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驕慢을 버리다
저녁을 먹고 난 후 근육통이 생기더니 갑자기 이가 저절로 딱딱 부딪치면서 오한이 몰려왔다. 두꺼운 이불을 세 개나 덮고도 발이 시려워 양말을 껴 신었는데, 거기다가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식구들은 다 잠들고, 약을 몇 알 삼켜도 오한과 두통, 그리고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텅 빈 공간에 혼자 누워 있으려니 공포마저 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에의 공포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살 수 있으려나 하는 막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몸을 일으켜 전등을 켰다. 새벽 2시, 눈이 빠질 듯이 아파 눈을 감으면 헛것이 망막에 몰아쳐 오고 다시 눈을 뜨면 내 앞에 펼쳐진 풍경들이 빙글빙글 회전을 하는 통에 다시 눈을 감고... 열기 탓인지 가슴이 조여오고 그저 속수무책으로 밤을 견뎌내야 하는 무력감이 밀물처럼 몰려오는데,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들이 꼬마전등처럼 깜빡깜빡 의식 사이를 점멸 하는 것이었다.
그 때 몽롱한 의식 속에서 또렷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나의 열렬한 비판자이면서 나를 한없는 슬픔과 서정의 세계로 젖어들게도 하는 그는,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기만 하면 여지없이 독설의 화살을 내 가슴으로 날려 몇 날 며칠을 상처를 곱씹게 하는 존재였다. 독설이라 하면 첫 째를 놓치지 않는 나이지만, 나는 그에게 그 독설을 실행해 본 적이 없으니 천적이라고나 할 수밖에, 거기다가 한 번도 나는 그를 미워하거나 내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적이 없으니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다.
넋두리를 거듭하며 새로운 경지를 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며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만년필을 꺾어버리거나 焚書를 감행할 때마다 그는 따뜻한 격려로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꿈 없이 사는 몰골을 내버려두지 않고 끝없는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그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지금 이 글도 쓰지 못하였으리라. 그는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나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와 여행을 갔었다. 거의 하루 종일을 운전을 하는 강행군이었다. 여장을 풀면 곧바로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그래도 잠 눈은 밝아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도 조그만 소리에도 금방 눈을 뜨는 나였다. 딸깍하고 전등 켜는 소리,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눈을 뜨니 그는 자신의 침대에서 불을 켜고 책을 읽는 중이었다.
'아니, 잠 안 자고 뭐해요?'
'잠이 안 와서요'
'불 끄고 얼른 자요'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해 불을 껐다.
작년 겨울, 베이징에 간 적이 있다. 내가 자문위원으로 있는 교육기관과 베이징의 교육기관과의 교육협력 체결을 위한 업무 때문이었다. 교육기관의 실무자 ㅇ씨와 같은 방을 썼는데, 밤이면 그의 코골이 때문에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 앞으로 당신하고는 같은 방을 못 쓰겠소. 코 고는 것도 병이니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던지 해요'
나의 힐난에 ㅇ씨는 벌겋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ㅇ씨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글을 밤늦게 쓰거나 책을 보아야 하는 습관 탓에 내가 눕는 곳이 나의 잠자리이다. 쇼파에서도 자고 책상에 엎드려 자기도 하고, 나의 잠버릇이 어떤지 식구들조차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코를 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와 함께 했던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무슨 말 끝에 그가 무심코 던진 말인즉 내가 코를 심하게 곤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무안해 할까봐 잠을 설치면서도 잠이 오지 않아서 불을 켰노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나는 그 때 그가 나에게 베푼 배려에 감사하면서 교만함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만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고 자신의 허물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교만이다. '나는 불우한 이웃을 돕고 있습니다'와 '나는 불우한 이웃과 가진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의 언명은 발화자의 태도를 결정한다. 돕고 있다는 사태는 도움을 받고 있는 대상을 내려다보는 수직적 관계이지만 나누고 있다는 의식은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교만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얄팍한 마음이 교만이다.
나의 코골음은 인식하지 못하면서 ㅇ씨를 책망했던 것도 나의 교만이다. 잘난 척 하고 으시대는 마음, 상대방에게 대접받기 원하는 마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를 생각한다. 그가 퍼붓는 독설과 야유 속에는 나를 이해하고 눈물겨워하는 마음이 들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짧은 글 하나를 교만의 경계로 삼고자한다.
연암 박지원의「공작관문고자서 孔雀館文稿自序」의 한 토막이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얘! 너 이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가 우는구나. 피리를 부는 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게 들려!" 옆의 아이가 서로 맞대고 귀를 기울여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 耳鳴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부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 수레가 덜그럭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하는 것이었다.
『한시미학 산책』, 정민 지음 ,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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