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김영월의 시>사라짐, 아름다운 흔적의 길 찾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17. 19:47

사라짐, 아름다운 흔적의 길 찾기

              - 김영월의 시집 <나무를 클릭하다>를 중심으로     


                                1.

  김영월은 수필가이면서 시인이다. 먼저 수필가로 등단하고 난 후에 다시 시인으로 거듭난 사람인 것이다. 산문의 풍경과 시의 풍경은 태생부터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참으로 경외스럽다. 그의 산문은 시처럼 압축미를 지니고 있고, 그의 시는 산문처럼 이야기가 솔솔 풀려나온다. 수 십 년을 시 하나에 매달려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하고 있는 나와 그를 비교하면 더욱 더 그렇다. 수필집을 내고, 시집도 발간한 바도 있는 그는 얼마 전 <문학의 즐거움>이라는 문학 사이트에 입주해서 같은 입주민으로서 그의 작품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아졌다. 그의 작품들은 경쾌한 발걸음과 감각을 지니고 있어서 작품만을 놓고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는 매우 어렵다. 동년배이면서도 그는 왕성한 창작욕과 능력으로 현대사회의 여러 징후들을 끄집어 내는데 탁월한 솜씨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던 터에 시집 <나무에서 클릭하다>의 발문을 쓰게까지 되었으니 이만한 기쁨이 또 어디 있으랴!

 <나무에서 클릭하다> 시집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김영월의 이번 시집의 화두는 단연코 자연을 핍박하고, 자연을 인간에게 무릎 꿇리므로서 결국에는 자연에게 소외 당하고마는 현대인의 고독이다. 또 한편에서는 인간의 물적 욕망을 최대한 부풀려 인간성을 소진시키는 자본주의에 함몰되어 버리는 자아의 절규를 들려줌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자연 그대로 살아갈 수 없는 삶을 인식하고, 그 삶이 마음 편하게 두 다리 뻗을 수 있기 바라는 그의 희망은 힘겹게 한 시대를 해체고 건너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노래이다.

  옛날 같으면 한참 일할 나이에 <쉰 세대>로 낙인찍혀 사회로부터 사라짐을 강요받는 일은 더 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그러한 현상은 일상화 되어버려 울분조차 일어나지 않도록 족쇄가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숨차게 달려와 이제는 숨을 고르고 인생의 의미를 찬찬히 음미해야 할 나이에 이르기도 전에 사회의 바깥으로 내몰리는 그 와류의 중심에서 <느림>에 대한 아름다움과 <변화하지 않음>의 미덕을 체득한 노래들이 김영월의 이번 시집에 질펀하게 깔려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김영월의 노래들은 회한이나 영탄에 빠지지 않고 객관적인 리얼리스트의 시각을 한결같이 유지하므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반성과 자각의 길로 들어설 수 있게끔 하여준다.

   

 2.

 나는 김영월이 사진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일 뿐이다. 한 때 나는 시인의 할 일이란 사진과 같이 하나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제시해줌으로서 독자들이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폭발시키고 그 상상력의 폭발에서 빚어지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것 일 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현대 한국문학사의 중심 축을 이루었던 순수와 참여의 논쟁선상에서 아무리 급박한 현실의 계몽성이 요구된다 하더리도 결국 시는 언어의 미적 형식을 갖추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이 오늘날에도 유효함을 기억한다면 시로서 이루어지는 메시지란 결국은 이미지라는 등식으로 치환될 수 잇는 것 아닌가? 

 시인은 언어의 궁전을 찾아 헤매는 자이다. 언어의 궁전을 찾아 이미지에 딱 맞는 희귀한 언어의 보석을 취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시인이 의미에 매달릴 때 그 시는 빛깔과 향기를 잃어버린다. 시인이 이미지에 눈길을 줄 때 시는 곧잘 난해의 함정에 빠져버린다. 그러므로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쓸 때 마다 '시란 무엇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를 되물어야 한다. 시인은 이와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므로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격을 다듬고 세상에 대한 맑은 눈을 키워나갈 수 있다. 다시 이야기를 되돌려 보면 김영월은 이번 시집에서 스냅사진과 같은 순간 포착을 시작의 기법으로 채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시인이 퍼스나를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시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기도 하는 것인데 김영월은 시의적절하면서도 자유스럽게 퍼스나를 변환시키므로서 시를 감칠 맛 나게 가꾸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제 그의 시 몇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김영월은 작자 서문에서 '<느림>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고 하였다. 이 말은 뒤바꿔 말하면 그가 신속과 변화를 주종으로 하는 오늘날의 삶에서 뒤쳐저 버렸거나 아니면 스스로 비껴나 있음을 표명한 것이라 보여지며, 그와 동시에 변화의 덧없음과 변화 속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의 본질에 눈을 돌리고 있음을 뜻한다. 멈추지는 않으나 보폭을 줄인 삶은 자연스럽게 서구의 과학문명에 대비되는 동양의 자연순응적인 삶의 태도와 결부되어진다.

