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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의 크리스마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0. 12. 21. 21:46

무신론자의 크리스마스

 

                                                                                                                                                                                    송호근 서울대 교수 사회학

 

 

사찰의 풍경소리, 성당 종소리가

찬반을 대동한 논리로 들려오면

명징한 이성에 기댄 무신론자의

편견이나 오만과 무엇이 다르랴

 

 

 한 해를 마감하는 이 계절이 되면 무신론자들은 조금 외로워진다. 의지할 곳 없이 달려 왔던 세월이 높고 시퍼런 파도가 되어 언제나 실눈을 뜨고 있는 이성의 촛불을 덮칠 기세로 달려들기 때문이다. 험하고 가파른 세상을 살아가면서 오직 자신의 신경세포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수면을 취해줘야 명징을 유지하는 그 연약한 의식의 언약에 매달려야 하는 무신론자에게 이 계절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크리스마스는 일종의 축복처럼 보인다. 주변의 친지들과 낯선 사람들이 까닭 없는 성령의 강림에 감사하고 거듭난 표정으로 당당히 현실에 나서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성(聖)의 영역에 살짝 몸을 담그고 속(俗)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느긋한 일인가. 그러나 속(俗)의 세계에서 성(聖)을 만들어보려는 무신론자들은 속(俗)을 감싸는 ‘거룩한 천개’를 상정하는 일 자체가 불편한 것이다. 이 불편함을 명징한 의식으로 마주하는 것, 고독한 독립자의 자긍심이야말로 무신론자들의 종교다. 무신론은 그 항시적 고독에도 불구하고 속(俗)에서 성(聖)이 가능한지를 묻는다. 정신의 건강한 독립성, 이성의 부단한 갱신으로 정치와 사회, 인생의 대소사, 그리고 자신의 희로애락의 본질까지를 파헤치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든 언론이든 특정 종교에 대해 어떤 발언을 하는 것은 국립묘역에서 인민항쟁가를 불러젖히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다. 다종교사회인 한국에서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작금에 발생한 정치·종교 간 작은 분란을 무신론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은 욕심이 불쑥 솟는 것은 차별 없이 모든 인간에게 내려앉는 성령이 더욱 충만해지는 이 계절 탓이다. 조계종과 천주교 사태는 본질이 다른 사건이다. 조계종의 분노는 정권의 개신교 우선주의에 대한 항의 표시이고, 천주교의 내홍은 본질적으론 내부 문제이지만 ‘4대 강’이란 국책사업을 두고 벌어진 사건이기에 정권의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정권의 종교편향적 태도는 정권 초기부터 불심(佛心)을 자극하기는 했다. 총무원장 검문 사태가 발생하자 수도 서울을 ‘주님께 봉헌’했던 그 시청 앞 광장에서 2008년 범불교대회를 개최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정권의 실수는 그치지 않았다. 교통지도에서 사찰명 삭제, 봉은사 외압 의혹을 거쳐 템플스테이 예산 묵살 사태에 이르자 조계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급기야 ‘108배 참회발원 정진 100일 결사’, 즉 불교식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다. 기존의 ‘4대 강 반대’라는 플랫폼에다 ‘민족문화 말살과 종교편향’이라는 키워드를 부가시켰다. ‘4대 강은 전문가의 영역’이란 발언으로 추기경이 곤욕을 치른 천주교보다 조계종이 훨씬 할 말이 많아 보인다. 독재시대 등불이었던 정의구현사제단은 밝아진 이 시대에도 정의의 칼날을 휘두르는 정치적·사회적 규찰대로 남았다.

 

국민의 23%(불교)와 11%(천주교)를 신자로 거느린 대표적인 종교와 대립각을 세워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현 정권도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럼에도 사태가 이렇게 진전된 것은 정권의 종교적 협심증 탓임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시대처럼 어떤 조직적 탄압이 있었다기보다 무의식적·배타적 몰입이 사태를 꼬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공공연한 종교탄압이 아니라면, 대응 방식은 조금 달라야 한다는 게 무신론자인 필자의 생각이다. ‘정부와 여당 의원들의 사찰 출입 전면금지’라든가, ‘노골적으로 정부를 편들어야만 하는 남모르는 고충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는 등의 발언은 속세의 투쟁 언어다. 성(聖)의 양식으로 속(俗)을 구제하는 종교의 본질에 어긋나는 말이자, 종교를 시민단체와 동일시하는 자기 폄하의 표현이다. 돈오(頓悟)의 세계엔 ‘금지나 거부’와 같은 단정적 어휘가 있을 것 같지 않고 성령의 은총 속에는 비아냥거림이 없을 듯해서 하는 말이다.

 

키워드 중의 하나인 ‘4대 강’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참여라면 시민단체와는 다른 종교적 양식이 필요하다. 국책사업에 대해 굳이 입장을 표명한다면 ‘성(聖)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4대 강’을 포함해서 여타의 정책사업들은 이성적 판단 영역에 속한다. 국민의 47%에 달하는 무신앙자들도 정치적·사회적 쟁점에 대해 나름대로의 예리한 감각을 갖고 있으며, 단지 대변할 조직이 없기에 침묵하고 있을 따름이다. 무신앙자 종단의 성명서가 있다면 그럴 것이다. 다윈 이후, 진리의 횃불은 종교에서 과학으로 넘어갔다. 적어도 이 시대의 무신론자에겐 그렇게 보인다. 종교는 신(神)의 언어로 진리를 좇는 자의 고독을, 실눈 뜬 자의 두려움을 감싸는 천상의 목소리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찰의 풍경소리가, 성당의 종소리가 찬반을 대동한 논리와 윤리로 들려오는 순간, 자신의 명징한 이성에 기댄 무신론자의 편견이나 오만과 무엇이 다르랴.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이 계절에 무신론자들이 성령과 돈오의 세계로 망명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은 편견과 오만에서 잠시라도 해방되고 싶은 까닭이다.

 

[중앙일보] 입력 2010.12.21 00:27 / 수정 2010.12.21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