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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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에 관한 질문 2004

ㅣ제 4부ㅣ낙타에 관한 질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2. 27. 23:48

ㅣ제 4부ㅣ

낙타에 관한 질문

 

탑과 벽  / 나호열 

 

 

하찮은 돌멩이들도 쌓으면 탑이 된다

절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늘 그윽한 발걸음으로 서있는

그대를 만나기 위해

하늘을 받치고자 함이었는데

아, 나는 탑이 되지 못하고

벽이 되었구나

얼굴에 가득한 낙서

급전대출과 주점 안내문

가까운 것은 주검이고

그대의 하늘을 가리고만 있구나

벽 속에서

파도가 소리치며 운다

벽 속에서

가슴을 치는 종소리가 운다

 

 

새벽 / 나호열 

 

 

블랙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도둑고양이들

밤이면 스스로 나무이기를 꿈꾸는

가로등들

스스로 커지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꺼지지도 못하면서

꽃 흉내를 내다가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는다

블랙 홀

저 강력한 어둠의 흡입구가 닫히기 전에

조간신문은

송아지가 먹어야 할 우뉴는

설친 잠의 투입구에 손을 넣어야 한다

맛이 상한 어제의 일들 부끄러웠나 지난밤은?

객사 문을 열고 나서는

봄꽃들의 이마에

서러운 바람이 지나간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빈 택시가

두 눈을 껌벅거리며

붉은 신호등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가로등.1 / 나호열 

 

 

 

언젠가는 쓰러지리라

뿌리 없이 견디는 세월 앞에

조용히 무릎 꿇으리라

 

한때는 나무인 줄 알았다

온몸에 깃발을 내걸고

새들을 품으며

높이 솟아오를 줄 알았다

한때는 꽃인 줄 ㅇ라았다

어둠을 밝히는 이 몸짓이

향기와 씨앗을 가득 품어

벌과 나비의 꿈인 줄 알았다

아, 끊임없이 달겨드는 전율로

온몸을 타고 오르는 이 불빛

가지도 못하는 먼 길을 바라보며

그림자 하나를 펄럭일 때

하루살이들은 맹렬히

나무도 아닌

꽃도 아닌

불빛 속으로 몸을 던진다

튕겨오르는 저 가벼운 일상의 우울

오늘도 나는 차렷 자세로 그대를 향하여 선다

일몰부터 일출까지

나무가 되어본다

꽃이 되어본다

 

가로등. 2 / 나호열 

-귀향 歸鄕

 

 

 

오늘 하루는 쓸쓸하였습니다

돌아가야 할 나의 대지大地

어머니는 늙어 쇠락해졌습니다

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삶

꾸깃해진 풍선에 바람 넣듯

활짝 웃어 봅니다

아, 너무 웃었나 봅니다

온르 하루는 쓸쓸하였다고

찬바람에 얼굴 씻는 사람 앞에

너무 경박스러웠나 봅니다

서둘러 얼굴에 가득한 바람을 뺍니다

쭈글한 주름살 잡히는

그 모습이 부끄러워

아예 불을 꺼버리고 맙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문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가로등. 3 / 나호열 

 

 

암수 한 그루인 은행나무 잎이

아직 푸르다지난 여름은 위대한 만큼

아직 배설의 곤욕을 치루고 있고

차례 찬바람이 회초리를 쳐야

물들 것 같다

물들어 혼곤히 옷 벗을 것 같다

그 나무 아래서 담배를 피우고

때로는 먼 곳에서 오는 전화를 받는데

오늘은 은행나무 몸통에 전단이 돋친다.

잃어버린 개를 찾습니다

눈이 크고, 다리가 짧은, 검은......

연락주세요 011- 357- 0801

누가 떠나고 누가 남았다? 누가 누구를 사육했을까?

은행나무가 컹컹컹 이그러진 달을 향해 짖고 있다

그때마다 검정개를 쿰쿰한 은행알을  됫박으로

지상으로 달빛으로 쏟아 붓는다.

아까부터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지르르지르를 울고 있다

컹컹컹 울부짖으며,

흐두둑 은행알 떨구어내며

 

 

조롱 받는 새 / 나호열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고

노래해도 운다고

조롱받는다

 

조롱 속에서 사람들이

조롱 밖의 새에게

한 움쿰의 모이와

물을 준다

 

너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할 텐데

 

피바노바 / 나호열 

-2002년 6월 22일 서울에서

 

 

튀어 오르고

구르고

날아가고

그러나 새는 아니고

돌멩이도 아니고

분명한 선 안에서만

살아 숨쉬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걷어 채이는 공의 궤적을 따라

울고 웃는 동안

저 남쪽의 까만 피부의

어린아이들이

제 살을 찔러가며 공을 만든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

날아가는 저 공은

수십 억의 사람들을

울리고 웃게 하지만

저 공은 결코

남쪽 나라 살빛 까만 아이들을

웃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른다

 