 시집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지상의 사라지는 모든 것들> 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한 편의 명시를 남기기 위해

이제 단풍잎은 고운 몸짓으로

어디론가 사라짐으로 완성해야 하는

마지막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소슬바람 불어닥쳐

잎새들 우우우...휘날릴 때

미루나무 가치 한 쌍

그동안 정들었노라고

목이 메어 울고 있습니다


다정히 함께 하던 그대들도

오늘은 낙엽 따라 가는지

한 명, 두 명, 세 명....거짓말처럼

눈 앞에서 영영 멀어져 갑니다


단풍잎, 단풍잎

다시 숲을 태울 때

사.라.짐 그 한 편의 명시 앞에

나는 발길을 옮기지 못합니다.


                            - 「지상의 사라지는 모든 것들」전문



이 시는 명시, 단풍잎과 같은 명사와 사라짐, 떠남, 멀어짐, 옮김과 같은 소멸을 향한 행동태로 이루어져 있다. 명시란 무엇인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불멸인, 보편타당성을 가진 진리와 같은 것이다. 시인의 눈에 시는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다. '사라짐으로 완성되는' 자연의 섭리 그 자체가 시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그러한 자연의 현상을 읽고 복사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단풍잎이 숲을 태우는 사라짐'의 현상은 또다른 봄을 향한 복원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명시란 사라지는 아픔의 과정을 통과하되, 쉽사리 자리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이익에 따라, 환경을 따라 이리저리 부유하는 '나'는 진리의 부동성 앞에 한걸음도 옮겨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우리는 사라짐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 뒤에 숨은 부동의 법칙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라짐으로서 완성되는, 또는 사라짐 그 자체가 명시인 그 현존재는 무엇인가?

'21세기 최악의 참사가 빚어진 미국의 뉴욕'- 「나팔꽃」부분, '피의 화요일, 뉴욕의 하늘은 시치미를 뚝 뗀체 맑고 푸르렀다... 한 편의 영화같은 현실 앞에... 생매장되고, 항공기의 승객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 「사탄 위에 인간이 있다」 일부분, '서울 88고속도로에서 새벽 20대 네 명이 과속으로 달리다가...전원 사망했다고 한다...'- 「땡감」일부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경악스럽고, 폭력적인 사라짐앞에 놓여진 것이 오늘 우리들이 모습이다. 폭력에 의한, 광란에 의한 사라짐과 단풍잎이 숲을 태우며 사라지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놓여져 있다. 無爲의 자연은 사라지되, 사라짐 속에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지만, 有爲로 말미암은 인간의 욕망과 제도는 회생불가능한 파괴만이 있을 따름이다.

'지하철역 8번 입구로 들어갔다가/연어가 모천으로 돌아오듯/하루의 삶을 탕진하고/다시 8번 출구로 나왔다 - 환절기 일부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무의미한 삶의 반복은 '어디서든 내 살점을 노리는 칼들이 번득인다/ 언젠가 나는 앙상한 뼈만 남아 풀썩.....땅바닥에 스러지고 말리라' - 「칼」 일부분 와 같은 불안과 끊임없는 자아의 소모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경멸스럽다.

이와 같은 일그러진 우리들의 모습은 김영월 시편이 곳곳에서 산견된다. 인터넷의 환영에 빠진 삶을 그린 「인터넷 세상」, 0.1 평의 공간에서 하루종일 도장을 파는 「벽 속의 남자,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이 유일한 휴식시간인 「도시의 샐러리맨」, 고층 빌딩의 유리를 닦는 것이 아니라 투신자살 하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닦는 노래인 「삶」등 유령처럼 펄럭이는 우리들이 자화상을 폴라로이드 즉석사진처럼 우리에게 신속하게 보여준다. 그 밖에도 「출근길의 군병들」,「 무덤 앞에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등 시 제목을 보아도 암울함을 느낄 수 있는 현대인의 우울이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김영월에 의해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현실은 몇 달 전에 TV 보도를 통해서 알려진 팔레스타인 소년의 비극적인 최후를 그린 「전쟁」이라는 시를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담장 밑 쓰레기통 옆에서 간신히 몸을 피하고 있다. 이스라엘 군인의 빗발치는 총탄에 거의 그들은 사색이 된 표정이다.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열두살 아들은 오히려 겁 많은 아버지를 위로한다.

