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부
온통 빈 북 같은 가을이 오네
감포 가는 길 / 나호열
누구나 한 번은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보게 된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이리저리 굽이치는
길의 끝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 길의 끝에는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치면 기쁨으로
슬픔으로 다가서면 슬픔으로 울리는 바다가 있음을
꿈꾸듯 살아왔음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때아닌 나비떼
눈 한 번 크게 뜨니 성성한 눈발이더니
다시 한 번 눈감았다가 보니 너울대는 재들
바다 쪽으로 불어가는 바람을 따라
아름답게 사라져 버리는 추억을
데리고 가는 길
산다는 것 / 나호열
집으로 돌아가는 촌로 부부를 태웠다. 직업이 뭐요? 학
교에서 학생들 가르칩니다. 아!. 그거 좋지. 난 배우는 사
람이요. 턍감만 열려 매년 골탕 먹이는 감나무한테. 삽질.
쇠스랑질에 돌만 솟아오르는 땅한테. 제멋대로 비 뿌리
고 제멋대로 비 거두어가는 하늘에......
옆에서 할머니가 거들었다. 소득 없는 일에 저렇게 매
달리는 법만 평생 배워야 소용없소. 거두어들일 줄 알아
야지.
논득에 깨가 한창이었다. 아, 저 깨들 좀 봐. 정말 잘
영글었네. 내 새끼들 같다니까. 올해 깨 심었는데 내 눈에
는 깨밖에 안 보여. 온통 깨밖에 없다니까. 말 못하는 저
것들도 사람 정성은 알지. 마음 좋게, 편하게 정성을 다하
면 보답을 한다니까, 아! 저 영근 ?들 좀 봐요, 저 주인
네 참 실한 사람이겠구먼
산소 가는 길, 집도 보이지 않는 산길을 두 노인네 다시
터벅터벅 사라져 갔다.
세상이 밝았다 / 나호열
내가 떠나온 곳을 향하여
미친 듯이 되돌아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등진 곳을 향하여
허기진 채로 되돌아가는 나
이 거대한 허물 속에
껍데기 속에
우리는 무정란의 꿈을 낳는다
나란히 눕자
꿈은 잠들지 않으면 찾아오지 않는다
나란히 누워
죽은 듯이 잠들자
잠들 듯이 죽어버리자
우리는 날카로운 비명을 듣는다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무엇인가가 뛰쳐나오는 황급한
발자국 소리를
세상이 밝았다고 표현한다
허물분인 껍데기분인 세상에
꿈은 깨지기 위해
무섭게 꽃을 피운다
어촌의 밤 / 나호열
창들은 한결같이 바다를 향개 귀를 세우고 있다
모래 속으로 스며둘던 파도는
밤이 깊어지면서 둑을 넘고 길을 건너
귀속으로 시퍼렇게 밀려들어 오고 있다
어쩌다 하룻밤 바닷가에 머무는 사람들은
파도소리에 가슴을 상해
못내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철썩이는 저 소리에 몸을 적시고
아이를 낳고
아침이면 방안 가득한 모래를 쓸어내고
등짝 넓은 사내의 뒤로
밤새 덮고 깔았던 바다를 털어내는 아낙네는
지금 코까지 골며 잠에 빠져 있다
손님 끊긴 바닷가 횟집 겸 민박집 좁은 수족관 속에
도다리 광어 민어 쥐치들 몸 부딪치며
먼저 목을 매려고
탐조등에 좆겨 성급히 돌아서는 바다를 향해
넘어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내일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한강 유람선 위에서 / 나호열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고행자는 한결같이 일그러진 얼굴과 쾡한 눈과 헝클어진 머리칼과 약간은 썩은 냄새들 풍기는데, 고행자는 한결같이 굶주림의 미소와 약간의 빵 굽는 냄새의 평화를 보여준다.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고행자는 사라지고 있는데, 한 번도 고행자는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이상하다. 우리는 그의 몸을 보면서 그의 정신을 훔치려고 한다. 이상하다 우리가 그의 정신을 훔칠 때 우리는 지독한 구역질에 시달린다.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걷다가 넘어지다가 이윽고 온몸으로 기어간다. 고행자는 제 몸을 눕히면서, 제 몸을 오체투지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엎드린 그를 숭상하고 엎드린 그를 경멸한다. 그물을 치고, 둑을 쌓고, 댐을 만들고 그를 먹으면서 그를 배설한다. 그가 길이다. 그의 몸이 길이다. 아니, 우리는 그를 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깔아뭉개지는 그는 뭉개질수록 우리의 가슴께로 차올라 우리의 욕망을 엿보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저 뱃전에 출렁거리는 그의 힘살에 떠밀리지 않으ㅇ여고 발버둥칠 뿐, 저 먼 뻘밭에 쳐박히고 저 먼 바다에 출렁거리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그를 노래하려고 하는데, 그는 침묵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내 배 위에서 죽어라!
