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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숙의 시>평균적 삶의 낯설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17. 19:44

 평균적 삶의 낯설음

                        - 김상숙 시집 『강물 속에 그늘이 있다』

                                      


1.


낯가림이 심한 내가 가식 없이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의 하나가 김상숙이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는 수더분한 중년이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과 사색으로 내공을 다진 시인이다. 늦깎이로 등단한 시인들의 夢遊는 이미 삶의 정답을 이미 알아차리고 순도가 떨어지는 달관을 修辭하는데 그치는데 반하여- 이는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중얼거림이다-  삶을 달관하기 직전의 고통으로 얼룩지는 일, 그 얼룩진 고통에  어쩔 줄

몰라하면서 정답을 찾으려는 안타까운 몸짓이 그를 당당한 시인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습작을 거듭해 온 사람이다. 그의 술회에 따른다면 젊은 시절 그는 수 십 번의 이사를 거듭했고, 어림짐작으로 그렇게 뿌리내리지 못한 삶에서 안주의 꿈을 찾는 통로로 시를 선택했으며. 아마도 그때부터 그의 유일한 삶의 증거는 독서를 하고, 유랑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는 방편으로 시를 가까이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착에 대한 강열한 욕구만큼 인내와 기다림을 터득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예술활동은 일찍 행보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젊어 반짝이는 예지와 실험정신을 통해서 삶과 자연스럽게 몸을 섞고 환희와 좌절을 거듭하면서 정신의 영역을 확대해 나갈 때 작가로서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또 그만큼 누구나 삶의 고통을 적당히 회피할 수 있는 꾀가 늘어나서 주어진 운명에 당당하게 맞서는 자세를 보여주기 힘들며, 부지부식간에 실패를 두려워하기에 늦깎이로 이름을 걸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예술에는 지름길이 없다. 현란한 수사와 시대상황에 부합하는 예견과 암시의 젊은 날은 세월 앞에서 망연자실해지지 않을 수 없다. 늘 자신을 응시하면서 잡초처럼 돋아오르는 망상의 언어를 솎아내고 또 속아내면서 칼을 간 자만이 세상을 향하여 할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아프다!

프로이드Freud의 성과에 크게 기대는 바는 아니지만, 무의식  속에 억눌려진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그의 견해는 충분히 음미할 만 하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정신분열증 환자와 예술가를 환자라는 한 묶음으로 획일화한다는 비난을 받지만,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와 예술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경계선을 보여주고 있다. 즉, 정신분열증 환자가 표출하는 행위는 자신을 향하여 들어가는 내적인 구조를 보여주지만 예술가가 표출하는 작품은 제 3자를 의식하며, 또 일정부분은 그 제 3자에게 자신의 표현을 정당화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내가 아프다!'는 선언은 존재의 확인인 동시에 세계와의 싸움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패배를 자인하는 외침이다. 자신의 패배를 들어내놓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진정한 승리는 패배를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자세와 부단한 연습에 있다. 아픔과 패배,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오게 되는 죽음은 충분히 연습되므로서 극복되어질 수 있다. 김상숙의 시는 빛나지는 않지만 거듭되는 패배의 연습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맑은 눈을 가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빛남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험한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오히려 참다운 시인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인지 모른다.


2.


교언영색巧言令色과 회사후소繪事後素는 낡아빠진 옛 성인의 공허한 외침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萬人의 삶을 계도하며, 이 땅의 시인묵객들이 곱씹어보아야 할 話頭이기도 하다. 언어는 의식과 무의식을 함께 아우른다.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 언어 선택의 범위는 한 사람의 내포를 드러내주는 동시에 그 사람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교호작용交互作用이야말로 한 시인의 탄생을 축복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의 형식과 수사 修辭에 얽매일 때 시인은 저주받는다. 많은 시인들이 이 교언영색에 함몰되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를 사용하는 장르들 중에서 특히 시는 오늘날 다른 매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낼 방도가 없는 듯하다. 음악이 그러하고 영상예술이 그러하다. 우리의감각으로 돌진하여 오는 수많은 이미지들. 감각적 교류 방식을 시는 가지지 못했다. 언어의기표와 기의는 소리와 영상보다 반응하는 속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현저하게 애매성을 띤다

