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청문회 / 나호열
조금 더러운 사람이
많이 더러운 사람을 야단칩니다
좀더 깨끗해질 수 없냐고
못생긴 사람이
좀더 못난 사람을 비웃습니다
좀더 아름다워질 수 없냐고,
오글오글 떠드는 모습이
우물 안의 개구리 같습니다
가을 病 / 나호열
그예 불덩이같은 짐승을 산으로 놓아 보냈습니다
허물을 벗어던지고 맞이하는 이 병은
애꿎은 산 하나만 태우고 맙니다
두 눈 부릅떠도 보이지 않던 길
붉게 혼자 물들어
떨어지지 않는 가슴을 지나
먼 마을로 내려 갑니다
불길 그 자리에 놓아 두고
흩뿌리는 찬 비도 그 자리에 놓아 두고
침묵을 껴 입는 나무들이
풍경소리를 내며
온몸을 젖게 합니다
산이 제 몸을 비워내기 위하여
북 울리듯 큰 이름 부르기위하여
몸을 뒤척일 때 마다
가을은 한층 깊어갑니다
결국 나는 몇 장의 바람을
더 묶어 놓았을 뿐 입니다
눈으로 보이지 않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겨우 완성 했을 뿐 입니다
가을 음악회 / 나호열
열 네 살인가 다섯인가 그 때 부터 시작된 가을이 여태 계속되고 있어요
집은 불타고 말없이 종적 감추신 아버지 아직도 소식 주시지 않고
그 해 가을 학교 강당에서는 음악회가 열렸어요
브라스밴드가 경쾌한 페르시안 마켓을 연주할 때
맨 뒷자리 높은 곳에서 큰 북을 둥둥 울렸던 것이 바로 나였어요
가보지 않은 페르시아의 시장과 이국인들의 활기찬 발걸음
인생의기쁨과 즐거움을 노래하듯이
가볍게 햇살을 퉁겨내듯이
한 손으로 북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마지막 장단을 골라내었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내는 것이었어요
그 다음 차례는 독창이었는데 그 연주자도 바로 나였어요
오가며 그 집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띨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자리에 서졌습니다
불 타 버린 우리집,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는 그 집에 갈 수 없어
평생을 마음 속에서 서성거린 그 집 앞을
왜 나의목소리는 그렇게 슬퍼질 수 밖에 없었는지요
아까보다 더 큰 환호는 왜 스산한 귀뚜라미 울음으로 내게 들려 왔는지요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형제들과 함께 즐겁게 언덕길을 내려갔는데요
지금까지 그렇게 큰 무대에 서 본 적도 없었는데요
우리 엄마는요 그 시간에 술시중 드는 주모였는데요
젓가락 두드리며 창가 부르는 색시들 닥달하는 주모였는데요
지금도 그 가을 밤은 끝나지 않고 페르시안 마켓과 그 집 앞과
귀뚜라미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와 윙윙대는 바람소리만
완성되지 않은 악보에 헝크러져 있는데요
가을 호수 / 나호열
나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그리움의 들 물길이
외로움의 날 물길보다
깊어
나
이제
어디로든 갈 수 없습니다
길이 없어
흰 구름만이 철새처럼
발자국을 남기고
눈도 씻고 가는 곳
당신의 얼굴
가득히 담아
바람은 가끔
물결을 일렁이게 하지만
당신이 놓아준
작은 숨결들을
속으로만 키우는 기쁨입니다
나
이제
가을 호수가 되었습니다
당신만을 비추는
손바닥만한
거울이 되었습니다
한 시간의 가을 / 나호열
환청이 심하다
한 시간만 기다릴꺼야
물 흐르는 소리
낮게 땅거미 내리는 목소리가
도처에 덫을 놓는다
어디쯤인지
한 시간 안에 나는
얼만큼 갈 수 있는 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인지
정적이 깊은 숲 속의 오두막인지
벌써 날은 저물어 가는데
고개 마루는 멀고 또 멀다
터벅거리며 걷다가
뛰기 시작한다
푸른 잎들은 붉은 세월 속을 통과하면서
무게를 버리고
온몸은 허공으로 휘어질 듯 팽팽해진다
이윽고 나는 새가 되기로 한다
벌거숭이로는 걸을 수 없어
봄이 오기 전까지
하늘에 머무르는 나무가 되기로 한다
가을의 기도 / 나호열
그래서는 안되는데 그만
그 열매를 삼켜버렸다
눈물은 안으로 잠길수록
단단하게 여무는 씨앗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여
내가 그대의 몸으로 들어가
흙이 되고
그 흙이 다시 움터오를 그 날까지
이 햇볕 짱짱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시월의 장미 / 나호열
고고하다
시월의 장미
시들어 버리지는 않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찬 바람을 맞으며
뚝뚝 떨구어내는
선혈
붉음이 사라지고
장미꽃이 남는다
내 너를 위하여
담배를 피어주마
야윈 네 가시를 안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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