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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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짧은 감상)

검침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9. 1. 27. 00:51

 검침원

                      전건호


대문 좀 열어주세요

당신을 검침하러왔거든요

얼마나 피 뜨거운지

에돌아 온 길의 경사 어떠한지

엉성한 거푸집에서 삼킨 음식과 한숨도 점검합니다

환희 가득한 시절 은밀한 속삭임

천당과 지옥 넘나들던 순간

계량기엔 다 기록되어 있어요

생의 고비마다 쿵쿵 뛰던 심장박동

무모하게검침원 역주행한 흔적도 점검합니다

과부하 걸린 생 까치발 뛰던 순간

다 검침해 청구할 겁니다

당신 생 저울질한다는 거

물론 완강히 거부하실 거예요

인정할 수 없다고

쓴 게 없다고 도리질 하겠죠

하지만 소용없어요

블랙박스 속 당신 지나온 길

선명하게 기록된 걸

난들 어쩌겠어요



 언제부터 인간은 은폐를 꿈꾸었을까? 들판에서 숲 속으로, 숲에서 동굴로 찾아들면서 비로소 갖게 된 방 房의 욕구, 오늘을 은밀한 익명 匿名의 시대로 규정한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의 발효가 필요했을까? 그러나 정말 익명의 삶은 행복한 것인가?


 공동체의 삶은 사라졌다. 개인의 이익에 따라 조직이 만들어지고 필요에 따라 뿔뿔이 흩어진다. 연대감은 사라지고 유목의 흔적은 정처 없다. 은폐를 꿈꿀수록 인간은 고독해진다. 은폐의 다른 이름은 그래서 엿보기이다. 레이더가 그렇고 영화가 그렇다. 타인의 행동과 은밀함을 엿봄으로서 느끼게 되는 쾌락은 타인과의 직접적인 접촉과는 또 다른 쾌락을 유혹한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유쾌하지 못한 사건들, 도청과 해킹들은 익명의 수많은 방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대가 아무리 멋진 정장과 품위를 갖추고 은행창구에 선다고 해도 주민등록번호 하나면 그대의 신용상태와 부채 내역이 고스란히 상냥한 행원의 모니터 속에 뜨게 되어 있다. 인터넷으로 넷트워킹된 그대의 신상은 그대의 삶에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에게 유포되고, 가공된다. 끊임없이 독버섯처럼 벌어지는 사건들 앞에 우리는 무방비의 포로가 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또 하나의 발명품을 만들어낸다. CCTV 가 바로 그것이다. 나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기꺼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비디오테이프에 님겨 두는 일에 동의한다.   


 「검침원」은 공동체 삶을 버리고 익명의 그물에 스스로 갇혀버린 현실을 그리고 있다. 대문 좀 열어주세요/ 당신을 검침하러왔거든요 는 대문이 열리고난 후, 검침이 끝난 후 검침원이 그이 방문을 알리는 사후 공지에 불과하다. 이미 노출되어버린,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은 공동체 삶을 뛰어넘어버린 후의 저주이다. 「검침원」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이 시에서 숙고해야 할 사항은 오늘이 상황에 대한 복기가 아니다. 우리는 검침원이 어떤 존재인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함부로 나의 생을 저울질한다는 것에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더라도 ‘난들 어쩌겠어요’ 라고 대답하는 냉혈한의 정체에 대해서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시 「검침원」이 정보의 바다에 노출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되찾아야 한다거나 모순적 상황을 고발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 혹 시인의 의도가 그렇다면 - 이 시는 시 poetry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논구하게 만드는 단초가 될 것이다.


「검침원」은 이 시가 끝나고 난 후에 독자들에게 암묵적으로 던지는 문제를 상기할 때 이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검침원은 누구인가?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결구는 그 ‘나’도 무엇인가에 의해서 조종되고, 억압받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검침원은 단지 하수인에 불과하다. 검침을 강요하는 우두머리는 정체를 보이지 않는다. 검침원은 누구이고 검침을 사주한 자는 또 누구인가?


 나는 이 시대에 한물 간 신 God, 양심, 윤리와 같은 유령을 그리고 싶은 욕망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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