그렇기 때문에 시가 다른 영역의 예술에 대항하거나 경쟁하는 방식은 좌충우돌하는 상상을 비벼대어 일으키는 이미지도 아니고, 우국지사들의 흥분된 연설도 아니다. 마라톤 선수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42.195킬로미터를 얼마나 빨리 주파하느냐 이지만, 시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42.195킬로미터를 뛰면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소한 것들은 이 시대에서 효용성을 가지지 못하지만 바로 그 점이 시인이 갖는 축복임에 틀림없다.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정신은 마땅히 도덕적 含意를 벗어난다. 佛家에서 말하는 삶은 모든 것이 苦이다. 고통이 아닌 것이 없다. 시인은 고통의 프리즘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본다. 시인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측은의 전부이다. 측은함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측은은 고통과 치환된다. 바탕을 이룬다는 것 즉,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세상을 인식하는 범주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다. 상상력과 惻隱은 서로 상반된 가치를 지닌다. 상상력은 도덕과 윤리의 담장을 넘어서려 하고 측은은 인간성의 울타리를 자꾸 멀리로 확장하려 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시인은 자주 길을 잃기도 한다.

어째든, 시인이 자기 스스로를 시인으로 자각하는 한, 교언영색과 회사후소의 갈림길에 선  혼란함을 어찌할 수 없다. 과연 두 길의 행복한 일치는 불가능한 것일까? 이미 현명한 시인은 혜안으로 그 두 길의 일치를 노래한다. 그 노래를 익히는 독자는 일순 자기 동일화의 마력에 휩싸여 즐거움을 만끽한다. 그러나 진정한 시인은 여전히 두 갈래 갈림길에 서서 망설이고 절망하며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독자는 짜증을 낸다. 어느 한 길을 택할 것을 요구하는 독자를 의식하면서 시인은 낯설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다. 누가 영생의 길을, 극락을 가르쳐 주고 체험하게 해줄 수 있는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김상숙이, 김상숙의 시가 가지고 있는 인내하는 기다림은 혜안을 염원하되 결코 그 해답을 미리 엿보지 않으려는 의지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얼마든지 삶의해답을 들추어 볼 수 있다. 불경이라든가, 바이블이라든가, 아니면 논어, 장자 같은 종교적

성서들을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도저한 삶의 비경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은가?어떤 면에서 보면 시인은 주어진 해답을 놓고 시라는 형식으로 연습을 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김상숙이 지향하는 시는 솔개가 먹이를 찾아 하염없이 하늘을 선회하는 것처럼 아주 친숙하고 살겨운 평범한 일상을 배회한다. 일상 속에 숨겨진 틈, 아픔과, 측은함, 그 사이에 숨겨진 마노석을 찾기 위해 배회한다. 깨달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 가기 위해서 시를 쓰는 행위는 지독한 기다림과 인내를 요구받는 것인데. 김상숙은 인내와 기다림의 고통을 포기하지 않고 詩業의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이 번의 그의 첫 시집은 그런 의미에서 값진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3.


김상숙의 삶과 일상은 일반적 시민들의 평범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행복은 가족과 가족의 사회적 성공에 달려 있다는 믿음,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고,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억척스러움이 이 시대,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화상이다. 관념으로 자리잡은 획일화된 행복의 공식은 곧잘 의식 속에 이중의 잣대를 지니게 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반드시 타인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급격한 산업화 사회의 슬픈 단면이다. 나눔의 의미는 알지만 내가 착취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개미는 근면의 상징이지만 개미는 나눔의 상징은 아니다. 개미는 나눔을 생산하지 않는다. 오직 개미만을 위해서 개미들은 일한다. 나눔이란 꿀벌의 행태와도 같은 것이다. 꿀은 꿀벌의 생존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의 생존을 위해서도 요긴한 것이다. 바흐친의 '낯설기 하기'는 시 창작에 있어서 아주 유효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낯설음은 그런 의도적이고 왜곡된 방법으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평균적 삶 속에서 배회하며 찾아낸 반성의 도구이다.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주인공 로깡댕이 느끼는 평범한 일상의 낯설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끊임없이 삶을 배회하며 찾아낸 인생의 한 단면이다. 삶은 부조리하고 불안하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거친 폭력성과 익명성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이성 속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나, 즉 유령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일상은 늘 유령에 의해서 가위눌리고 있으며 그 가위눌림을 인식하는 과정이 낯설음의 방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낯설음은 심하게 뒤틀려 있거나 일탈을 감행하면서 지금껏 구축해온 가치를 파괴시키는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다가 깨어나 생각해봐도

