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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령 옛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8. 17. 15:37

 

접혀있는 고갯길, 짐을 진 아비의 걸음 얼마나 버거웠을까

[중앙일보] 입력 2012.08.17 04:04 / 수정 2012.08.17 09:58

그 길 속 그 이야기(29) 강원도 양양 구룡령 옛길

고개를 넘는 일은 이제 일종의 레저 활동이다. 자동차를 타고 고개를 돌아서 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 고개를 정면 돌파하는 일은 제법 결단을 요구하는 여행의 한 방법이 되었다. 더 이상 고개를 넘는 일은, 이쪽 세상과 고개 너머 세상을 잇는 고된 생활의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의 아버지들에게 고개는 어떻게든 넘어야 하는 일상의 고단한 절차였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고개 이쪽의 산물을 이고 고개를 넘어 고개 저쪽의 산물과 바꾼 뒤 고개 저쪽의 산물을 지고 고개 이쪽으로 귀환하는 삶을 허구한 날 되풀이했다. 그래야 고개 이쪽의 생활이 가능했다. 백두대간 언저리 산촌의 삶 역시 그러했다. 백두대간 옆구리를 도로가 파고들기 전, 강원도 양양과 홍천을 경계 짓는 구룡령에는 바리바리 짐을 이고 진 우리네 아버지의 무거운 걸음이 있었다.

 

구룡령 옛길. 이제 얼마 안 남은 우리네 옛 고갯길의 전형을 보여준다. 길은 어지러움이 일 정도로 굽이굽이 방향을 틀고, 바닥은 오랜 세월 뭇 사람의 흔적으로 단단히 다져져 있다.

수십 년 만의 폭염이 몰아친 이번 여름 구룡령을 넘었다. 복중이었지만 고도가 높아서인지 더위는 외려 덜했다. 이른 아침 구룡령은 구름 안에 파묻혀 있었고, 해가 올라온 다음에는 작열하는 여름 태양을 울창한 숲이 걸러주었다. 올여름 구룡령 넘은 일은 꽤 괜찮은 피서 요령이 된 셈이었다.

 

구룡령 옛길은 흙과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그윽한 오솔길이다.

 

문화재가 된 고갯길


구룡령은 아주 오래된 고개다. 영서 내륙 지역인 강원도 홍천군 내면과 영동 북부 지역인 양양군 서면의 경계가 구룡령이다. 동해에서 건진 각종 해산물이 이 고개를 넘어 내면으로 전해졌고, 홍천시장에서 나온 콩이나 수수, 녹두 따위의 곡식이 이 고개를 넘어 양양과 고성의 갯마을로 건너갔다. 그 오랜 내력을 잊지 못해 양양과 홍천 사람들은 지금도 구룡령을 ‘바꾸미 고개’라 부른다.

오래 묵은 고개일수록 이야기도 많다. 아홉 마리 용의 고개라는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용 아홉 마리가 고개를 넘다 지치면 인근 약수터에서 목을 축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러고 보니 구룡령 인근에는 갈천약수·삼봉약수·방동약수 등 예부터 효험 자자한 약수터가 유난히 많다.

1874년 일본이 백두대간 허리를 파고들며 지금의 56번 국도를 냈고, 비포장도로였던 국도에 1994년 아스팔트가 덮이면서 구룡령 고갯길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지금 56번 국도 위 구룡령 옛길 정상 아래에는 ‘구룡령 정상(해발 1013m)’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서 있는데, 애초엔 ‘장구목’이라 불리던 곳이다. 원래 구룡령 정상은 여기서부터 45m 위인 해발 1058m 지점, 백두대간 마루금 위에 걸터앉아 있다. 일본이 신작로를 내면서 고개 정상 자리도 바꿔 버렸다.

한동안 잊힌 이름, 구룡령이 다시 주목을 받은 건 ‘구룡령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문화재가 된 다음부터다. 문화재청은 2007년 12월 구룡령 옛길 2.76㎞ 구간을 명승 29호로 지정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구룡령 옛길을 포함해 죽령·토끼비리·문경새재·하늘재·대관령 옛길 등 6개 문화재 길이 있는데, 이 중에서 구룡령 옛길이 가장 먼저 문화재로 지정됐다.

백두대간에서도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 가장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있어서인지 구룡령 일대는 한국전쟁도 용케 피했고 산불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 백두대간 자연 생태계가 오롯이 보존되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역인 것이다. 하나 구룡령의 가치는, 누가 뭐래도 오랜 세월 고갯길을 다진 인적에 있다. 구룡령은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는 중요한 상품 교역로 중 하나였다.

고개를 오르는 길

구룡령 고갯길은 원래 홍천군 내면 명개리에서 양양군 서면 갈천리까지 6.46㎞ 이어진 길을 가리킨다. 그러나 명승으로 지정된 구간은 구룡령 정상에서 갈천리까지 2.76㎞ 구간이다. 명개리 쪽 구간이 제외된 이유는, 문화재 지정이 늦어져 옛길의 정취가 많이 가셨기 때문이다. 계곡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데 양양 쪽보다 훨씬 가파르다.

그래서 요즘 구룡령 옛길 걷기는 다소 변형된 코스가 적용된다. 갈천산촌체험학교(옛 갈천분교)에서 구룡령 정상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거나, 56번 국도 위 구룡령 정상 표지판에서 구룡령 정상을 올랐다가 갈천분교로 내려온다. week&은 두 번째 코스를 골랐다. 원점 회귀 코스만큼 지루한 걷기도 없어서다.

