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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순의 시> 바람의 흔적, 존재를 찾아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2. 17. 19:55

바람의 흔적, 존재를 찾아서


                          - 박강순 시집 『바람 흔적』


  여자


 그는 그 곳에 가고 싶어했다. 아니, 그는 그곳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몇 년이 흘렀지만, 우리에게 변화된 것은 없었다. 몇 년 전보다 조금 더 늙었고, 세상에 대한 불만이 늘어난 만큼 푸념과 절망이 늘어간 것을 빼고는 말이다.

 우리는 미망迷妄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한 해가 끝나 가는 12월 마지막 주의 어떤 날이라고 해두자. 코끝이 시릴 정도의 매콤한 공기가 흘러가는, 덜거덕거리는 쳇바퀴 하나를 버리고 또 하나의 쳇바퀴를 바꿔 끼우는 것쯤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그리하여 미망을 빠져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미망 속으로 빠져드는 물거품 같은 햇살이 유혹하는 고속도로에서 그는 몇 번인가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가는 풀어 주었다. 나는 그의 그런 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것 같다. '아무리 밟아도 140킬로를 넘지 못해요' 투덜거리는 그의 목소리, 새로 장만한 그의 차는 엔진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핸들은 부드럽게 바퀴를 돌리고, 극락으로 떠나는 가마처럼 안락했다. 그러나 희망이라는 가속페달은 그가 빨리 도달하고 싶은 그곳으로 그를 데려다 주지 않았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는 엄밀했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는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졸음에 겨워하는 귓가에 쏟아 놓았다. 그의 이야기는 창가에 세차게 부딪치며 일으켜지는 바람 소리 같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중년의 어떤 여자가 저녁마다 공원으로 운동 겸 산책을 나갔는데요, 거기서 한 늙은 남자를 만났대요. 그 남자는 혼자 살고 있었는데... 아마 그 여자에게청혼을 했나봐요... 그 여자는 거액의 돈에 홀려 이혼을 하고 말았던 모양이지요...그러다가 얼마 안 가서 그 남자가 죽고 생각지도 못했던 거액의 유산이 그 여자에게 남겨졌다고 그러대요... 그 이후, 그 공원에는 밤마다 이쁘게 화장을 한 여자들이 괜히 뜀박질도 하고요, 우아하게 걷기도 하고요... 근데, 우리 마누라가 불쌍해요....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그는 역사를 공부했다. 박사를 마쳤지만, 그를 원하는 곳은 없었다. 세상은 어디를 가도 그를 거미줄 안에 잠궈 두었다. 일 년의 육 개월을 수입 없이 공쳐야 하는 강사의 고달픈 삶이 몇 년 째 아니 앞으로도 여전히 그의 눈을 매섭고 건조하게 만들 것이었다.

운명이지 어쩌겠어, 우리는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는 없잖아. 나는 잘못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 어쩌다가 험로에 들어선거지. 요즘 세상에 남자만 벌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하는 게 우스운 일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안은 씁쓸했다. 절대절명의 생존의 위기 앞에, 과연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차이는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진화론은 생존의 매커니즘으로, 생존을 위한 본능으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 짓는다. 한 예로 다윈의 성선택 이론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우열적 관점을 내재한 편견들, 더 나아가서 정치적 사회변동의 대립자로서의 남성과 여성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킨다.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안정적으로 퍼뜨리기 위한 남성과 여성의 전략은 이기적이다. 더 나아가서 윌리암스George.C. Williams나 트리버스 Robert Trivers의 부모로서의 남성의 투자 male parental investment이론은 남성과 여성의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무엇을 신중하게 고려하는지를 제사해 준다. 남성은 좋은 유전자의 보유 여부, 다산의 능력을 중시하므로 젊고 건강한 여성을 선택한다. 거기다가 여성이 얼마나 충실한가를 따진다. 즉 성적으로 방종하지 않은 여성은 남성의 투자 성공을 가늠하는 요소가 된다. 반대로 여성은 외모, 체력, 보다도 높은 사회적 지위에 관심을 둔다. 또한 남성과 마찬가지로 충실함을 선택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인다. 충실함의 의미는 남성과 여성에게 있어서 다르다. 남성은 성적인 측면에서의 충실함을, 여성은 믿음과 배려의 차원에서의 충실함을 견지한다.

사회생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내장된 적자생존의 본능을 확인시키는 한편, 본능과 자아의 충돌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던져주었다. 관습은 악몽이다. 본능에 지배받는 숙명의 연습이 아니라 본능을 지배하고자 하는 양성적 욕구는 이제 페미니즘의 정점에 올라와 있다. 이제 여자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화되면서 인간 저 너머의 지평선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나는, 우리는 영원히 그 지평선에 가서 목매달 수 없을 것이다. 


