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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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에 관한 질문 2004

제 1 부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2. 27. 23:31

ㅣ제 1 부 ㅣ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수행修行 / 나호열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수치도 괴로움도 없이

물 흐르는 소리를 오래 듣거나

달구어진 인두를 다루는 일이었다

오늘 벗어 던진 허물에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때와 얼룩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함부로 팽개치지 않는 사람은

자동세탁기를 믿지 않는다

성급하게 때와 얼룩을 지우려고

자신의 허물을 빡빡하게 문지르지 않는다

마음으로 때를 지우고

마음으로 얼룩을 지운다

물은 그 때 비로소 내 마음을 데리고

때와 얼룩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빨랫줄에 걸려 있는 어제의 깃발들을 내리고

나는 다시 무릎을 꿇는다

때와 얼룩을 지웠다고 어제의 허물이

옷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의 아니게 구겨진 내 삶처럼

무늬들의 자리를 되찾기에는 또 한 번의

형벌이 남겨져 있다

쓸데없이 잡힌 시름처럼 주름은

뜨거운 다리미의 눌림 속에 퍼진다

내 살갗이 데이는 것처럼 마음으로 펴지 않으면

어제의 허물은 몇 개의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놓고 만다

부비고, 주무르고, 헹구고, 펴고, 누르고, 걸고

평생을 허물을 벗기 위해

오늘도 무릎 꿇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거울 앞에서 / 나호열 

 

 

맑은 시냇물을 본다는 것이 그만

나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

교회의 첨탑, 또는 굴뚝

아니면 구질구질한 골목으로 가득 찬 도시

권태에 길들여진 밤 고양이들의 붉은 눈

살을 태우는 연기들만이 승천하는

이곳, 이생에는 별 볼일이 없다는 듯이

흙탕물 속에는 미꾸라지 한 마리 없다

나를 빗겨 지나가는 세월의 굉음과

바람 없이도 스스로 떨어지는 그림자

거울을 본다는 것이 그만

이빨 빠진 그믐달을 들여다보고 있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

신기루를 지나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하여

걷고 또 걸으며 꽃 피우는 하루

나는 이정표를 믿지 않는다

 

 개 같은 날의 오후 / 나호열 

 

 

물끄러미 서로를 쳐다본다

끈끈한 눈빛으로

서로를 핥아준다

개가 되고 싶은 나와

사람이 되고 싶은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다

정해진 시간의 용변과

금욕을 강요받는 소량의 식사

공원에 갈 때는 천천히 걸어

적당히 꼬리 칠 줄 알고

두려움을 감추며

위엄있게 짓는 법은 기본이지

야성을 잃는 그는 안락을 얻었고

어느 위대한 시인은 말했다

꿈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고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백수의 꿈

나는 그에게 꿈을 가르친다

바닥에 꿈이라고 쓰여진 물그릇에

머리를 쳐박을 때마다 그는 문맹이면서

그는 꿈을 배운다

나는 개처럼 살고 싶다

혀를 끌끌 차면서

사람으로 살기가 너무 어렵다

 

 천국에 관한 비망록 / 나호열 

  -42.195km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옥을 통과해야만 한다

비록 이 길이 지옥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이 길이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태어난 곳으로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이 길이 죽음으로 완성되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너무 짧거나 아니면 너무 긴 이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

진다

동전 떨어지듯 상쾌한 햇빛을 밟으며

헤엄쳐 가거나 날아가거나

짙어지는 안개 속을 해쳐 나가기 위해서는

차라리 눈감고 뛰어가리라

지옥은 아름답다 그리고 풍요롭다

고통의 신음과 환희의 웃음소리가

꿀물처럼 갈증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사람아, 이윽고 내가 너에게 닿을 때

풀린 다리와 가쁜 숨과 땀내 가득한 한마디 말로

굳게 닫힌 천국의 문이 열리리라

기다림으로 황폐해진 정원, 그 가슴팍에

한 톨의 검은 씨앗으로 너의 가슴에 깊이 파묻히련다

산도 넘다 보면 강이 되더라

흘러가다 보면 강도 산이 되더라

 

화병 花甁 / 나호열 

 

 

결국은 시들어버린 꽃을 꽂기 위해

내공은 속을 텅 비워버리는 연습인 것이다

주둥이가 깨지고 몸이 금가고

그렇게 살다가 깨끗이 버려지는 것이다

결가부좌結跏趺座하고 장작불 고열 속에서

그대의 가슴 속에서 열반한 내 사랑

청자도 아니고 백자도 아니고

때깔도 곱지 못한 이 삶은

오롯이 당신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아직도 들끓는 피

아직도 너끈히 나무 한 그루 키워낼 수 있는

부푼 공기도

그대가 불어 넣어준 들숨이다

아! 바다를 넘고 산을 넘어서

그대의 가슴에 다시 돌아가기 위하여

풀씨 보다 더 가볍게 모래로 부서지려는

한 남자의 내공

 

 달팽이 / 나호열 

 

 한때는 달팽이를 비웃는 그런 날들이 있었지

세상은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겠나 하고

집 속에 틀어박혀 공상이나 일삼는 철학자처럼

머릿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이 무슨 필요 있느냐고

그러나 어느 날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

밥 굶고 신문에 이불삼아 노숙하는 사람이 나임을 알

았을 때

비록 구부리고 토끼잠을 잘 지언정 달팽이 네가 부러

웠다

집은 갈수록 멀어지고 겨울은 끝나 떠나가지 않을 듯

싶었다

 

러닝머신 앞에서 / 나호열 

 

 

 

그런 때가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어디론가 급히 떠나야 할 듯한 자세로

벅차오르는 가뿐 숨을 두 손으로 모두었던 그때가

거울 속으로 거울 속으로 바보같이 뛰어들어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던 그때가

보일 듯 말 듯 굽은 불혹의 언덕을 넘어

마음 밖 초여름 밤나무처럼 진득한 냄새를 풍기며

아직도 너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붕어빵 / 나호열 

 

 

  마주오는 칼바람을 밀칠 때마다 어둠은 두껍게 닥쳐

왔다. 안간힘을 쓰던 웅크린 낙엽이 머릿속을 구르더니

가슴 근처에서 차가운 칼 울음을 낸다. 살얼음이 낀 가슴

밑을 조심조심 내려가는 개울물의 손길 구멍난 바지 주

머니 안에서 천 원으로 남는다. 버스를 타면 오백 원이

남고 담배를 사면 남는 게 없다.