아빠 두려워 말아요

구급차가 달려와 우릴 구원할 거에요.

 

 결국 아들은 총탄에 널브러지고 아버지는 구급차에 실려갔다.

 소년의 가슴을 겨눈 인류의 양심이 메마른 땅에 홍건한 핏물로 흐른다

                            - 「전쟁」전문


21세기가 되면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하여 화해와 평화가 가득할 것이라고 기원하던 우리 앞에 110층 빌딩이 폭파되고, 종교와 민족을 앞세우고, 정의를 부르짖으며 수 백만 달러 짜리 미사일이, 백색가루 탄저균이 무차별하게 살상을 불러일으키는 현실 앞에 인류의 존엄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그래서 '소년의 가슴을 겨눈 것은 이스라엘 병사의 총구가 아니라 인류의 양심인 것이며 메마른 땅을 적시는 빗물이 아니라 핏물인 것이다. 이러한 무수한 덧없이 사라짐은 만물의 영장인 인류의 필연적인 멸종을 예고하는 것이며, 반자연적인 광란에 의한 결과이다. 

 김영월은 이와같은 덧없는 현실의 단면을 스케치하듯 그려내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전율하게 만든다. 스스로 전율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섣부른 話者의 주장을 접어두고 독자들의 조용한 반성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앞서서 나는 '한 때 시인의 할 일이란 사진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했다. 이쯤에서 나는 그런 나의 주장을 변경하고자 한다. 「전쟁」이란 시를 다시 상기해 보자. 시인은 영상으로 보여진 팔레스타인 소년의 죽음을 그려내었다. 시인은 극도로 개인적 정서를 억제했다. 기껏해야 '소년의 가슴을 겨눈 것은 인류의 양심이었다' 라는 짧은 경구 하나를 들려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문자에 의한 표현은 영상매체의 생생한 현장감에는 도저히 이를 수 없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하여 비춰진 웅크린 한 소년의 길지 않은 죽음의 과정은 매우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 후에 재현된 문자의 메시지는 영상으로 나타난 것에 비하면 그 모사력은 한계에 이르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러한 참상을 목도하는 소시민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끊임없는 토악질과 삶의 권태가 오히려 시를 읽으므로서 더욱 짙어진다면 차라리 시를 읽지 않음이 옳지 않겠는가? 시인은 이제 독자들에게 세상의 여러 현상을 보여주고, 계몽하는 역할을 벗어 던지고, 존재의 내면을 뚫고 들어가 존재의 내면을 관류하는 맑은 물빛을 길어올려주고, 밤하늘에 빛나는 영롱한 별빛을 영탄하는 법을 알려 주어야 한다. 시인의 주장대로 느림과 사라짐의 운명을 음미하면서 사라짐의 미학을 구현하기 위한 몸짓을 시인은 언어의 조탁을 통해서 들어내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정적 복고주의로 회귀하자는 얘기로 들릴 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언어의 정련을 통한 서정을 바탕으로 하는 무위자연의 이치에 따라 순행하는 생명의 이치를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시인은 이미 사라짐을 통해서 완성되는 사랑으로 정의하지 않았는가?


3.


