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산은 산길로 다니지 않는다
새싹을 노래함
눈이 있는가
굳센 팔이 있는가
어디 힘차게 디딜 다리 힘이 있는가
견고한 땅을 밀어내며
얼굴을 내미는 새싹은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으로 말미암아 땅의 틈새가 벌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는
침묵을 조금씩 들어올려
이윽고 땅의 틈새로 하늘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눈먼 채로
벙어리인 채로
혼자 커가는 그리움처럼
그 자리
자북하게 민들레가 앉아 있던 자리
올해엔 개망초가 어깨동무 하고 있다
저 평화,
제 몸을 두드리는 이
그 누구 마다 않고 아픔을 되물어
치맛단 스치는 푸른 종소리
그 가슴 같다
편지를 읽다가 우렁우렁 날아들던 나비
울지 말아야지
흰 구름 오래 머무는 자리
이제는 토끼풀이 돋아날 차례이다
어느 봄날에 일어난 일
이파리 하나 달리지 않은
나뭇가지가
툭 하고 부러졌다
무엇인가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내 목 부러진다 하면서
그 무엇인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마네킹의 봄
이곳에 온 지 오래되었다
누가 나를 옮겨놓았는지
이 세상에
쇼 윈도우 안에
오른팔은 우아하게 펼쳐 가는 손가락마디에 구름이 잡히고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처럼
완 팔은 약간 기운 채로 힘겨워
그러나 박제된 웃음은 변함이 없어
흘러가는 저 수상한 강물
쌍심지를 켠 차량들과
어둠에 길들여진 눈빛
그 사이를 면벽하듯 바라본다
누군가 옷을 벗길 때
나는 전율한다
누군가 또 다른 기성품의 옷을 입힐 때
슬픔을 참을 수 없다
침을 삼키며 저 밖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
나의 알몸을 밀쳐내며
그 위에 덧칠되는 액세서리를 갈망하는 사람들
벚꽃 축제
나 생화야
생화야
살아 있어
잘 봐 떨어지고 있잖아
산화하면서
더 눈부신
더 빛이 나는
벚꽃나무 아래서
나는 불임의 꿈을 꾼다
가지치기
거미줄 같은
보이지 않는 숨결에도
불끈 솟구쳐 오르는 몸짓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살겨운 파도의 입술이 간지르는
비밀스런 창공의 치맛단을
가만히 잡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돋아오르는 날개
피 흘리도록 긁어대도 순 내미는 그리움은
가슴에 긋는 나이테의 지문으로 남는데
길가에 서서
매연에 온몸을 더럽히고
쿨럭거리는 기침을 참아내는 하루하루
그저 서있기만 하라는구나
손 뻗치지도 말고
온통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이파리가
시야를 가린다고 하는구나
표지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불임의 꿈을 잘라내는 저 길가의 비명들
트럭 가득히 실려 나가는
나무의 작은 꿈들
밤나무 이야기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있다
가부좌를 틀거나
반가사유半跏思惟의 모습으로
때로는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잘 나가는 봄철 그렇게 보내고
진득하게 온몸을 뒤트는 욕정의 이 냄새
코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가는 우리의 젊음도 저러했으리라
죄 짓고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처럼
가시 돋쳐 떨어지는 눈물을 가슴으로 받으니
앞산도 쿵쿵 뒷산도 쿵쿵
밤송이 하나가 적막을 울리는구나
가시 돋친 채 늙어가는 세월
스스로 몸을 열어 보여주는 침묵의 돌멩이
풀섶에 제멋대로 해탈하고 있구나
모란
목단이면 어떻고 모란이면 어쩔 것인가
첫날밤 퇴짜 맞은 새색시처럼
둥글다 못 해 뭉툭한 얼굴 가득
햇살이 듬뿍 내려앉는 것을 또 어쩔 것인가
거울 앞에서 처음 화장해 보는 쿵딱거리는 가슴이
자꾸 바람 앞으로 뛰어나오는 것을
치마끈으로 질끈 묶어본다 한들
초여름 잉잉거리는 벌과 나비가 전해주는 세상 소식에
귓불이 하염없이 붉어지는 영문을
멀찍이 헛기침하며 바라보는
아침
화무백일홍 花無百日紅
아, 꽃이 좋다
기쁨으로도 슬픔으로도
성냥불 하나 긋듯이
환해지는 이 순간을 위하여
완성을 향한 더딘 걸음이 세월을 용케 참고 견디었겠느냐
완성되자마자 소멸을 시작하는
