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슬픔의 자화상
- 김정렬의 시 세계
꿈이 있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거리를 취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반성할 수 있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자신에 대해 거리를 가질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 갇혀버려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짧은 글에서 김현은 문학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을 통렬히 반박하고 있다. ‘문학’의 의미는 끊임없는 정의내림에 의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그 정의내림은 문학이 지니고 있는 기능의 일부분만을 부각시킨다는 난점을 가지고 있음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오랫동안 몰두해 왔던 ‘무엇을 쓰는가?’의 문제와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를 다같이 가짜문제로 치부해 버리고 나니 그가 내린 결론이 위의 인용한 글이 된다. 꿈이 없을 때 인간은 즉자적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꿈은 절망을 증거하면서, 꿈은 인간 부재의 현실을 치유한다. 그렇다면 작가나 시인은 그 꿈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사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문단에 얼굴을 내민 사람이 있다. 그가 김정열이다. 그를 알게 된 것은 10년이 넘었지만, 그가 가슴에 시를 품고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그는 오랫동안 우리나라 입법부의 한 켠, 험난하고 말 많고 탈 많은 우리니라 정치권의 한가운데 서 있었고, 한 번은 그의 고향에서 선거에 출마했었다는 풍문도 듣고 있었던 터이었으므로 어지간히 세파에 단련된 사람쯤으로 단정해 버렸었는데, 막상 그가 한 번 읽어보라고 가져온 시들은 그의 털털하고 넉살 좋아 보이는 인상 속에 감추어졌던 예민하고 따사로운 그의 내면을 눈물겹게 보여주었다. 거의 반 평생을 그가 몸담았던 정치와 문학은 그 간극이 매우 크다. 정치는 대중이라는 현실적 존재를 대상으로 현세의 빵과 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문학은 정치에 비해 퇴행적이고 비현실적일 수 밖에 없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문학은 정치보다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넉넉하다. 아마도 이러한 점을 그는 오래 전부터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민중 또는 대중이라는 실체, 그 실체의 희망과 부질없음, 그 수 많았던 사람들과의 조우와 부대낌, 증오와 연민이 자연스럽게 한 몸을 이루면서 잠재되어 있던 휴머니스트의 풍경들이 시로 표출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시편에 드러나는 사건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보잘 것 없고 사소한 것들이며 그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 또한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남루로 펄럭이는 우리의 삶과 그 삶의 결을 이루는 수많은 아픔과 슬픔은 그의 시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새로운 기쁨으로 재탄생한다. 그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김현의 짤막한 글을 인용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김정열이 이미 문학의 핵심적 요소를 꿰뚫고 있다는 안도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꿈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은 꿈이 따뜻하게 감싸안고 있는 절망과 아픔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꿈을 꾸는 행위 자체가 시를 쓰는 일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비현실적이고 유용하지 않은 글쓰기를 통해서 시인은 스스로를 반성한다. 시인은 시라는 거울을 통해서 시인과 꿈과 독자를 고스란히 포섭해낸다.
시가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정의 내릴 때 김정열의 시는 오히려 그 반대편. 체험 속으로 침잠한다. 사물과의 대면에서 빚어지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예지의 발현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김정열의 시는 너무나 투박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그가 다루고 있는 사람이나 사건 속에서 그는 과거에 체득한 삶의 진실성을 재현해내는데 성공한다.