   저기 거세진 칼바람에 흔들리는 불빛 같은 사내가 서

잇다. 천 원 주고 붕어빵 네 개를 거스름으로 받고 나는

절로 배부르다. 내력을 알 수 없는 저 사내도 행복하리

라 붕어빵 한 마리가 입 속으로 들어간다. 토막잠 자는

경비 아저씨에게 나머니 붕어 세 마리 야참으로 드리니

그도 행복하다

  내 속에는 붕어가 산다. 붕어가 사는 너른 강이 얼어붙

은 몸 안에서 꿈틀거린다.

 

 

 

절   벽 / 나호열 

 

 

절벽을 뛰어내리는 일과

절벽을 기어오르는 일이

어느 것이 더 힘든 일인지 모르지만

눈 질끈 감고 뛰어내리면 삶은 순간에 끝나고

기를 쓰고 절벽을 기어오르는 삶은

오래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담쟁이나 나팔꽃 같은 넝쿨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올라가야 할 벽을 의식하는 한

그들은 항상 하늘을 우러러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은 조용히 썩어가야 하는

밀알이 되어야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 푸른 하늘을 경배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 세상의 모든 생일 / 나호열 

 

 

 

그날은 어땠을까

오늘같이 하늘 맑고 바람 선선한

가을날이었을까

비가 왔을까 모른다 나는

살만한지 아닌지

떨구어야 할 낙엽을 온몸으로 털어내면서

얼만큼 더 부끄러워져야 하는지

나그네 같은 흰 구름이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생일 축하해

아무 말 없이 식구들 다 나가고 마지막으로

나를 세워놓고 나온 아침

기다려주지 않는 세상으로 출근을 한다

고단하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그날은 어땠을까

한 여자는 그날 고통을 이겨내며 어머니가 되었고

그 여자는 할머니가 되어 오늘 가파른

대학병원 언덕길을 혼자 오른다

이 세상의 모든 생일을 여자들에게

짧은 기쁨과 긴 기도의 고통을 안겨준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오늘도 아이를 낳는다

 

 거 울 / 나호열 

 

 

거울 앞에 서면

벽이 보인다

속을 감추고

회색으로 덧칠한 시멘트 벽

웃어도 금이 가고

울어도 금이 간다

그 벽 위에

낙서 금지라고 쓴다

나에게 화를 내면서

나에게 낙서를 한다

 

/ 나호열 

 

 

 

슬프면 그는 웃는다

그는 기쁨을 배우지 못했다

그가 웃으면 슬프다

슬픔은 먼데로 가서

혼자 꽃을 피운다

봄은 수많은 그로 가득 찬다

 

 

 X-Ray  / 나호열 

 

 

 

  두순을 등 뒤로 돌려 잡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하나

둘 셋 아무 고통 없이 방사선은 가슴을 찍는다. 텅 빈 운

동장, 아침이면 비둘기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

살과 같이 내려와 땅을 쫄 때마다 공들이 탄력 있게 튀어

올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젊은 발ㅈ국을 남긴다. 나는

길을 버리고 담배꽁초와, 빈 소주병, 수상쩍은 휴지가 날

아다니는 스탠드를 밟으며 운동장을 건너간다. 질긴 생

명력을 가진 잡초들도 이곳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이

곳에 머무는 것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오랜 세월도 이곳

에서는 쌓이지 않는다. 간밤에 내린 장대비도 그 깊은 침

묵을 뚫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어둠이 복습

되지 않는 시간으 ㄹ덮어버리고 나는 무대의 한쪽 끝에서

저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배우처럼 한마디의 대사 없이

운동장을 건너간다. 물을 밟는 발자국 소리, 바람 속에

묻어나는 독주의 냄새, 한 장의 가슴 사진을 찍기 위하여

나는 전 생애를 걸어 이곳을 지난다.

 

 

오십 아들이 팔순 노모에게 / 나호열 

 

 

여자는 늙어가지만

어머니는 늙지 않는다

여자는 늙어가면서 아름다움을 잃지만

어머니는 아름다워 늙지 않는다

그런 당신에게 카네이션 한 송이 대신

논둑가에 자욱이 안개처럼 핀

자운영꽃을

가슴째 드린다

가슴을 드리니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은

구불한 길과

나지막한 하늘이 덩달아 배경을 이룬다

꽃 대신

웃음을

한아름 당신께 드리고 싶은 날

 

 

물을 끓이며 / 나호열 

 

 

목마를수록 물은 천천히 마셔야 하는 법이다

생의 갈증은 절망도 천천히 가라앉혀야 하는 법이다

주전자에서 물을 끓는 소리

말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침묵이 왜 금보다 귀한지 알 것 같다

수증기로 사라져버리는 말의 독

눅신거리는 말의 뼈를 바르고 난 뒤

조금씩 식혀 마시는 물맛은

오랜 세월 죽은 듯 살아온 노인의 흰 웃음처럼

향기를 뒤로 남기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