내 삶의 절정은
꽃이 피었느냐
꽃이 졌느냐
홍도화 紅桃花
풍경 소리가 곱기로는
파계사 원통전이 으뜸이지
염불하다 인기척에 살짝
문 열어보다 눈빛 마주친
비구니 고무신 끄는 소리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나는 알겠다
그의 독백
삼일 동안 밥 굶고
장미를 바라본 적 있다
아름다운 붉은 장미
아름다움을 뜯어먹고
붉음을 집어삼키고
이윽고 장미는
빵이 되었다
국화에게
가을이 오면 꽃 피우는 줄 알았다
여린 팔 끝에 움켜쥔 손
펼치면 아무것도 아닌
속없는 꽃
바람 부는 길섶에선 볼 수가 없다
어디선가 무더기로 무더기로 팔려와
추모의 댓돌 위에
눈물 대신 꺾인 꽃
국화야
네가 피어야 가을이 온다
네가 웃어야 바람이 한결 낮아지고
네가 울어야 무서리가 진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눈 길
녹고 다시 얼어붙은 빙판길을
오늘은 내가 간다
네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잡았던
나뭇가지를 오늘은 내가 잡고
네가 뒤우뚱거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던 그 자리
나도 덩달아 미끄러지며
네가 힘들어하며 혼자 걸어갔던 눈길을
오늘은 내가 혼자 걸어간다
언제 우리가 손 한번 따스이 잡아보았던가
눈 몇 송이 눈물로 떨어지고
눈 몇 송이 꽃으로 피어나고
눈 내리는 밤
창 밖에 내리는 눈이
마음속으로 멀어진다
......솔직히
......저 눈이
돈다발이면 좋겠다
하염없이
그 어느 곳 가리지 않고
은총으로 흩뿌리는 돈다발
쌓인 눈은 또 언젠가는
다 녹아버리겠지
세상 사람들이 경배하는
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꿈의 백서
한 벌의 남루가
겨울을 깊게 잠재운다
길 없는 길
하늘에는 하늘이 없고 산
에는 산이 없다
오천 미터가 넘으면 거기부터는 신의 영역입니다
내려가라 하면 공손히 내려가야 하고
허락하지 않으면 결코 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에베레스트 팔천 미터 고봉 14개를 정복했다
신의 나라를 열네 번이나 다녀왔으면서도
그는 신을 만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풀도, 나무도, 새도 산 채로 거주할 수 없는 그 너머로
나는 나를 죽이며 간다
기어서 혹은 허공을 붙잡으면서
나를 뚫고 솟아오른 너를 향하여
산 길
갑자기 앞이 어두워진다. 한꺼번에 정적이 밀려오기 때 문이다. 날 목숨 한 마리가 제자리를 돌고 솟구치는 순간 눌려있던 풀들이 일제히 정적을 벤다.
문득 어깨가 좁아진다. 산 것들의 온기와 죽은 것들의 썩어가는 냄새가 사다리를 위로 올린다. 여전히 무거운 고개는 땅으로 처박히려고 기우뚱거린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산길이다. 똑바로 걸어왔다고, 눈 맑게 살아왔다고 믿고 온 길의 끝이 변방이다. 짐승만 도 못한 놈 같으니, 아무도 없는데 모난 돌멩이 하나가 비탈길을 험하게 구른다. 산은 산길로 다니지 않는다
밀렵시대
단지 다른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길을 택했을 뿐이다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만큼만 먹기를 원했을 뿐이다 내 목을 노리는, 내 뒷다리를 옭아매려는 덫들은 눈 속에, 이윽고 썩어가는 낙엽의 밑바닥에 열쇠처럼 숨겨져 있다. 한 발 잘못 내딛었을 뿐이다. 눈 뜨고도 찾지 못하는 맹목의 열쇠, 몸부림치며 물어뜯으며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온몸에 매달린 덫들 철컥거리며 바람에 나부낀다
아! 땅에 묶여버린 나무들 아름답다. 가을이면 바람을 불러
몸의 덫들을 해탈하는 나무
하늘을 여는 저 직립의 열쇠
물을 노래함
따로 집이 없으니 가출家出인가 출가出家인가 피한다고 피해지지 않는 바위를 만나면 산산이 부서져주고 그 울음을 들었으되 피 흘림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맹목인가 맹물인가 폭포, 개울, 내, 소, 강 그 숱한 이름이 얼마나 부질없느냐 하수를 만나면 하수가 되어 몸 섞고 들병이처럼 들병이처럼 옷고름에 손이 자주 가는구나 안개가 되어주마 흰 구름이 되어주마 결국은 바다에 모여 소금 으로 해탈하느니 오늘도 너를 향해간다 몸 낮추면서 넘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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