해 떠오르는 바다 희망을 가르쳐 주었고
노을이 지는 바다 낭만을 가르쳐 주었고
달빛 흐르는 바다 그리움을 가르쳐 주었다
파도 부서지는 바다 분노를 가르쳐 주었고
쓸쓸히 비오는 바다 우울을 가르쳐 주었고
캄캄한 칠흑의 바다 절망을 가르쳐 주었다
넓게 펼쳐지는 바다 용기를 가르쳐 주었고
갈매기 훨훨나는 바다 설렘을 가르쳐 주었고
붐비는 여름바다 오히려 고독을 가르쳐 주었다
이웃들이 떠나는 바다 이별을 가르쳐 주었고
해녀들 물질하는 바다 인내를 가르쳐 주었고
고깃배 불켜진 바다 기다림을 가르쳐 주었다
어린 시절 늘 가까운 곳에 지켜 서 있던 바다
멀리 있어도 인자한 푸르름으로 다가오는 동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항상 묻고 있는 나의 스승이여
「동해 나의 스승」전문
그는 동해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에 태어난 그는 대부분의 우리 중장년들이 겪었던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시 「아버지의 장갑」에 드러난 바와 같이 그의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손가락 하나를 잃고 슬하의 6남매를 키우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돈이 있어야 원호대상자가 되는데 그도 되지 못하고, 그래도 참전의 추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장승」이나 「어머니의 불빛」에 술회되고 있는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신 어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는 곳이 동해인 것이다. 바다는 그의 심성을 바르게 해주고, 세상을 포용하는 넓은 가슴을 가지게 해 주었으며, 세상의 질곡을 한탄이나 분노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삶의 원천이 되게 하여 주었다.
그의 시는 이렇게 1950년대로부터 출발하여 새 천 년을 넘어서는 반세기를 아우르고 있다. 그 50 년 동안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 7,80년대의 군부독재시절의 풍경들, 90년대의 IMF와 같은 경제적 혼란과 남북간의 이데올로기 충돌, 미국 체류중에 경험했던 이민자의 고통 등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과 민중이라는 거대한 힘을 날줄로 한다면,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그의 자식들, 고향사람들, 동창들, 살겨운 이웃들과의 개인간의 소중한 만남을 씨줄로 엮어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되묻게 하고 있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인으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여줄 뿐 만 아니라 그 사랑을 어떻게 되돌려 주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존재들이다. 일일이 그러한 예를 다 열거할 수는 없겠으나 그 일부분을 제시해 보기로 한다.
세상 많은 오염에/물들지 말라고... 세상의 불의를 보면 /칼날같은 용기로 나서라고/깃을 세우고 /안타까운 일엔/마음 쉽게 구기지 말라고/구석구석 주름을 편다// 아침이면 아내는/경건히 다림질하며/조용히 기도하고 있다
- 시 「아침기도」부분
때로는 너무 신선하고 또 너무 뜨거워서 /사랑은 쉬이 시들고 쉬이 식어버리지만/그대에게서 기쁨으로 받은 고귀한 사랑은/절제된 온도로 그대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 시 「냉장고 연가」3연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밤/ 인천공항에 내리기 전 서울시내를 내려다 본다/ 전깃불 네온사인 찬란한 서울은 온통 보석함/ 우리 서로 자주 미워하고 시기하며 실망하고/희망이 없다며 체념으로 대하는 일상의 삶도/다시 보면 저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다
- 시 「서울 밤 상공에서」 전문
세상은 보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학문적 통로를 통해서 세계관을 구성하기도 하고. 연속적인 삶의 체험을 통해서 독특한 세계인식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하여야 할 것은 섣부르게 허무를 노래하거나 경직된 교조주의의 음성으로 삶의 교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목적지에 이르는 여러 방향들을 무뚝뚝하게 보여주는 존재인지 모른다. 요즈음의 시인들에서 보이는 우연적인 해체와 파편화된 자아나, 과정을 무시하고 쉽게 도달해 버린 높은 경지의 시들에서 값싼 향수의 역겨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을 스스로 희화하고, 가볍게 증발시킴으로서 종국에는 시가 하나의 지적 유희로 떨어져 버리게 하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시가 가슴 속에서 분출하는 영감과 직관으로 그 빛을 발한다고 해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 형식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김정열에 있어서 그 형식과 기준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신뢰에서 비롯된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가난하지만 돈독한 가족애로 뭉쳐진 환경 속에서, 바다라는 위대하고 장엄한 자연의 소리 속에서 김정열이 배우고 키워온 것은 바로 ‘사랑’ 이었다. 그 사랑은 그의 몇 편의 시에서 나타나는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일 수도 있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일수도 있을 것이다.