 


폐사지에서


예기치 않은 교통사고와 머뭇거림이 시간을 지체했다. 원주를 앞에 두고 문막에서 빠져나와 차는 지방도로로 접어든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것처럼 산과 들은 잔설로 희끗거리고 기억을 되짚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차는 몇 번인가 머리를 바꾼다. 낯 선 곳으로의 이동은 경이롭다.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러므로 어떤 묘사로도 담아낼 수 없는 그 어떤 곳이 존재한다는 것, 그곳에서도 뭇 생명과 마을과 사랑과 미움이 바람의 흔적처럼 남아 있다는 것이 눈물겨웁다. 잠깐 잠깐 스쳐 지나가는 표지판의 마을 이름, 숫자화된 도로명이 그 되돌아가야 할 곳을 알리는 따스한 손길이고 눈짓이 될 때, 바람은 비로소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소멸의 실체를 부스러기처럼 흔적으로 남긴다. 우리의 삶은 무엇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어느 사람은 바람을 잡아두고 싶어하고, 어느 사람은 바람을 그리고 싶어한다. 그러니 우선은 바람 앞에 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연의 마주침, 분기와 생성, 이동, 사라짐 또는 소멸... 끊임없이 다가서는 관념은 바람에 찢겨지고, 펄럭이며, 흔들리는 자신을 느끼게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이 바람으로 가득하다. 정지한 바람, 뛰어가는 바람, 저 집도, 저 산도, 나무도, 구름도, 모든 것이 다 바람이다.  바람을 거역하는 본능과 본능을 제압하려는 자아의 분투 속에서 사랑은 사생아처럼 태어난다.     

바람의 흔적은 폐허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답다. 폐허는 사랑으로 온전히 남아 있다. 아!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나는 나를 고발한 자나 사형을 언도한 배심원들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미움을 가지지 않은 것만큼이나 사랑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것 같다.'는 소크라테스의 고백이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고개를 지나가고 있다.

사랑이 본능적이라고 한다면 왠지 다량으로 만들어진, 식어빠진 붕어빵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붕어를 빵으로 만들어 먹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지 않은가? 붕어빵을 씹어 삼키면서 우리는 붕어라는 관념을 함께 저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자아는 관념을 생산한다. 자아의 만다라가 사랑이다. 원초에 생성된 것이 아니라, 사랑은 만들어 진 것이다. 만들어진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고, 익숙해지려면 배우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자, 우리는 바람의 집에 도착했다. 작은 외로움은 큰 외로움을 만나야 사라지고, 보잘 것 없는 슬픔은 큰 슬픔 앞에 머리를 숙인다. 모두를 사랑할 수 없는 죄, 그 큰 슬픔 앞에 당도한 것이다. '움직이는 쓰레기통 같지 않아?' 혼잣말로 중얼거린다는 것이 그의 귀에 들렸던 모양이다. '너무 자학하지 마세요' 그래, 나는 움직이는 쓰레기통 같다. 스스로 먹고, 죽이고 배설하는 자연도 쓰레기통인데, 자연은 악취가 나지 않는다. 그와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너른 공지를 바라보았다. 그 때도 그랬다. 여름비가 세차게 내리는 강원도 고성의 건봉사지에서 공터로 내려 붇는 푸른 소나기 속에서 우리는 많이 울었다. 세상이 우리를 몰라준다는 야속함과 패배감과 지으면 허물어지는 욕망의 실체 앞에서 우리는 무력했던 것이다.


지독한 기도가 아니면

절실한 사랑이 아니면

느티나무는 느티나무이다.



만 평 가까운 절 터는 가까스로 주춧돌과 석축, 회랑의 흔적, 천 년 전 어느 선사의 탑비와 불상을 얹어 놓았던 좌대와 금당터, 복원된 삼층 석탑과 오백 년이 넘은 느티나무 한 그루로 가득했다. 그 나무는 석축의 틈새에 뿌리를 박고 안간힘을 쓰며 쓰러질 듯 우람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살아 있구나, 살아 있구나 허공을 향해 뻗쳐있는 무수한 가지들은 또 무수한 잎을 키우고 버리면서 천천히 공간을 제 살로 만들어 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지독한 기도일 것이다. 제발 나를 나무의 업보로부터 해방되게 하소서! 정지로부터 빚어지는 나무의 몸부림은 어느 건축물보다도 견고하고, 그 누구의 무용보다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람과 비와 추위와 더위의 형벌 속에서 빚어지는 춤사위는 하나의 경전이다.

