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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치마지락에 나린 햇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5. 2. 20:28
 

팔공산 치마지락에 나린 햇살

                           - 파계사 이야기

  

   

  이런 핑게 저런 핑게로 대구에 다녀왔다. 대구의 진산 팔공산(1129미터)은 대구 시가지에서 100리쯤 떨어져 있어 멀리에서 보기에도 여유로워 참 좋다. 아침의 팔공산, 수묵화의 빛깔로 담연하고 해가 남으로, 서쪽으로 기울어 가면서 그 넓은 품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이 한눈에 평화롭기 그지없다. 동서남북으로 팔공산에 터를 잡은 절집은 수도 없이 많다. 동화사를 중심으로 파계사, 부인사가 서쪽으로 자리잡고 팔공산 능성고개를 한 바퀴 넘으면 은해사가 있다.

 

  토요일 아침 일찍 동화사를 들렀지만 최대 최고를 지향하는 못된(?) 습성은 이 고색창연한 절집을 편안하지 못하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찜찜하다. 관봉의 약사불과 짝을 이루어 약사대불을 조성하였는데 신라시대 이후로 동화사는 절집으로서의 영화를 마음껏 누린 대찰인 것만은 확실하다.

 동화사에서 팔공산 순환도로를 타고 파계사로 향한다. 팔공산의 무릎정도를 파고든 도로는 차도 많지 않고 인적도 드물어 초겨울의 질펀하게 깔린 포도밭의 정경을 가슴에 담아둘 수 있다. 지지난해 겨울 처음 파계사를 찾았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나온다. 고적한 산길을 몇 구비 돌아가야 만나는 把溪寺. 그 정경을 그린다면 아래의 시가 적격이다


  八公山 把溪寺


               박희진 (시집 百寺百景중에서)


 파계사 진입로는 울창한 숲길,

 좌우편 아홉 개의 물줄기를 하나로 모아서일까.

 계곡엔 맑고 차가운 물이

 철철 흐르매, 그냥 발 담그고 쉬고 싶구나.


 鎭洞樓(진동루)앞의 넓은 마당에는

 느티나무, 전나무, 은행나무 거목들이.

 이곳 저곳 눈에 띄는 돌축대가 아름답다.

 이 유서깊은 고찰이 英祖(영조)때엔 왕실의 원찰로도.


 법당인 圓通殿(원통전)의 관음보살 뵙고 나서

 다시 사찰의 규모를 살피니,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


 정말 알뜰 살뜰 잘도 가꾸어진

 절임에 틀림없다. 주변의 울창한

 산림과 어울려서 그윽하고 한적한 맛이 좋구나


 일주문은 매표소에서 한 구비 산길을 걸어야 만날 수 있다.저 앞에 한 여인이 걸어가고 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고개를 돌린다. 누구일까? 그 여인도 나도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생각이 번득인다.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을까? 왜 혼자서 왔을까?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이 인연, 물소리 차갑게 골짜기를 내려가고 그 여인은 왼쪽으로 꺾어들어 암자로 향한다. 그래, 바로 이 것이다. 그윽하고 한적한 맛, 人賴 가득한 세속도시에서 밟으면 소리나는 정적을 듣는 즐거움을 무엇으로 바꾸랴, 사람과 사람만이 말하는 세상에서 벗어나 느타나무, 전나무, 은행나무의 속 깊은 목소리를 듣고 그들이 내게 말하는 그 무엇을 알게 모르게 갸우뚱거리는 즐거움을 무엇으로 형용하랴?

 나는 불자가 아니다. 그저 귀동냥, 눈동량으로 받은 알량한 지식만을 가지고 산사에 오르는 것은 오래된 것들 속에 묻어있는 옛것의 때묻음,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불상과 석탑같은, 불교의 유적에 대해서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승들의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목을 경청하는 것도 가볍지 않은 일이겠지만 아무런 발복과 기원을 가지지 않고서 그저 나그네로 떠도는 생각들을 모아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 자리에는



  그 자리는 늘 비어 있습니다

  그 자리의 주인이신 그대는

  나그네처럼 오셔도 좋습니다

  손님처럼 오셔도 좋습니다

  그 자리의 느티나무는

  늘 그자리에 있습니다


 

  오는 사람 마다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그 자리의 나무들 사이에서 저 아득한 아랫 세상을 내려다보니 뽀얗게 햇살들이 산으로 밀려올라오고 있다. 사방을 둘러본다. 산기슭에 감나무 한그루 빨간 감들을 가득 달고 있다.공짜라면, 돈 되고 소용되는 일이라면 사람들은 얼마나 속물스러워 지는가, 지난 가을 가로에 늘어선 은행을 따가지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 깊은 산속 밤 주우려고 돌멩이로 나무를 후려치는 사람들, 오래 살아보겠다고 이른 아침부터 나무에다 몸을 부딪쳐 나무들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들, 여기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저기 감나무의 감들은 산 짐승들의 겨울나기 음식, 참으로 맛있어 보인다. 보물처럼 보인다.