참 이상한 일이다

남편은 직장에서 나는 집에서

열심히 살아

집 장만하고 아이들 대학 보내고

주름살도 비슷하게 굽이치는데

배낭이나 매고 여행 좀 해보겠다고

내 이름으로

통장 하나 만들어 이제 겨우

몇 십 만원이 쌓여 가는데

꼭 도둑질 한 것처럼

장롱 속에 숨겨 놓고

안절부절한다

이상한 일이다.


                     「이상한 일」전문


 김상숙의 낯설음은 이와 같은 것이다. 왜 우리는 저금통장을 장롱 속에 꼭꼭 숨겨 두는가? 대박을 꿈꾸며 복권을 산 것도 아니고, 배낭여행 한 번 가보겠다고 푼돈을 모아 이제 겨우 몇 십 만원이 모였을 뿐인데 왜 나는 안절부절 하는가? 내 속에 자리잡은 또 하나의 나는 무엇인가? 일상적이고 무의식적인 행위가 낯설어지는 까닭은 남편과 이이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관념과 나 지신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희생의 관념이 개인적 욕망을 억압하는데서 발생한다. 시인에게 낯설음은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자아와 조우할 때이다.


'저 내일 가요'하며 집 열쇠를/ 가슴에다/ 덜커덕 내려 놓는다//

세상이 나와/ 단절하려 드는 것 같다/ 와르르.../무너지는 것 같다

                                                          「아들의 방 1」끝 부분


아들의 입영을 두고 세상이 자신과 단절하려 한다는 느낌은 시인의 자아가 얼마나 자신에게서 멀어져 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 준다.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있어서 자아는 뜬 구름이고, 바람일진대 이 시인의 자아는 얼마나 작고 눈물겨운 것인가. 이와는 달리 자아는 타인과의 불화에서도 낯설음을 경험한다.


두개골이 금이 가기 시작한다 14층과 15층 사이에 끼어 있는 내 중추머신 두 번 말하면 원수질까 꼼짝없이 짓밟히고 있는데 새벽부터 지금까지 작은 길 큰 길 옆길 뒷길 중앙로 좌회전, 다시 우회전 시장통 등 터진 새우전 뒷골목까지 쉬지 않고 달린다


길을 나서면 횡단보도에도

밟히고 치는 사람들

길 밖에서 뛰고 있다


밟아라 뛰어라 머리에서 뇌수가 몽땅 흘러나오면 두통쯤이야 14층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지

잘 밟히려고 수건으로 머리를 몇 겹 더 싸매고 있다


                                         「내 머리를 밟아라」전문 



폭력은 비단 물리적인 힘의 행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물질만능의 시대에 있어서의 폭력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서도 그 위력을 발휘한다. 위의 인용 시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러닝머신을 타는 아파트 윗집의 횡포에 대해서 원수질까봐 두 번 다시 말하지 못하는 話者의 고통을 그려내고 있다. 애완견을 키우면서 애완견의 분뇨를 방치하는 사람들, 자기가 먹은 밥그릇에 담배 재를 태연히 털고 비벼 끄는 사람들,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휴대전화를 받고 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식하다. 우리 삶의 슬픔은 그런 무식함 속에서 고통을 견디어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잘 밟히려고 수건으로 머리를 몇 겹 더 싸매고 있다'는 사태는 나의 자아를 전투적으로 대응하게 하거나 아니면 수동적인 체념에 빠지게 하거나 선택을 강요한다.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러닝머신을 타는 사람인가? 아니면 잘 밟히려고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람인가?