부력과 가라앉음의 아슬한 줄 위에서
한 줄기 바람도 위태롭다
통화 중 通話 中 / 나호열
열 걸음만 나오면 속세다 누구의 손바닥 안에서 싫증이 나면 늙은 스님은 길가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자판기 옆의 공중전화통, 통화 중인 세상에서 뚝뚝 나뭇잎이 떨어진다.
자네 출세했구만, 몇 장의 흰 구름, 바쁘게 개울물로 흘러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말인가,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인가
가을이 온통 빈 북 같다
덕진 연꽃* / 나호열
연꽃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데
누군가를 처음 그리워할 때처럼
눈 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 불꽃 속에 숨어 있음을
그대의 눈빛을 보고 알았네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도 어쩌면 저리
소중한 그 무엇을 감싸안은 두 손 모양 경건하냐고
두 손 모두어 거둘어들인 그 무엇이 또 무엇이냐고
묻는 나에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비 한 방울이 또르르
연꽃 속으로 들어가서는
아직도 아직도 길이 멀어서인지
날 저물도록 기별이 없네
*전주시 덕진공원
두 사람 / 나호열
대구 광역시 동구 신무동
팔공산 배꼽 아래를 칭칭 동여맨
길은 칠곡으로 가고 영천으로도 가는데
사과꽃 포도 향기에 취해 길 놓친 사람들
끝내 그 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말았네
바위 속에 들어앉아 풍상에
희로애락마저 깎이운 채 푸른 이끼에
제 살 내어주는 재미로 사는 사람 옆에
잔뜩 고개를 들이밀고 무슨 말인가 싶어
귀 세운 소나무
멀리서 바라보면 꽤 정다운 이야기 나누나 싶어
인동덩굴 헤치며 다가서 보면
사랑한다 말 한마디 해보지 않고 사는
노부부처럼 시큰둥한테
그 옆에 반나절만 서성거려 보아라
어디서 고소하게 밥 익는 냄새
아득하게 정신 놓게 만들 터이니
세상 사람들*
모두들 꽃만 보는데
나는 홀로
향기를 사랑하노라
이 꽃 향기 온 세상 가득 채우는 날
우리 모두
꽃과 별반 다름없으리
*팔공산 부인사 숭모전 벽면에 쓰여 있는 시
업보業報 / 나호열
강화도 전등사 대웅전 추녀 네 귀퉁이를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쪼그리고 앉은 나부를 보았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니 원숭이 형상이었는데, 지나가는 말로 들은 애기인 즉슨 틀림없는 벌거숭이 여인네였습니다. 대웅전 짓는 목수의 돈을 사랑을 빌미로 알뜰하게 챙겨 야반도주한 아랫마을 주모에게 앙갚음하려고 이왕이면 대웅전 울려 퍼지는 좋은 말씀 귀담아 들어 개과천선하라고 넉넉하게 마음 쓴 목수장이는 누구였을까요, 목이 아프고 어깨가 심하게 결리는 증상을 보니 이 세상 어느 귀퉁이를 발가벗고 떠받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식은땀이 납니다
밤바다 / 나호열
그를 만나러 감포에서 울진으로 간다
얼마나 먼 곳에서 숨차게 달려와 쓰러지는 것인지
너울대는 포말이 순간 흰 꽃으로 핀다
피었다가 지면서 파도를 움켜쥐며 날아오르는 갈매기
망막을 할퀼 때마다 길은 급하게 왼쪽으로 꺾인다
그를 만난 지 오래되었다. 사랑을 잃고 타향에 몸 붙인 그를
이제야 만나러 간다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 밤길을 달려 방파제 끝에서 서성였는지를
왜 막막한 바다에 줄을 던져놓고 마시지 못하는 소주
를 두 병씩 마셨는지를
밤바다의 울음이 두통을 일으킨다
흐드러지게 핀 흰 꽃들은 일제히 고개를 꺾어 길을 막는다
그가 말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서둘러 이야기 한다
외로운 사람이 바다로 간다
사시사철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는 흰 꽃을 보러 바다로 간다
외로운 사람보다 더 외로운 것이
바다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다로 간다
그는 울진 방파제에서 실종되었다
안 개 / 나호열
언제부터인가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 자리에 놓여진 것들 탐내지 않고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을 줄 아는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처음에는 더듬거리고 막막해 하다가
한 걸음씩 고개 숙여 걸어가다 보면
엷은 슬픔의 축축한 옷 안개의 속마음을 알게 되지
껴안을수록 나의 두 손은 허허로운 가슴께로 모두어지고
헤쳐나가면 나갈수록 무겁게 다가서는 생을 사랑하게 되었어
한 걸음 벗어난 아득한 벼랑 너머에도
하늘과 땅 밑에도 길이 있음을 눈감고 알게 되었다
저녁 부석사 / 나호열
무량수전 지붕부터 어둠이 내려앉아
안양루 아랫도리까지 적셔질 ?까지만 생각하자
차고 참았다가 끝내 웅얼거리며 돌아서버린
첫사랑 고백 같은 저 종소리가
도솔천으로 올라갈 ?까지만 생각하자
어지러이 휘어돌던 길들 불러 모아
노을 비단 한필로 감아올리는 그때까지만 생각하자
아, 이제 어디로 가지?