 

   겨울 파계사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지나쳐버린

   삶 또는 죽음



   헝크러진 바람 한꾸러미

   대숲에 놓아주려

   흔적없이 푸르른 웃음으로

   전생을 걸어가려 하네

   아픔을 잊고

   아픈 다리까지 잊어버릴 때

   나무들이 뿜어내는 침묵이

   더욱 짙어가는 향기로 퍼져가고

   새들이 날아가네

   수신될 수 없는 전파처럼

   다시 만나야 할 곳으로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쉽게

   낙엽대신

   반야심경 독경소리가

   우수수

   발 밑에 떨어졌네


   처음 파계사에 다녀와서 이 시를 썼는데 지금 둘러보니 대숲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을 내가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대숲을 없애버린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분간이 되지 않는 것은 마음 뿐, 있었으면 어떻고 없어졌으면 또 어떠한가 색증시공, 공즉시색, 진공의 참다움은 마음의 차별과 유무의 집착 망상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원통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이 낙엽소리처럼. 반야심경 독경소리처럼 뎅그렁거리고 있다. 댓돌에 걸터앉아 한참을 그 소리 듣는다. 나무가 흔들리고 풍경이 소리를 내니 그 어떤 바람, 그 어떤 인연이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손을 뻗고 손을 펼쳐 잡아보려고 해도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원통전 벽면을 따라가 본다.

 

 

 

   절집은 화려하다. 부처님의 광명의 예지가 온 누리에 펼쳐져야 한다고 했던가! 서원이나 향교 같은 유학의 본당들은 겉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자리집고 치장을 하지 않는 것을 본령으로 삼았다. 그런데 절집은 꽃창살이며, 단청이며 탱화며..... 색색깔로 치장해 놓은 것이 마치 새색시 분단장 한 것 같다.대웅전에는 어느 절이나 부처의 수행과정이나 설법의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해 놓기 마련인데 이곳은 참으로 별나다.

  그림을 그리고 제목을 붙인 화공의 깊은 뜻인지 아니면 실력이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는 지, 옛날 이발소에서 본 듯한 그림들이 한문제목을 달고 있는 것이 넉살스럽다.

 

 

 

 

  精進樹下修禪僧( 나무아래 수도하는 선승)의 표제가 붙은 그림은 맨 위쪽에 붉은 태양이 떠올라 있고 그 밑에 나이애가라 같은  거대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데 정작 수도하는 선승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나무에 기대어 졸고 있는 것이 아닌가


  高僧幽樓(고승이 누에 깊이 들다)의 표제의 그림은 폭포가 보이고 때는 봄이며 누는 보이지 않고 모옥이 한 채 있는데 동자가 지금 막 마당을 쓸고 있는 풍경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누는 보이지 않는다. 누가 없으니 어디에 선승이 있을꼬. 두리번 거리다 보니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누를 찾는, 선승을 찾고 있는 헛탕질......


  또 하나의 그림에는 그림 위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다. 작자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컴퓨터를 친 시 한 구절


  마음. 47



  마음에 근심 없으면

  날마다 좋은 날

  마음에 번뇌 없으면

  날마다 기쁜 날


  사랑도 미움도

  마음에서 비롯되고

  시기도 질투도

  마음에서 비롯한다


  한 마음 놓아버리면

  새 마음 살아나서

  사는게 즐거운

  사바가 정토러니



  발복을 하려면 우선 내 마음을 잡아야 한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탐진치의 삼독을 인식하여야 한다. 아래 동네 고관대작들의 짓거리들이 다 주먹 한 줌도 안되는, 뼈도 남지 않는 그 마음을 있는 것이라고 있기 때문에 채워야하는 단지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더냐, 마음은 있는 것도 그렇다고 없는 것도 아니니 그저 좋은 생각, 나만큼 남도 생각해 주고 나에게 감사하는 것만큼 남에게도 감사할 줄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겠느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저녁 땅거미가 먼저 산 밑으로 내려간다. 어둠이 와서 길 잃을 걱정이 나를 잡아끈다.

 이리로 와 봐. 재주를 넘듯 새 한 마리가 후르륵 소리를 내며 겨울 하늘을 치고 올라간다

  

* 파계사는 신라 애장왕 5 년( 서기 804년) 창건된 동화사의 말사이다. 파계사란 이름은 절의 좌우 계곡에서 물줄기가 아홉 개 흐르는데 이 물이 흩어지지못하도록 모은다는 뜻으로 진동루 바로 밑에는 이 물들을 모으는 저수지가 있다.

* 영조의 願刹로서 영조의 어필 천향각의 편액이 있으며 이 절의 대웅전격인 원통전은 周圓融通 즉 '진리는 두루 원만하여 모든 것을 통하게 한다'는 뜻으로 관세음보살의 불격을 표시한다. 다른 말로 한다면 관음전이다.


* 파계사 매표소 바로 앞에 파계골 식당 : 구수한 시골인심을 느낄 수 있는 주인장이 손수 내놓은 설렁탕 맛이 좋았는데 손님이 없어 휴업 중이다. 식사를 하려면 큰 길 못미쳐  관광단지나 주변 레스토랑을 찾아야 한다.


* 팔공산 가는 길은 시내에서 승용차로 20분이면 된다. 팔공산 안내팜이 달 되어 있으며 서울에서 진입할 때는 경부고속도로 북대구IC나 동대문IC에서 내려서면 된다.

* 동화사로 가서 팔공산 순환도로를 이용하든지 파계사로 먼저 빠져서 동화사 쪽으로 방향을 잡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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