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당신
신채린
여보는
같을여, 보배보 자를 써서
보배같은 사람이란 뜻이란다
당신은
당할당, 몸신 자를 써서
내 몸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여보 당신이라는 말속에는
그대를 내 몸처럼 아끼고
보배처럼 귀히 여기는 마음이 깃들어 있단다
여보, 당신,
알고 보면 참 아름다운 말이란다
부를 때마다
정情이 새록새록 깊어지는 말이란다
여보!
당신!
다정하게 불러 보자
자꾸자꾸 불러 보자
보배 같은 그대, 내 몸 같은 그대 얼굴에 드리운
어둔 그늘 걷어내고
활짝 웃게 해주자
행복하게 해주자
잔뜩 무게 잡고 시대의 아픔과 무의식의 지하 동굴을 헤매다 문득 한 줄기 햇빛을 마주하는 순간, 이 시는 상쾌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거추장스러운 비유의 장식도 고매한 인격의 성취도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 의미하는, 심상 心象의 모사 혹은 재현이라는 전통적 시관에서의 벗어남이 결코 출중한 학식이나 경륜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예리한 통찰력과 직관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이 시는 증명하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 본다면 예술의 층위는 그 높낮이, 넓고 좁음, 깊고 얕은 사고의 잣대로 함부로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는 밀과도 상통한다는 것이다.
일단 시는 보편적 인식의 상투성을 넘어서야 한다. 이 세상에 질펀하게 깔린 수많은 교훈과 미담, 절제되지 않은 정서의 무분별한 토로는 시의 난해성을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쓰이고 있다. ‘시는 쉬어야 한다’는 명제는 옳지만 교훈과 미담. 개인적 정서의 표출이 설명으로 끝난다면 쉬운 시의 정의에서 한참 벗어나는 얘기다. 형상화 形象化 즉 리듬과 비유에 의한 이미지 는 어느 시를 막론하고 갖추어야 할 충분조건이다.
「여보 당신」은 비유나 이미지에 의한 구성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이 시는 시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이 시는 우선 상식의 상투성을 뒤엎고 있다. 아니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살을 외면하고 있는 수줍고 인색한 우리의 자화상을 비판하면서 충분한 리듬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으므로 「여보 당신」은 분명 시임에 틀림없다
여보 女寶와 당신 當身의 뜻 풀이가 맞는지 틀리는지 사전을 뒤적거릴 필요가 없다.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뭔가 어색해서 누구 아빠 누구 엄마, 혹은 그보다 더 못한 낱말로 백년해로 하겠다고 서약한 사람을 호칭하는, 약간의 부끄러움과 약간의 권위의식에 빠져있는 그릇된 인식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여보와 당신처럼 살겨운 말을 짐짓 외면한 채 ‘사랑’을 바겐세일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이혼이 급증하는 현실은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실천의 퇴적이라는 자명한 원리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것보다 사랑하기 위하여 결혼을 한다는 마음이 더 소중하지 않겠는가!
‘ 여보’ . 입안 에 우물거려 본다. ‘ 당신’ 이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린다. ‘보배 같은 그대, 내 몸 같은 그대’ 를 자꾸 부르다 보면 ‘그대 얼굴에 드리운 어둔 그늘 걷어내고’ 서로서로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소박한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직접, 지금 해보는 일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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