도로공사 중
타일을 드러내고 파낸 옆에는
부드러운 흙이 쌓여있다
무거운 타일과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난 뒤
싱싱한 흙의 속살 드러난다
우리 마음에도 찌꺼기
조금만 걷어내면
서로 위로하고 사랑할
저런 싱싱한 마음속살 있음을
우리 모두 잊고 사는 것이다
모르는 채 잊고 사는 것이다
- 시 「도로공사장에서의 단상 」 전문
그의 정의에 의하면 마음의 찌거기를 걷어내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다. 마음의 지꺼기란 불교에서 말하는 三毒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마음의 찌꺼기를 거두어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풍경을 만나게 된다. 아파트 경비원 최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고, 그것도 모르고 찐빵 한봉지를 사서 경비원에게 주려던 아내, 식은 빵을 먹으며 느끼는 회한조차 사랑이다.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무래도/ 금방 식어버리는 빵의 온기 같은 것/혼자 뭔가 아는부끄러움으로 상기되어/붉어지다 곧 사라지는 저녁노을 같은 것/
-시 「식은 빵을 먹으며」 마지막 연
혼자 뭔가 아는 부끄러움으로 상기되는 상태는 우리 산다고 하는 것 /빈 병을 지나며 울리는/작은 바람소리일 뿐이랴 - 「어느 부음을 듣고 」마지막 부분처럼 타인에게 충분한 관심을 나누지 못했을 때 느끼는 슬픔이다. 또한 「휴대폰이 묻는다」라는 시에서 너는 누군가로부터 /연락 받을 때마다/벅찬 기쁨으로 설레어/온 몸을 이렇게 떠는 /사랑을 한적이 있는가 /이렇게 온몸을 떠는 - 神氣의 상태까지 상승적으로 전이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능동적으로 타인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로 인한 일체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인간’이른 보편적 실체에 살겹게 다가서는 기쁨인 것이다.
그렇다고 쉽게 기죽지 말고
부디 힘을 내라 서영아
본시 어둠이란 없는 것이다
다만 빛이 없기 때문이다
그 빛은 가끔 더디 오기 때문에
때로는 오래 기다려야 한다
-시 「빛과 어둠」마지막 연
시인이 만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은 슬픈 표정을 지니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삶은 고달프며 배신과 증오가 잡초처럼 돋아오르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그 슬픔이나 고통이 어둠 때문이 아니라, 어둠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빛이 더디 오기 때문이라는 각성은 김정열이 거두어들인 소중한 수확이자 시학이 아닐 수 없다. 낙원에의 꿈을 안고 미국 땅에 당도하여 공사판을 전전하는 한 이민 노동자의 슬픔은 결코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의 디딤돌이 된다는 시인의 인식은 아름다워서 슬프다.
김형, / 저는 미시시피로 갑니다/ 소떼를 몰고 대륙을 횡단했던/키우보이들의 굳은 각오로/저는 미시시피로 갑니다
-시 「 미시시피로 가는 이별」마지막 부분
물에 젖을 때 마다/ 굳센 결의로 /다시 살아나는 다리/ 새로 태어나는 잠수교여
-시 「잠수교」 마지막 연
오랫동안, 틈틈이 나는 김정열의 시를 읽었다. 이번에 상재하는 그의 첫 시집은 반세기에 걸친 한국사와 가족사로 얽혀 있다. 세상을 향한 그의 시선은 따뜻한 눈물로 가득차 있고, 그러면서도 가끔은 격앙된 목소리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가 오늘의 정치를 이야기할 때, 한국을 떠나 이웃나라에서 한국을 들여다 볼 때, 그의 목소리는 일방적인 주장으로 함몰되기도 한다. 그의 목소리가 한 쪽으로 기운다고 해서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아래 인용한 시는 남북분단과 외세에 의한 굴곡진 우리의 현대사를 그린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시인 자신의 체험이 반성적 구도로 짜여져 있어 산문화된 단점을 넘어 시의 울림은 결코 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판문점 회상
1983년 여름 친구로부터 판문점 가는
귀하고 귀한 티켓 한 장 받았습니다
한미무슨협회 회원에게만 주는 것을