세 개의 선언지 選言枝 중에서 하나의 정답이 있을까? 지독한 기도나 절실한 사랑, 느티나무는 느티나무이다 중에서 우리는 무엇을 택하여야 할까? 느티나무가 느티나무이기 위해서는 지독한 사랑과 절실한 사랑을 필요조건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느티나무는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느티나무의 생물적 속성은 나무 일반의 외연보다 적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독한 기도, 절실한 사랑은 나무 일반에도 포섭이 되는 개념일 뿐이다.

절터는 마을버스가 멈춰 선 곳으로부터 한참을 걸어 올라와야 하고 길은 한 두 번 휘어져 마을 쪽에서는 절터가 보이지 않고 절터에서는 마을이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대중들의 발자국 소리와 ,수도승들의 염불 소리와 힘차게 속세로 내려가는 시냇물 소리와 금당에 우뚝 했을 불상과, 경전은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그 빈 터에서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환영을 그림자로 밟고 서 있다. 사지 寺誌에는 신라 말에 개창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병화 兵禍가 유난히 많았던 우리의 역사에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은 수도처라고 해서 그냥 지나쳐 가지는 않았을 터. 어쩌면 소실과 분탕의 흔적이야말로 선 禪의 증명이 아니던가.


지독한 기도가 아니라면/ 절실한 사랑이 아니라면/느티나무는 느티나무일 뿐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져 버렸는데, 완강한 돌 틈 사이로 뿌리를 내리고 악전고투하며 생명을 잇는다는 것은 지독한 기도와 절실한 사랑이 아니면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다. 마을 입구 평지에 으젓하게 서 있는 당산 나무들을 보라. 몸체는 우람하고, 가지는 튼실하여 마을의 길흉화복을 일러준다는 당산나무들..

인간은 늙어 죽지만, 나무는 늙을수록 신이 되어간다. 그런데 이 아득한 벼랑 위의 느티나무는 삶이 힘겹다. 이 느티나무는 신산한 고투 속에서 느티나무가 아닌, 신비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절이 허물어지고, 경전은 불타고, 수도자는 떠났다. 그리고 느티나무만이 남았다. 폐허 위에 우뚝 선 느티나무야말로 살아있는 반야심경이 아닐까?


세월도 겁없는 오래된 절터에서

늙은 태양도 머뭇거리다 간다

이 어지럼증으로

그리움을 넘겨버리고 있다.


 지독한 오독 誤讀이다. '겁 없는'의 주어는 무엇인가?


겁 없는 오래된 절터에서/ 세월도/늙은 태양도 머뭇거리다 간다①

겁 없는 세월도/ 오래된 절터에서/ 늙은 태양도 머뭇거리다 간다②


①은 이미 무너져버린 무소유의 경지인 절터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변화가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절터가 지닌 공포가 해소된 경지를 ②는 무소유의 경지를 보여주는 절터이기에 무량한 시간과 생명의 원천인 태양도 머뭇거릴 수 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 보는 것이다. ①이든, ②이든 폐사지는 진공의 상태이다. 완전한 無, 완전한 空을 체득하는 순간 생명이 지지하고 있는 구심력과 원심력은 분해되고 만다.


이 어지럼증으로 / 그리움을 넘겨버리고 있다.


난데없는 그리움이라니? 넘겨버린다니? 어디로? 누구에게? 어지럼증은 세월이나 늙은 태양같은 직관의 형식일 수도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 話者의 발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첫 번 째 연의 단정의 주체도, 두 번째 연의 초월적 인식도 話者인 '나'의 드러냄인 것이다.

현재 진행형인 어법 즉,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다 라든지, 그리움을 넘겨버리고 있다라는, 현재형 단정은 그러한 단정이 조건과 상황에 따라사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항구불변인 眞如임을 밝히는 것이다.


코 끝이 시렵기는 했지만 12월의 햇살은 빗금으로 내려오다가 아주 조그만 움직임에도 사그락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금모래처럼 사라져버린 금당 안의 불상과 그 불상을 지켜보던 삼층석탑이 약간 기우뚱거리는 것 같았다.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장난인 줄은 알았지만, 우리는 흔들리며, 무너져내리는 바람의 집인 것은 곧잘 잊어버린다.

속세에서의 보잘 것 없음이 이 텅 빈 폐사지의 공허 속에서 더 보잘 것 없어 보일 때 우리는 울컥 자신을 읽으며 목이 매이는 것이 아닌가



가늘게 눈을 뜨면

가느다란 그가 보인다


눈을 부릅뜰 때 핏줄은 팽팽하게 당겨지고, 오감은 긴장한다. 동공을 크게 연다는 것은 내 앞에 주어져 있는 사물을 대상으로서 확실하게 내 안으로 끌어당긴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눈이 크게 열린다는 것은 대립과 긴장, 압축된 소유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은 외부세계의 눈부심에 대한 방어적 행동일 수도 있고, 눈으로 받아들여지는 眼識을 安息으로 바꾸어놓는 신호일수도 있다. 그것은 의식을 풀어놓으며, 인식의 대상을 대상 바깥으로 놓아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투쟁이 아니라 평화와 화해의 눈짓이 가늘게 눈을 뜨는 행위인 것이다.