8월 7일 오전 8시쯤 구룡령 이정표는 구름 속에 잠겨 있었다. 여기가 해발 1013m이고, 여기서부터 가파른 나무계단을 타고 10분쯤 올라야 비로소 옛길 트레킹이 시작된다. 나무계단이 끝나는 지점부터 수풀 우거진 오솔길이 이어진다. 이 그윽한 오솔길이 바로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에 오르면 천하가 내려다보이게 마련인데, 구룡령 일대 백두대간은 숲이 너무 우거졌다. 시야가 차단되는 대신, 햇볕도 가려졌다.

구룡령 일대 백두대간 길섶 여기저기엔 여름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있었다. 까치수염·나리꽃·단풍취·동자꽃·모시대…. 이름을 모르는 수많은 수풀 중에 산삼도 분명 있었을 터이다. 이 일대는 심마니가 특히 많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백두대간 1.6㎞ 구간을 걷고 나니 사방으로 길이 나 있는 널따란 공터가 나타났다. 구룡령 옛길 정상이다. 여기서 백두대간을 밟으며 직진하면 조침령을 지나 설악산이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홍천 명개리,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양양 갈천리다. 우리의 아버지가 잠시 짐을 내리고 땀을 훔쳤던 곳. 여기서 잠깐 숨을 고르고 걸음을 재촉했다. 걸음은 물론, 문화재가 된 오른쪽 길로 향했다.

 

1 구룡령 옛길이 끝나는 길목에 있는 옛 갈천분교 교정. 지금은 폐교가 돼 산촌체험학교로 쓰이고 있다. 2 고개에서 내려오면 맑은 개울이 앞을 막는다. 개울에는 차고 맑은 물에서만 산다는산천어 새끼들이 놀고 있었다. 3 옛길에서 만난 거대한 금강소나무. 30m는 족히 넘어 보였다. 4 서어나무 연리지.

구룡령을 내려오며

옛 고갯길에 접어드니 왜 이 고개가 구룡령이라 불리는지 알 수 있었다. 길은 휘어져 있다기보다 차라리 접혀 있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의 경우 이렇게 크게 휜 굽이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 다니는 길에서 이런 굽이는 본 적이 없다. 아홉 마리 용이 고갯길 이름에 붙은 이유는, 바로 길이 그리는 구불구불한 모양 때문이었다. 대관령 옛길도, 죽령도, 새재도 이 정도는 아니다. 그만큼 가팔라서일까.

아니다. 여기는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지만, 짐을 옮기는 길이었다. 구룡령을 오르내린 우리의 아비 가운데 빈손은 없었다. 올라갈 때에도 짐이 있었고, 내려올 때에도 짐이 있었다. 짐을 옮기는 일이야말로 구룡령을 넘는 이유였다. 우리의 아비들은 짐을 이거나 지거나 든 다음에야, 그나마 형편이 나으면 짐 실은 노새라도 한 마리 앞세운 다음에야 고개를 넘을 수 있었다. 고갯길이 바로 위를 향하지 못하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건, 우리네 아비의 걸음이 그만큼 더디고 버거웠기 때문이다.

고개가 거의 끝나갈 무렵 키가 20m는 족히 되는 금강송이 무더기로 나타났다. 안내판은 이 일대가 ‘솔반쟁이’라고 소개했다. 소나무가 있는 반쟁이라는 뜻으로 ‘반쟁이’는 아흔아홉 굽이의 절반이라는 뜻이란다. 금강송 몇 그루는 밑동만 남아 있었는데, 89년 경복궁 복원에 쓰였다고 한다.

비로소 숲을 빠져나왔다. 고개에서 내려오자마자 맑은 개울이 앞을 가로막았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에는 작은 물고기가 떼를 지어 노닐고 있었다. 산천어 새끼들이다. 산천어는 수온이 20도가 넘지 않는 차고 맑은 물에서만 사는 토종 물고기다. 이 작은 개울이 산 아래로 흘러 내려 남대천을 이룬다.

마을을 지나 56번 국도변에 다다르니 옛 갈천분교가 보였다. 구룡령 옛길의 종점이다. 49년 개교한 갈천분교는 졸업생 222명을 배출하고 99년 폐교됐다. 지금은 산촌체험학교로 활용된다는데, 교문에 자물쇠가 잠겨 있어 운동장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길 정보= week&이 걸은 구룡령 옛길은 약 6㎞ 구간이다. 쉬엄쉬엄 서너 시간이면 충분하다. 키다리 고목이 따가운 여름 햇살을 가려줘 한여름에도 좋았지만 늦가을에도 참 좋을 것 같았다. 수많은 나무가 길과 바투 붙어 있어 가을이면 낙엽 밟는 소리가 걸음마다 울린단다. 56번 도로 위 구룡령 정상에 자동차를 세우고 길을 걸은 뒤 갈천산촌체험학교(033-671-5880)에서 양양 택시를 불렀다. 3만원에 구룡령 정상까지 갔다. 걷기 전문 승우여행사(swtour.co.kr)가 오는 25·26일, 다음달 1·2일 당일 여정으로 구룡령 옛길을 걷는다. 4만5000원. 02-2203-8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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