인간의 이성은 자신이, 자신의 행동이 누구보다도 합리적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함정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합리적인 사고와 행위의 주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시인이 느끼고 분노하는 낯설음은 시인에게 부단한 의지를 표명하게 만든다



길을 가다보니

낯 선 길이다

잘못 들어섰다

큰길로 나가

다시 시작해야겠지만

괜한 고집이

길을 간다

금방 포기하면

쉬이 갈 길을

고집이 길을

무너뜨린다

뻔한 길을 놓친다

단물이 다 빠진 길을

질겅질겅 씹으며

걸어간다      


                                    「오후」전문


이 시의 제목은 '오후'이다. 오후는 하루의 반을 지나는 때이며, 우리 인생에 있어서는 노년으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오늘날, 40대 후반을 넘어선 사람들은 심한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 있다. 농경사회의 관습이 몸에 밴 그들은 근면과 성실로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세대이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글로벌 소사이어티Grobal Society 개념의 확산과 전자 통신 분야의 눈부신 발전으로 삶의 방식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어 그 변화의 속도를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처럼 세대간의 의식의 간극이 크고, 생활방식이 상이한 사회는 보기 힘들다. 주변으로 몰리고 퇴물로 폄하되는 '오후 세대'로서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택한 '단물이 다 빠진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시인의 내면에서는 평균적 삶의 안주가 되기도 하고 의식의 바깥에서는 평균적 삶에 대한 낯설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김상숙의 시는 자연에 대한 직설적인 경탄이나 찬미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추측컨대,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 구조로 세계를 파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인간에게서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그 역으로도 생각을 바꾸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상숙 시편의 도처에서 산견되는 바와 같이 인간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반복적인 추체험- 종교활동 및 예술활동-을 통해서 죽음을 달관해 나간다. 시 「오후」에 언급된 바 자신이 고집하는 길이나 새로운 길이나 어차피 하나의 길이라는 삶의 태도는 생명의 운명이 비극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시 「물방울 속의 우주」는 물방울 속에 갇힌 개미의 몸부림을 그리면서 '닫혀진 유리문에 제 몸을 찢거나/ 스스로 바람이 되기까지/ 매달려 있어야 한다' 는 생명의 종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물방울이라는 무생물과 개미라는 생물이 아무런 애증없이 서로를 감싸고 있는 것이 자연의 생태라는 것이다. 물방울이 터져버리는 -기온의 상승으로?- 새벽이 올 때 까지 물방울 속에 갇혀 있는 개미는 '초침소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시인의 발언은 어찌하여 김상숙의 시에서 자연의 대한 경외가 드러나지 않는가를 해명하여 준다고 보여진다.


쓰레기 더미에 푸른 잎이 돋아났다


주검 위에

갓 태어난 꽃들


무덤이 거름이 되는 줄

마흔 고개를 한참 넘어서야 알았다


                                        「죽음꽃」 전문


위의 시는 일견 자연의 신비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세계의 無常性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상에서 자연에 대한 찬미는 어불성설이다. 空의 세게에서 보면 色의 세계 또한 空이다. 쓰레기는 말하자면 色의 결과물일 터인데, 생명은 그 썩어가는 소멸의 상태에서 태어난다. '무덤이 거름이 되는' 이치는 상식이지만 그 상식을 온몸으로 체득하기에는 마흔도 쉬운 나이가 아닐 것이다.

「낡은 집」이나 「老人亭」은 소멸을 앞에 둔 노인들을 스케치한 시들이지만 시인이 인식하는 '노인 일반'에 대한 관념이며 자신의 노년에 대한 결의이기도 하다. 하루종일 10원짜리 동전을 내놓고 화투치는 할머니들에게도 먹는 일은 소중하다는 생존욕구의 끈질김.- 노인정 장구 소리에 /라면 물만 끓는다- 「老人亭」끝 부분, 그 반대로 생의 미련을 곱게 던진 노인의 - 무너질 때를 눈치채고 있는/ 저 헌 집이 아름답다 - 「낡은 집」 끝 부분은 무정한 자연의 법칙 앞에 벌받고 있으나 자연의 법칙과 화해하고자 하는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차가우면서도 친밀한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4.