김영월의 이번 시집이 건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증거를 굳이 열거하라면 인간 존재의 근거를 확인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생략하거나 뛰어넘지 않고 천천히 감내하면서 한 편의 시가 구비해야 할 서정성과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풀어놓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다. 1.2부에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들, 이를테면 급속한 정보화가 가져오는 현실과 환상의 허물어진 경계와 페쇄적이고 단자화된-창없는 모나드와 같은-개인, 물질에 예속된 욕망의 포로가 되어 버린 황금만능주의, 목적보다 방법이 우선되는 결과론적 윤리설의 우세, 패권주의적 세계주의에 함몰되는 세계 시민에게 불어닥친 전쟁과 기아의 공포는 결코 김영월 시세게의 종착역이 아니다. 그의 시는 거대한 도시의 내면 곳곳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철책으로 둘러쌓인 휴전선과 평양을 넘나들기도 하고, 북한강으로, 무등산으로 보성 녹차밭으로 더 나아가서 남미 페루의 미추파추, 아마존, 이과수 폭포, 미국의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기도 한다. 정처없이 보이는 그의 도정은 필시 따뜻하고,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평화로운 사랑의 품안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 시집의 1, 2부가 냉엄한 현실의 묵시록이라면, 4부는 그의 다양한 여행 체험을 담은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행이란, 시인에게 있어서는 그저 놀고 마시는 소비적 관광 행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고, 스스로 외로워지면서 스스로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면서 섬광같은 세계에의 직관을 얻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이 여행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며, 詩作에의 욕망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하고 몇 줄의 기록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이러한 여행 시편들은 이제 관습화되고 유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전략이나 기법도 많이 노출된 편이어서 웬만해서는 완숙한 시의 생산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김영월의 시편들 중에서 4부에 수록된 여행시들에서는 시적인 흥취나 만족을 갖기 어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병의 포도주가 생산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의 숙성이 필요하듯, 스쳐 지나가는 그 어느 곳의 인상은 단상의 편린으로 남아 내 삶과 삼투되고 깊이 우러나는 예지의 눈빛을 갖추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좋은 여행시는 기억의 창고에 오래 묵혀 두었다가 불현듯 오늘의 삶에 문신처럼 각인되는 추억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시집『나무에서 클릭하다』의 진수는 3부에 집중적으로 포진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영월의 시적 성취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스타일리스트의 눈빛에 있지도 않고, 방랑자의 피폐한 낭만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섣불리 사랑을 이야기하지도 않으며, 그리움을 배설하지도 않는다. 아주 조금씩 그는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내비추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성경의 가르침이나 동양의 老莊哲學을 생경하게 뱉어내지 않는다. 체화되지 않은 휴머니즘을 가장하지 않고 소화되지 않은 이상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이제는 고물처럼,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과거의 유물처럼 보이는 서정의 한가운데 그가 서 있을 때, 그는 석가가 되고, 노자가 되며, 장자가 된다. 그는 함부로 愛人을 주장하지 않는다. 김영월 시의 진경은 바로 여기에 있다.


- 이 세상에는 미워해야 하는 것 보다 사랑해야 할 것이  훨씬 많다!


그가 멀찌감치 이 세상을 비껴보는 것 보다 이 세상의 어느 한 곳에 머물며 그에게 다가오는 대상과 눈맞추는 모습이야말로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시을 읽는 그윽한 경지를 열어준다는 사실을 몇 편의 시를 인용하면서 확인해 보고 싶다.

<맨발로 걷고 싶다>라는, 어찌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시인의 목소리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인공의 허울을 단숨에 벗어 던지는 외침이다. 누가 아스팔트를, 무슨 목적으로 흙을 은페하는 수단으로 자연의 숨통을 덮어 놓았는가? 누가, 그 무엇이 무슨 목적으로 무좀으로 근질거리는 우리의 발가락을 구두에 감춰 놓았는가? '가끔 구두와 양말을 벗어 던지고/미개인처럼 나는/도심을 행보하고 싶다 - 「맨 발로 걷고 싶다」마지막 연

시인은 묻는다. 미개인의 정의는 무엇인가? 맹목적인 삶에 길들여진다는 것이 사실은 미개인이 아닌가? 차가 없으면, 전기가 없으면, 옷이 없으면 꼼짝할 수 없는 현대인이 사실은 미개인이 아닌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았던 원시인이 미개인이라고 그 누구의 잣대로 제멋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어느 시인은 전국의 비닷가 섬마을을 찾아 다니며 시를 쓴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멀리 안가도 이미 섬에 살고 있다.  딸은 제 방에서 핸드폰을 벗삼아 심야통화 중이고, 아들은 인터넷 세계에 들어가 있고, 아내는 성경 읽기에 열중이고, 나는 시를 쓰고 있다.

 

 모두들 방문을 잠구고 자신만의 섬을 향해 노저어 가고 있다.


                                                 -「섬」전문


위의 시에서 가족은, 열심히 자신의 할 일을 하는, 그래서 서로 간섭받기 싫어하는, 충분하고도 열심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아버지는 열심히 돈 벌고, 어머니는 열심히 집안 살림하고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각자의 방에서 자신만이 갇힐 수 있는 섬을 향하여 노저어 가는 행위야말로 미개인이 아닌가?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중산층이라 스스로 자부하던 많은 가정이 와르르 무너지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협동과 대화의 즐거움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현상이 개화의 상태라고 감히 항변할 수 있는가?


