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평론

문학회 활동 어떻게 할 것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 7. 01:26

문학회 활동 어떻게 할 것인가?

                                                                                                                  나호열(시인)

 

 일간지 신년 첫 호에는 일제히 신춘문예 당선작품과 당선자를 발표한다. 신춘 新春은 말 그대로 새 봄, 그러니까 지금껏 접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작품과 작가를 뜻하기도 한다. 모처럼 겨울다운 겨울을 맞이하면서 폭설과 혹한에 생활의 불편을 겪을수록 봄에 대한 갈망은 그만큼 커지게 마련이다. 서양과 달리 동북아문화권에서는 신춘을 동지 冬至 이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상식이다. 추분이후 밤의 길이가 낮보다 조금씩 길어지다가 12월 22일 동지를 정점으로 다시 낮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어진다. 말하자면 신춘은 동지를 기점으로 해서 봄의 기운이 싹튼다는 의미인 것이다. 겨울을 거치지 않고 봄이 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혹한과 폭설은 봄을 맞이하기 위한 시련이면서 준비기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새롭게 등장하는 신춘의 작가들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각고 刻苦의 출발선에 서는 사람들인 것이다.

 

 성인 1인의 1년간 독서량이 1권이 되지 않는다는 나라에서 수 백 종의 문학잡지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서 배출되는 신인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방방곡곡에 시인, 작가를 꿈꾸며 원고지를 메우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통계적으로 볼 때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의 수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인 작가들의 평판은 압도적이지 못하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예전에 비해 중앙과 지방의 간격과 편차가 많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실상은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더 눈에 확연히 드러난다. 정보, 통신의 획기적 발전 속도와 개방성으로 볼 때 예술작업의 시.공간적 여건의 열악이 지방 예술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다.

 

  오히려 지방문학의 문제점은 지역적 폐쇄성,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스스로 담을 쌓고 애써 주류로 형성된 경향이나 변화에 무관심한데서 출발한다고 본다. 시류에 따라간다는 것이 좋은 일도 아니고 무조건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이미 용도폐기된 문학, 검증되지 않은 자기도취의 문학은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지방문학이 영영 사라져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이른바 서울을 중심으로하는 중앙의 문학이 세계적 보편성과 한국인의 특수한 상황에 반응하는 조류를 띄고 있다면 오히려 지방문학은 거기에 지역적 특수성과 개성을 드러내야 하는 과제를 하나 더 얹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만 문학의 창작은 개개인의 고통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오롯이 한 개인의 창의력과 기나긴 수련에서 빚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여럿이 모여 서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는 긴장의 관계를 갖는 것도 상호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특히 지역에서의 문학활동은 지역의 유관기관과의 협력과 지원의 관계 맺음에 있어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문학회의 활성화는 더욱 권장되어야 할 사항일지도 모른다.

 

  자, 힘들게 결성된 모임이라면 없애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든 잘 이끌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현대사회의 특성이기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개성도 강하고 타자의 말을 곱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하물며 글을 쓰는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다보니 모이기는 하되 개개인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한다거나 문학회의 활동방향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 보다는 친목 도모에 중점을 두게 되고 검증될 수도 없고 문제 삼지도 않는 작품들을 때에 맞춰 활자화하는 타성에 젖기 쉽다. 문학회의 끈끈한 유대감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구축되지 않으면 이루어내기 힘들다. 비판을 비난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따뜻한 격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과 배포가 없다면 처음부터 문학회라는 다증의 모임에 참여함에 신중한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는 더 이상 대중들의 우상도 아니고 존경의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신비감이 사라지고 없으며 장삼이사와 별다를 것이 없는 사고와 행동을 하며 글짓기를 명예와 돈벌이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대중들의 관심과 사랑을 기대하기 힘들다. 운전면허를 따고 장롱 속에 깊이 파묻어 두어도 년 수가 차면 무사고 운전면허증으로 교체해주는 것과 같이 시인 작가의 타이틀을 한 번 가지면 영원히 자신의 이름 앞에 붙어다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시를 쓸 때만이 시인이며 소설을 쓸 때만이 소설가이며 수필을 쓸 때만이 수필가이다. 물론 작품과 작품 사이의 기간은 숙고와 참혹하리만큼 자기반성의 아픔을 견디어내면서 새 생명을 잉태하는 준비기간, 신춘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자세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신체가 건강하여야 정신의 강건함이 따라오고 생활이 안정되어야 세상과 인간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이 창작활동에 반드시 긍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글쓰기란 극도의 정신적 긴장과 예민함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에 일상에 함몰되어서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채집하기 힘들다.

 

 문학회 활동은 바로 한 개인인 창작자가 빠지게 되는 일상의 나태와 상상력의 고갈을 막고 회원 간의 견제와 자극, 나아가서 공통 과제에 대한 다양성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이 아닌 문학의 평가는 독자의 몫일 뿐이다. 세간의 비평에 귀를 세우고 대중들의 기호에 연연해서는 시인, 작가로서의 생명을 잃게 마련이다. 굳이 좋은 작품이 무엇인가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나 그 작품 속에 독자들이 풍덩 빠져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도록 놔두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작품의 화자 話者가 독자가 되는 작품은 오래오래 여운이 남을 것이라는 말이다.

 

  문학회는 분명하게 자신들이 도달해야할 목적지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 또한 분명히 표현해야 한다. 회원 각자, 서로가 화자가 되고 독자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멘토가 되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터를 만들어야 한다.

華而不侈 儉而不陋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아니하고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음)는 백제문화를 요약한 말이라고 한다. 그 어느 때보다 문학을 하는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구이기도 하다.

 

                                                                                           『소요문학』 2011년 1,2 월 권두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