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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발해(渤海)의 한 우물터에서 윤준경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 10. 22:27

발해(渤海)의 한 우물터에서             윤준경



그때 작았던 것들은 커지고 그때 컸던 나는 점점 작아져서 이제는 길길이 우거진 수풀 사이 물벌레의 서식처일 뿐인데, 내 위에 뜨던 달과 별, 스치던 바람과 나에게서 나르시스를 찾던 많은 소년과 소녀의 얼굴을 기억할 수 없고, 아직 샘물이 솟아올라 내가 우물이었음을 기억할 뿐인데, 다만 또렷한 것은 그때 드리운 많은 그림자들이 내 주위를 돌며 두런두런 이야기 한 일, 맑은 물이 찰랑거려 밤새 잠들지 못하던 내 귀에 분명, 지금 음흉한 칼질로 나를 파헤치는 탐욕스런 저 소리가 아닌, 퐁당퐁당 몸속으로 번져오던 두레박질 소리, 나의 파문을 비추던 선한 눈동자 그리고 언제나 하얀 옷을 입은, 장대한 기골을 가지고도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쓸쓸히 넘어가던 그들이 나의 이웃이었던 것을......., 모를 일이다 천년이 넘게 버려졌던 나를, 지금 미친 듯 고요한 음부에 손이 뻗쳐오는 것은....



 이 시의 키워드는 ‘발해’, ‘우물’, 그리고 ‘나’이다. 더 적확하게 말한다면 이 시의 화자 話者는 ‘나’이며 ‘우물‘이다. 이 키워드의 공통점은 ’잊혀진 존재라는 것이다. 발해는 최근래에 이르기까지 잊혀진, 우리의 과거의 나라이며, 우물은 용도가 다되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우물로 환치되어 있는 ‘나’ 역시 나이 들어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천년이 넘게 버려졌던 나‘ 인 까닭에 세간의 주목에서 벗어나 있는 격절의 존재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이 시는 정밀하게 엮여져 있는 세 개의 키워드를 풀어낼 때 제대로 그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 “그때 작았던 것들은 커지고 그때 컸던 나는 점점 작아져서”는 시간의 성쇠에 자신의 세상살이가 위축되어 가는데 발해와 우물과 나는 ‘잊혀짐’의 공통분모 안에서 그 ‘잊혀짐’을 강화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시의 구조적 특징은 산문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논란과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산문시’의 정의내림이다. 혹자는 산문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하더라도 생략과 압축, 리듬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며, 혹자는 일상적 회화 會話를 구사한다 하더라도 시의 중요한 효과인 이미지를 추출해 낼 수 있다면 산문시는 충분한 존재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산문인면 산문이고 시면 시이지, 혼종교배의 모호한 형식을 가져야 하는 지에 의문을 품는다. 나는 ‘산문시’의 형식을 詩作에 임하는 시인의 심리적 상태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시인이 한 대상에 집중할 때. 다시 말하면 그 대상의 공간적 위치와 시인의 심리적 응축과 일치를 강조하려 할 때 산문시의 위력은 상상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산문시가 산문이 아니고 여전히 시의 영역에 머물기 위해서는 산문이 가지지 못하는 장식적 요소, 즉 비유의 활용 빈도가 높고 깊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한 눈에 이 시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쉼표로 연결되어 있는 句는 일반적인 시의 행갈이를 의미하면서 전체적인 하나의 이미지 구축을 향하여 달려간다. 그러나 하나의 이미지를 구축한다고 단정지어버리면 우리가 숱하게 만나는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낡은 정의에 부딪친다. 분면히 시는 메시지의 전달이아니라 이미지의 전달이다. 한 마디로 시가 전달하는 것은 ‘느낌’이지, ‘정보의 전달’은 아니다. 역사를 퇴행하여 볼 때 발해는 이미 이 지상에 없는 과거의 영광을 상징한다. 발해의 강역은 이미 우리의 영토가 아닌 까닭에 “언제나 하얀 옷을 입은, 장대한 기골을 가지고도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쓸쓸히 넘어가던 그들”은 망국의 화한을 담은 우리의 선대들이다. 그러나 이 시를 유적지 탐방의 기록쯤으로 읽어낸다면 너무 허무한 일이다. 이 시를 살아 있는 오늘의 시, 나를 증언하는 시로 읽어내는데 “모를 일이다 천년이 넘게 버려졌던 나를, 지금 미친 듯 고요한 음부에 손이 뻗쳐오는 것은....” 으로 마감하는 마지막 구절은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


 잊혀진 듯 했지만 여전히 나를 살아 있는 나로 만든 것은 욕망이다. 나의 음부로 뻗쳐오는 자연의, 우주의 손길은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행위를 상장한다. 지표로 솟아오르는 샘물은 찾는 이 없어도 솟구쳐 오르고 흘러 넘친다. 제도와 관습으로 옭아맨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주와의 합일을 욕망하는 육체의 메시지를 거부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의미를 하나 이상 함유한다. 여러 개의 의미가 서로 얽히고 병치되면서 분명한 메시지는 분화되고 모호해 지면서 느낌으로 남는다.


‘발해(渤海)의 한 우물터에서’라는 시의 제목은 시인과 대상의 거리가 존재하며 따라서 시에 드러난 우물은 객관적 상관믈임을 암시해 준다. 즉, 이 제목은 ‘발해(渤海)의 한 우물터에서’  다음의 (   ) 안에 들어가는 내용이 시임을 밝힌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유감이다. 시 속에의 나 는 우물인데 시의 제목은 발해의 우물터에 선 시인의 술회임을 이실직고 함으로써 시를 읽는 긴장감을 상쇄시킨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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