병산屛山을 지나며 / 나호열
어디서 오는지 묻는 이 없고
어디로 가느지 묻는 이 없는
인생은 저 푸른 물과 같은 것이다
높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어리석음이
결국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임을
짧은 인생이 뉘우친다
쌓아올린 그 키만큼
탑은 속절없이 스러리조
낮게 기어가느 강의 등줄기에
세월은 잔물견 몇 개를 그리다 만다
옛 사람 그러하듯이 나도
그 강을 건널 생각 버리고
저편 병산의 바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려니
몇 점 구름은 수줍은 듯 흩어지고
돌아갈 길을 줍는 황급한 마음이
강물에 텀벙거린다
병산에 와서 나는 병산을 잊어버리고
병산이 어디에 있느냐고 손사래를 치고 있다
*병산
경북 안동시 풍산면 회회 낙동강변의 산, 산허리에 병풍처럼 바위가 띠로 둘러져 있어 병산이라 일컫는다.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액서원 병산서원이 있다.
어느 날 종소리를 듣다 / 나호열
한 대 맞으면 속으로 불알 흔들어대며 요란 떠는 높은
망루가 아니라
묵직하게 어깨를 내리깔고 안으로 아픔을 감아올리는
우리나라 종소리는
이말 저말 다 버리고 그저 우물거리는 단 한마디 말씀뿐이어서
세음世音, 발자국 소리 멀리 물리친 뒤 적막 한 장 깔아 놓고 받아 적어야 하네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작은 산채처럼 날아가 버리고
때로는 나뭇잎 몇 장 떨구어지기도 하여
한번도 제대로 받아 적어보지 못하였지만
우우우 우웅 우웅 우우우 그 소리가 내 목덜미를 죄어와
네 새 치 혀를 내놓아라 으름장 놓는 것은 분명히 알겠네
43번 국도 / 나호열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지
이 길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길인지
물어보지 않지
이정표를 놓치고 길 잘못 들어 헤매일 때
바람보다 슬픈 노래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부딪치고 깨지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노래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의 길
이제는 눈감고도 훤히 끝이 보니는 길
천축天竺 / 나호열
모래 한 짐을 지고 천축으로 오른다
입춘 지나 내려오는 산객山客은
아직도 냉기 머금은 바람
고개 숙이며 어깨를 비키면
단 걸음에 그들은 어디로 가나
모래를 빼면 나는 무엇이 남을까
천축사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물 끊긴 계곡을 바람이 대신 흘러간다
산으로 오르는 사람은 있어도
내려가는 사람은 없다
산은 나무로 가득 찬다
산은 풍경소리로 산을 허문다
개심사 저쪽 / 나호열
제 나이만큼 굽은 소나무
길인 줄 알아 고개 돌리고
길은 어디로 가는 줄 알아
몇 번이나 몸을 튼다
한 구비 돌 때마다
뻐꾸기 울음 서럽고
배롱나무도 허물을 자꾸 벗는다
주먹을 폈다
오므리는
개심사 저쪽
오징어 / 나호열
바다 앞에 섰다
길게 늘어선 덕장 앞으로
푸른 잉크가 쏟아진다
내 몸을 감싸던
눈 밑에 눈물점을 없애야 해
먹물주머니 말라붙고
거꾸로 매달려 있다
머리라고 알고 있는
지느러미를 꿰뚫는 막대기에
거두절미하고 매달려 있다
오장육부를 덜어내고
이렇게 압축될 수도 있구나
흔들릴 때마다 해탈이다
주검 밑에 모래밭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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