모파상이 쓴 진주 목걸이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파티티켓을 구한 것처럼
어렵게 손에 넣고는 무척 기뻤습니다
성분을 파악한다는 신원조회를 위해
미리 본적과 주소도 적어보냈습니다
날이 화창한 6월 어느 토요일 오후
광교 부근에서 출발한 우리 버스는
구파발 지나 통일로를 달렸습니다
몇 번인가 검문검색 통과하고 난 뒤
갑자기 여행사 전무라는 사람 일어나
오늘 이렇게 여행하게 된 것은 다
군사정전위원회 회장인 미국 장군이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고 하며
그분 사인한 공문을 보여주었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박수를 보내자고 하여
부끄럽게 부끄럽게도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더니 작은 모자 하나 돌리면서
성의를 표시하자며 모금을 했습니다
전달되는지 묻지도 않고 응했습니다
판문점 거기도 내 나라 우리 땅인 데
가는 길이 그렇게 그렇게 어려웠습니다
박수도 쳐야 하고 성금도 내야 했습니다
지금 2000년 근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판문점 아직도 내 나라 우리 땅인 데
가는 길 변함없이 멀고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몇몇의 작품은 우국충정이라는 주제의식이 상승하여 시적 정서를 해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투신시대」,「 도문기행」,「 능내리 강가에서」,「철원에서」,「심양에서는 잠을 이를 수가 없다」등의 시들은 주제의 무거움과 대결하는 시인의 정신적 긴장이 다소 풀어져 있어 작품의 밀도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시작법의 변용과 실험을 통해서 충분히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열의 시는 대화와 산문성의 문체로 독자들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가성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을 가졌다. 이는 한편에서는 시작에 있어서 단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지나친 산문화는 언어의 압축이라는 시의 고유한 측면을 사상시키므로서 시에 있어서 메시지의 기능이 이미지의 기능을 압도하는 난점을 유발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체험과 반성이라는 시학의 두 축을 사랑의 시선으로 아우르는 김정열만이 가지고 있는 인생관을 바탕으로 튼튼한 언어의 성을 쌓는 것이 김정열의 과제로 남는다.
언제나 새로운 출발은 설레임과 두려움을 수반한다. 보다 깊은 성찰과 시를 구성하는 방법론의 탐구는 김정열의 시 세계를 한층 높은 반열로 이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탐욕을 멀리하고 청정한 마음의 들판을 가꾸기를 원한다. 분쟁을 멀리하고 화합과 평등의 세계를 찾아가고자 한다. 시인은 어둔 밤길의 등불이 되기도 하고 천상에서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기도 한다.
오늘의 시인들이 노래해야 할 것들, 오늘의 독자들이 가슴에 담고 싶어하는 순수의 세계가 여기 한 편의 시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
아미쉬 마을에서의 명상
뉴욕에서 차로 세시간 남쪽 펜실베니아주
랑카스터시 동쪽에 아미쉬 마을이 있습니다
TV도 없고 전화도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어요
이곳에는 학교도 8 학년까지만 있습니다
농사짓고 집안 일만 배워도 충분하답니다
검은 옷 입은 남자들과 케이프 쓴 여자들이
차도 아닌 마차를 타고 다니는 시골입니다
오늘도 다우존스지수는 기록을 갱신하고
쇼핑으로 뮤지컬로 뉴욕은 대만원이었고
애틀랜틱 시티는 도박으로 밤이 모자라고
워싱턴정가는 새해예산으로 시끄러웠다죠
석유가 나오는 큰 유전을 발견해놓고서도
슬며시 덮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는
조상의 믿을 수 없는 일화도 간직하고 있는
아미쉬 사람들 그저 소박하게 사는 모습으로
욕심을 줄이며 사는 게 힘들지 모르지만
그게 오히려 알차고 행복하게 사는 거라고
조용하지만 큰 울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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