이제 나는 이 시집의 정점에 올라서 있다. 생각하건대 시인의 의식여부에 관계없이 시집의 중추를 이루는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언급은 매우 진부한 내용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음을 또한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당대의 많은 시인들이 다루고 있는 소재중의 하나가 '나무' 이다. 나무가 상징하는 부동성, 영속성, 곧고 굳음, 평화, 정적 고요 등등의 심상은 이 시대가 지니고 있는 광물성과 대비되면서 시인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전래의 토속문화는 나무를 신성시하는 오래된 전통을 지니고 있어 더욱 친밀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시를 대충 제목만을 훑어보아도 「버드나무 카페」, 「고목으로 자라는 나무」,「나무의 말」,「내장산에서」, 등등 나무가 등장하는 시편이 다수 보이고 있음은 일견 반가우면서도 진부한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앞서 열거한 나무의 상징성은 뿌리 뽑힌 채 유목민화 되어 가는 현대인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잃어버린 정신적 고향으로 우리를 이끌게도 한다. 문제는 '나무' 라는 모티브를 선택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티브를 해석해내는 방법과 도구의 보편성에 있는 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나무를 의인화하고 대화법을 차용하여 찾아내는 이미지들이 대동소이할 때 그 시의 창조성은 현저히 떨어지게 마련 인 것이다.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 들은 어설픈 過客과객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門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위의 시는 박목월의 시「나무 」이다. 한 인터넷 문학 사이트에는 나무에 관련된 시들이 이 천여 편 가까이 수록되어 있었다. 수많은 시인들이 노래하고 있는 '나무'의 심상을 목월의 시 한 편으로 집약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목월의 「나무」를 떠올리게 된 것은 김상숙의 「내장산에서」를 읽고 나서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장산을 내려다보면서 쓴 이 시는 나무를 다룬 다른 시편에 비해서 과감한 언어의 생략과 삭제를 통해서 얻어낸 둔중함이  가편임을 확신하게한다


오랜 세월

살갗이 부르트도록

오직 한 곳을 향해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

올려다보며

한 눈에다 보려는 건 욕심이다

머리카락 덥석 만져본다는 건

잘못하는 일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단번에 올라가

나무가 써 올린 경전을

한나절에 헤집어본다는 건

벼락칠 일이다

 

                     「내장산에서」 전문


좋은 시는 눈으로 한 번 읽고 마음으로 한 번 읽으면 족하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앞서 소개한 목월의「나무」를 다시 읽었다. 두 편의 시가 짝을 이루어 머리 속에 아름다운 향으로 오래 남았다.

위의 두 편의 시는 언어를 뒤틀거나 사물을 낯설게 보거나 하는 기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물이나 현상을 오래 들여다보고 틈새에 자신의 생각을 끼워 넣을 때 삶은 낯설은 비경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세상이 아프니 내가 아프고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경지는 시인이 시인으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아주 소중한 덕목이 된다. 김상숙은 그러한 덕목을 믿음직하게 보여줌으로서 시인으로서의 출발이 결코 늦지 않았음을 증명해 준다.


6.


김상숙의 시집은 적지 않은 시간이 경과한 작업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관된 전략에

의해서 집중적으로 씌여진 글들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들 하나 하나의 연계성이 부족하고

시의 완성도에 있어서도 편차가 심하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신인이 가져야 할 패기나 실험정신이 부족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상숙의 시는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어법을 구사하면서 시대의 와류에 휩싸이지 않으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건강성을 확보한다. 자신의 체험과 사유만을 의지하는 詩作은 역경이다.

자신의 삶을 굴절시키지 않고, 평범성을 이탈하지 않고 낯선 세계와 조우한다는 것은 왠만한 인내와 정신적 집중이 아니면 거두어들일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김상숙 시의 정조가 건조하고 리듬감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은 일면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의 시작에 있어서는 값진 미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시인들의 시에 쉽게 등장하는 '사랑'의 관념이 김상숙의 시에서 쉽게 드러나지않고 있음을 상기해 보라. 그의 사랑은 이미 개인과 개인간의 사소함에서 이미 벗어나 있다. 그는 보다 넓고 깊은 만물의 圓融에 흠뻑 빠져 있는 것이다.


강둑에서

꼬리를 흔들며 짖어대다가

부르면 달려오는

양선한 털복숭이가 있다

마른 풀섶 찾아드는

행려자들에게

한 뼘 땅을 선뜻 내어주는

강마른 등짝의 해비타트

바람을 구부려

토담집을 짓고 있다

엎드릴수록 커지는

홈리스의 열혈 후원자

누가 그를 풀이라고 부르느냐

감히 망치소리를 내느냐

흙만 밟고 조용히 지나간다

늦가을 들판, 풀내가 깊다

              

                               「강아지풀」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