우체통이 그립다 / 나호열 

 

사람들 사이에 오래 서있으나

누구를 기다리는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그는 보이지 않는다

속에 무엇이 있나 하고 궁금해 하는

따뜻한 손은 찾아보기 힘들다

쓰다 버린 폐지

구겨버린 전단지

휴지와 담배공초

쉬임 없이 매일 생산되는

버려야 할 것들

그 누구도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기다림이 익고

그리움이 물들고

눈물이 포도주가 되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우체통이

어느 날 이름을 바꾼다

사람들 사이에 쓰레기통이

섬처럼 떠있을 뿐

 

부메랑 / 나호열 

 

 

몇 차례

찬바람과 비가 흩뿌리고 나서야

나무들은 철이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겨울에 걱정이 앞서고

그 걱정의 부질없음에 부끄러워하며

물들어 간다

세상에 떠도는 말들

함부로 뱉어댄

애비 없이 떠도는 말들이

이제야 제 가슴에 돌아오기 시작했나보다

제 발등에 뿌려지는

눈물들

콧물들

청소부들이 정신 차리라는 듯

나무들을 흔들어댄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어

급기야 장대비로 온몸을 후려 패기 시작한다

내 정신의 퍼런 멍울이

몇 점, 안쓰럽게 매달려 있다

 

컵 라면의 뚜껑을 열다 / 나호열 

 

 

 

희로애락의 조화가 저 속에 있다

단단하게 얽히고 얽힌

압축된 한 덩어리의 고뇌

절대로 썩지 않을 그리움에 담겨

걸을 때마다 덜거던거리는 소리를 낸다

뚜껑을 완전히 열지는 말아라

비상을 꿈꾸는 새처럼 일시에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완벽한 생살의 꿈틀거림

주르륵 눈물 대신 뜨거운 물세례

3분이면 해탈이다

3뷴의 고통 속에서

다시 살아야겠다는 식욕이 솟아오른다

뚜껑이 닫힌 채로 나는 당신 앞에 서있다

썩지 않을 그리움으로

기꺼이 뜨거운 욕조 속에 잠기고자 한다

그대여

뚜껑을 열어다오

그리고 뜨거운 물세례로 다시 태어나게 해다오

 

 

 

 

도깨비 환상 / 나호열 

 

 

어제의 그가 내일의 그 속으로 스며든다

스멀스멀 황혼이 끝나버린 잔치마당에

길게 드러눕듯이

언제나 서성거리며 사슬처럼 옥죄어오는

주름살에 몸을 내놓는다

어두워진 길을 넘어지지 않으려고

보이지 않는 미래를 멀리 내다보려고

안경 대신 눈물을 끼워 넣은 그가

바람 매에 두꺼워진 세월의 외피를

가지런히 빨랫줄에 걸어놓을 때

까닭 없는 빗줄기가 또 한 번

슬픔의 낙인을 찍는다

어제의 그가 사막을 건너

내일의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슬그머니 뒷문을 열어놓고

눈치 있게 빠져나가는 그림자들을

용서하는 그가

 

처음이며, 끝인 / 나호열 

 

 

결박하기 위항

스스로 묶여져야 하는

끈은

처음과 끝이없다

한몸으로

억세게 끌어안은

매듭을 풀겠다고

성급한 사람아

칼로 자르지 마라

저 매듭은 끝끝내

깍지 낀 저 손 풀지 않을 것이니

결박하기 위하여

스스로 묶어버린

사랑도 있을 터이니

너의 두 손을

이제 내려놓아라

버려야 할 책 뭉치

신문덩이

동여맨 끈 속에는

허공의 힘이 가득 차 있다

시간의 허물을 벗어 던진

우주 속을 유영하는

탯줄처럼

밧줄처럼

 

 

싸움닭 / 나호열 

 

벼슬 같지 않은 벼슬 세우고

깃털 치켜올리고

발톱도 벼려보고

아, 날지도 못하는 주제에

싸움을 건다

이기지 못할 것 알면서

세상에 저 무량한 허공에

싸움을 건다

다가오지 마라

나는 칼이다

나는 쇠꼬쟁이다

뒷걸음질치면서

꼭이야 꼭! 꼭! 꼭!

종종걸음으로 통닭이 되어간다

 

쓰레기 / 나호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굳은 빵 속에 박힌 이빨 자국

가시와 뼈만 남아 비닐봉지에 쑤셔박힌 채 악취를 풍

기는

삶의 현장

쓰레기장이 가까워진다

어느 날 새벽

재활용이 되지 않는 나는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묻히

거나

한 점 끝이 흐린 연기가 되어 사라질 것이니

쓰레기장이 가까워질수록 눈시울이 붉어진다

뜨거운 애무와 눈길 받아보지 못하고

봉투째 갈기갈기 찢겨진 편지의 내용이 궁금하다

 

모질고 질긴 이 그리움은 누구의 것이냐

 

천년이고 만년이고 썩지도 않는지

아무리 버려져도 자꾸 살고 싶은지

입을 막아도 옆구리가 터진다

 

 김대균의 줄타기* / 나호열 

 

 

1.

