새로 놓인 듯한 다리 소개인교를 건너니 별천지처럼 풀밭이 펼쳐진다. 이곳에 근사한 집이 한 채 서있다. 집이 깃들어 있는 개인산에서 딴 것인지 ‘개인산방’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담쟁이넝쿨이 타고 오른 집의 모양새가 범상치않듯, 집주인이 이 집을 짓고 들기까지의 사연도 깊다. 유난히 눈빛이 맑은 집주인 신남휴(67)씨는 서울대 상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무역업으로 성공한 뒤, 18년 전에 홀연히 사업을 접고 이곳에 은거하고 있다. 신씨는 서슬퍼렇던 군부독재 시절, 선배에게 판금서적 몇권을 빌려봤다는 이유로 시국사건에 연루돼 1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왔다. 신씨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지만, 연좌제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당시에는 출옥 후에도 사회생활이 편할리 없었을 것임은 당연지사였으리라. 무역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뒀던 그가 은퇴 후 기거할 곳으로 마련한 터가 미산동천이었다.

외딴 곳을 찾아들어 자연과 벗하며 마음껏 책을 읽고 싶었던 그의 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 정자에 들어 책을 펼치거나, 소박한 술상을 받거나….

개인산방에는 물가의 벼랑에 바짝 붙어 소박한 정자가 세워져있다. 나무로 지은 정자의 마루는 제법 넓다. 정자에 앉으면 마치 와이드스크린처럼 내린천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엄한 암벽과 가지를 뒤튼 아름드리 소나무, 계곡을 돌아나온 신선하고 서늘한 바람, 여기에다 계곡을 흘러가는 물소리까지 더해진다. 그야말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 정자의 나무 난간에 몸을 기대고 향긋한 차 한잔에 두툼한 책 한권을 펼쳐놓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개인산방의 뒷마당에서 비조불통 계곡으로 향하는 외길이 있다. 짙푸른 녹음으로 가득한 청정한 숲길이다. 곳곳에 야생화 매발톱이 화려한 꽃을 피워올렸고, 쪽동백의 꽃잎들이 순백의 양탄자처럼 깔려있다. 계곡으로 향하는 오솔길의 중간쯤에도 작은 정자가 하나 서있다. 다소 투박하게 지어냈지만, 이쪽에서 보는 내린천의 경치는 그야말로 압권이다. 집 앞의 정자가 책읽기에 적격인 곳이라면, 이 정자에서는 돗자리를 깔고, 개다리소반에 조촐한 술상을 받는 것이 가장 어울릴 듯 싶다.

비조불통 계곡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더 따라가다 문득 남도 땅에 지어진 수많은 원림과 정자를 떠올렸다. 소쇄원과 송강정, 독수정 원림…. 모두 피비린내 나는 당쟁 혹은 사화에 연루됐다가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껴 벼슬자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자연으로 물러앉은 선비들이 은거하던 곳이다. 개인산방이 지닌 정취가 조선시대 선비들이 세웠던 정자와 누각, 혹은 원림에 겹쳐졌다.

# 비조불통 계곡의 서늘한 기운과 한 밤의 소쩍새 소리.

비조불통 계곡은 숲이 짙어 어두컴컴했다. 단풍나무 이파리를 통과한 빛은 주변을 온통 초록색으로 물들였다. 계곡의 소는 어른의 가슴까지 올 정도로 제법 깊어 보였다. 바닥이 훤히 비칠 정도로 맑은 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려와 바위를 타고 넘으면서 흰 포말을 만들어냈다.

숲 길은 소에서 끊어졌다. 위쪽으로는 아예 길이 없었다. 험한 바위길을 타고 넘어 봤다. 이 계곡의 물길은 개인산 자락에서 5km를 흘러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계곡 길을 타고 계속 오르면 이 땅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에서 물이 나는 개인산 약수를 만나는 것이다. 개인산 해발 1000m가 넘는 깊은 골에 자리잡은 개인산 약수는 물맛이 좋기로 이름난 곳. 함경북도 출신의 포수가 처음 발견했다는 이 약수는, 깊은 산중에서 나는 것이어서 왠지 더 신비롭다.

내린천을 가게 된다면 상남면소재지에 들러볼 것을 권한다. 가장 큰 건물이 면사무소일 정도로 한적하고 또 허름한 곳. 하나 있던 다방도, PC방도 최근에 문을 닫았다. 동네 할머니들이 죄다 모여있는 슈퍼마켓과 두어 곳의 식당, 그리고 단층짜리 모텔 하나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곳. 오죽하면 최근에 이곳으로 부임해온 한 면사무소 직원이 “가장 먹고 싶은 것이 제과점 빵”이라고 하소연했을 정도다. 이렇듯 허름한 오지 마을의 단층짜리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볼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허름한 소도시의 칠흑같은 밤, 창밖으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처량한 소쩍새 울음소리를 듣는 운치를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인제·홍천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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