모두가 떠나간

썰렁한 무대에서

흘러간 노래를 부르는

무명가수처럼

그러나, 최선을 다해 그는

열창을 한다


       -「철 지난 매미는 열창을」마지막 연


가을도 한참 깊어 가는 어느 날 산 속에 화자는 매미 울음을 듣는다. 그 매미는 참 멍청한 매미다. 그러나 그 매미는 자신의 생명에 주어진 울음의 코드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 매미를 비웃을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맹자는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은 인간만이 仁義를 안다는 점에 있다고 하였다. 인의를 저버린 행위야말로 미개인이 아닌가? 김영월은 이와같이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이 세상의 이치를 절묘한 비유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의 시를 더 읽어 보자.


500년 된 은행나무

다시금 한 해를 마감하는 길목에

501년째의 노란 허물을 벗고 있다


사람은 늙을수록 추한 빛깔이지만

나무는 태초의 모습대로

손을 흔들 뿐이다


나무에게 나이를 먹는 일은

조금도 슬프지 않다

더욱 믿음직스럽고

더욱 사려깊은 얼굴로 변한다


                       「고목」 전문


인간은 기껏 살아야 백년을 넘기기 힘들다. 나이 들수록 허리는 구부정해지고 검버섯이 피고 피부는 쭈글해지고, 눈은 광채를 잃는다. 치매나 풍증에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고, 부양가족이 없으면 그나마의 삶도 지탱하기 어렵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한 그루의 나무가 천 년을 그 자리에 버티어 서서 생명의 경외를 온몸으로 보여줄 때 고개 수그리지 않을 사람 그 누구인가!

몇 년 전 우이동 자락에 몇 백년 된 나무를 베어내고  아파트를 지으려던 건설업체에 맞서서 단식 농성을 하고 텐트 생활을 하면서 끝내 그 나무를 지켜낸 환경운동가를 기억한다. 돈으로 이 세상의 척도를 재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나무 한 그루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 나무는 자신의 온몸으로 자연과 생명의 경건함을 수 천 권의 책을 대신하는 경전이다. 그 경전을 읽어낼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는 어떤 자세와 마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를 「고목」은 이야기 해준다.


4.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無爲自然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힘을 가해서 본질을 왜곡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여타의 原動者를 갖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지금 편향된 인간의 잣대로 베이컨이 지적한 바 대로 종족의 우상idola 속에 살고 있다. 이성의 힘을 빌어 문명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자연에의 학대는 자연을 불임의 상태로 내몰 뿐 만 아니라 인간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미움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자이다. 김영월은 자신의 삶 속에서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잠시 사라지기는 하되, 또 다른 내일을 잉태하는 사라짐은 사라짐이 아니다. 김영월의 시쓰기는 사라져 버린 것들을 발굴해 내어, 그 흔적을 희망의 징표로 우리에게 되돌려 주고자 하는 열망과 맞닿아 있다. 이제 그는 바깥으로 향하여 있던 렌즈를 그의 내면으로 깊숙이 찔러 넣어 역동적인 존재의 불가사의한 힘을 그려내는 일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가 천명한바 대로 느림의 미학을 통해서 존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강과 바다를, 드넓은 하늘의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 그에게 필요하다.

짧지만 그의 새로운 출발을 기약해 주는 佳篇을 글의 말미에 붙여 둔다.


도시의 뿌우연 매연

축농증 환자처럼 지내다가

이게 무슨 내음일까

닫혔던 영혼이 문을 두드리고

누가 날 부르는 듯

타고 있던 버스에서 내려

한없이 이끌려 가고 싶다

아스라한 고향의 언덕이 나타난다


이런 한 순간이 있어

나는 다시 살고 싶다

그리고 시를 쓰고 싶다


                                  「밤꽃」전문       

.        



 

  

인구人口에 회자되지는 않더러도 우리 문학계에는 좋은 작품을 생산하는 시인들이 많이 있다. 이른바 문단 권력의 축에 끼지 못하면 진지한 조명을 받을 수 없는 풍토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잠 이루지 못하는 여름밤, 컴퓨터 깊숙이 가라 앉아있던 시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