바람 센 날

한손에 부채 쥐어들고

줄에 오른다

이게 다 밥 먹고 사는 벱이여

얼쑤, 추임새 넣고

밑을 내려다본다

아차 줄 놓는 순간에

콘크리트 두꺼운 회색 바닥에

어떻게 될지

다섯 길이 안 되는

동아줄 위를

아슬아슬

양반다리 했다가

재재걸음 발름대다가

털썩 주저앉았다가

뒹겨오를 때마다

구경꾼들은 박수를 친다

배운 게 이거밖에 없어

사타구니 속 쳐다보지 말아

아무것도 없다니까

다 보여주고

또 보여준다

이 짓거리 낸들 좋아서 하남

얼쑤

 

2.

매트리스 한 장 깔지 않고

혼신의 힘

줄 위를 오간다

이 끝에서는 저쪽 춘향이가 보이고

저 끝에서는 이쪽 이도령이 보이나

오, 줄이며, 길이며, 밥줄이며, 밥길인

줄타기

절대로

줄 위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 광대

연습 없는 죽음을 향해

그가 광대의 탈을 벗고 사람이 되는 날

그날은 허공에 홀연히 몸을 날려

실수인 듯

맨바닥으로

아득히 추락하는 날이다

 

 

 

*김대균은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58호이다. 아홉 살, 어려서부터 줄

을 타기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2001년 5월 경희대학교 축제 때 콘크

리트 마당에서 15분간 줄을 탔다. 나는 일회용 커피를 마시면서 박수를

쳤고, 바람이 유난히 거센 날의 일이었다.

http://www.jultagi.or.kr(김대균 홈페이지)

 

두통약 / 나호열 

 

두통약이 머릿속에 퍼진다

적막을 키우는 숲이 지워지고

키 큰 침엽수들이 지워지고

길이 희미하게 남았다가 지워지고

빗자루가 쓸어내는 작은 발자국들이

투명하게 울린다

눈 내리는 마을은 멀다

멀어서 아름다운 마을은

지워지지 않는다

눈물이 투욱 떨어진다

그리움의

두통약 한 알

 

삼만 원 / 나호열 

 

 

오 시인의 말,

 

필리핀에 갔었어요

화산 폭발이 있었잖아요

잿빛 재가 하늘에 장막을 치고

시뻘건 용암이

마을을 뒤덮어버린 곳

구두 신은 발바닥이

아직도 뜨거운 길을 따라서

분화구 꼭대기까지 가보았어요

세월을 견디기 힘들어

먼저 늙어버린 맨발의 할머니가

당나귀인지 말인지

그 위에 나를 태우고

힘겹게 위로 올라갔어요

일주일 공치다가 처음 맞이한 손님

우리 돈으로 삼만 원 주었어요

말인지 당나귀인지

힝힝거리며 할머니를 끌고 올라갔어요

내려올 때는 할머니를 태우고

내가 말꼬리 붙잡고 내려왔어요

 

나의 말,

삼만 원이면 뭘 할 수 있는데?

 

저기 누가 울고 있다 / 나호열 

 

누가 나를 쥐어짜고 있나보다

계속되는 두통

뚝뚝 떨어지는 아웃사이더의 슬픔

스펀지의 비명 속에 담긴

한 자리를 맴돌았던 땀 냄새

반발력을 잃어버린 소파 속의 스프링처럼

나는 그리움에 맞설 수가 없구나

소파의 마른 가슴과 나의 등뼈가 잉태하는

겨울밤의 악몽

죽어버려야 해

죽어버려야 해

미수에 그친 부시시한 눈으로

더듬는 알람시계

정확하게 복원되는 05:30의 목마름

이제 웃음도 바닥이 났나

울지 않으려고 웃는데

웃으면 자꾸만 눈물이 난다

 

낙타에 관한 질문 / 나호열 

 

낙타를 보면 슬프다

사막을 건너가며

입 안 가득 피 흘리며

거친 풀을 먹는 다는 것이

사막에서 태어나서

사막에서 죽어간다는 것이

며칠이고 사막을 건너가며

제 몸속에 무거운 물을 지고

목마름을 이기는 것이

낙타를 보면 못 생겨서 슬프고

등위로 솟은 혹을 보면 슬프다

낙타가 나를 보고 웃는다

낙타가 이상한 낙타를 보고 웃는다

내장된 그리움으로

삶의 사막을 건너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갈증을 이겨내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이

얼마나 맑으냐

 

그래서 나는

낙타의 낙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