가늘게 눈을 뜨면 /가느다란 그가 보인다 라는 표현은 굵게 눈을 뜨면 굵은 그가 보인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가늘다 라는 여린 여성적인 이미지는 그 여성성으로 말미암아 그를 또한 가녀린 존재로 받아들이게 하지만, 크게 눈을 떠서 온전한 그의 실체를 바라보았을 때에는 그는 대립적이고 투쟁적인 존재로 인식되어버리는 것이다.

사슴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므로써 호랑이를 용서한다. 자연의 먹이사슬은 하늘에게 땅에게 자신을 바치는 거룩한 공양에 다름 아니다.


 


다시 여자

   


자작고개를 다시 넘어오는데, 저 앞에서 짚차 한 대가 멈추어 서고 한 사내가 내린다. 한 손에는 지도를 든 채로 우리가 방금 떠나왔던 절터를 묻는다. 폐사지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심심하기 때문이다. 역사 유적을 공부하는 사람 아니면, 또 나와 같이 세상에 대하여 패배와 굴욕에 몸을 떠는 사람이 아니면, 폐사지는 단지 공터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빈 터는 언제나 빈 터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다가오는 죽음과도 같이 빈 터는 그 옛날의 영광과 분투의 기억을 버리는 대신 자연의 쓰레기이면서도 향기를 잃지 않는 님으로 살아 남을 수 있다.

겨울 해는 빠르게 빛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그와 나는 가늘게 눈을 뜨면서 해지는 쪽, 우리들의 집을 행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제일 멋있지요. 집에 갔는데, 애엄마가 없으면 되게 화가 나요'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십이 넘은 남자에게 여전히 여자는, 아내이면서. 엄마이기도 하다. 여성들이여, 이 남자들의 치졸함을 받아주시기를! 남성은 늙어가면서 여성 홀몬이 증가하고, 여성은 남성 홀몬이 증가하여 그리하여 그 결과가 어찌 되는가를 슬쩍 넘어가 주기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본능적 요소를 남녀간의 우열의 잣대로 사용하면서 수많은 편견과 악습을 만들어 왔다. 문화는 동물적 본능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남녀를 바로 세우는 잣대로 기능한다. 이성을 포함한 자아는 기계적으로 수행되는 본능적 욕구와 충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가 되든 인격체로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할 때, 사랑은 도구가 아닌 하나의 이데아로서 우리 앞에 현현한다. 그 사랑은 육체적 쾌락을 넘어서 정신을 해방시키고 용서와 화해를 구현한다. 직선적 대립이 지양되고 스스로 구부러짐으로써 희생과 인내의 절대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여자. 2 -폐사지에서」는 박강순의 세 번째 시집 『바람흔적』(시와산문사,2003)의 한 편에 불과하다. 이 시집에는 이 밖에도 다섯 편의 '여자' 연작시가 더 수록되어 있는데, 이만한 질감과 긴장을 가지고 오늘의 여자를 절단한 시편은 없어 보였다.

3연 9행에 불과한 이 시에서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여자의 절편을 추출해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위험한 작업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가 여성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여자라는 단어를 취한 까닭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인도의 성자들은 정명론에 구애받지 않았다. 유교문화권에서의 正名은 세계를 구축하고 질서를 확립하는 중요한 이념의 틀이었다. 나는 전자의 입장에서 시를 읽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 지는 알 수 없으나 모성은 영원히 남성에게는 콤플렉스임에 틀림없다. 생명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고, 그 고통 속에서 모성은 싹튼다. 그 모성이야말로 인간에게 용기와 희생의 단서를 제공하는 경전일 것이다. 좀처럼 겹쳐질 수 없는 폐사지와 여자의 이미지가 팽팽하게 맞서고 서로를 아우르는 경지 속에서 나는 많은 오독의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 느꼈다.


<후기>

 이 글은  박강순 시인의 시집 <<바람흔적 > 중에서 <여자 >연작을  읽고 쓴 것이다. 시를 읽는 동안 문득 시에 등장하는 장소가 원주 부근의 페사지 '거돈사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시와 산문>>에 서평으로 게제되었는데, 후에 박강순 시인에게 물어본 바 이 시의 배경이 '거돈사지'라는 답을 들었다. 나는 한동안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