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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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내려가는시냇물(산문)

그는 하찮은 일을 위해 일했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5. 2. 23:12

그는 하찮은 일을 위해 일했다  
                     - 다섯 편의 시와 한 편의 산문

 

한강 유람선 위에서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고행자는 한결같이 일그러진 얼굴과 퀭한 눈과 헝클어진 머리칼과 약간은 썩은 냄새를 풍기는데, 고행자는 한결같이 굶주림의 미소와 약간의 빵 굽는 냄새의 평화를 보여준다.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고행자는 사라지고 있는데, 한 번도 고행자는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이상하다. 우리는 그의 몸을 보면서 그의 정신을 훔치려고 한다. 이상하다 우리가 그의 정신을 훔칠 때  우리는 지독한 구역질에 시달린다. 저기 고행자가 지나간다. 걷다가 넘어지다가 이윽고 온몸으로 기어간다. 고행자는 제 몸을 눕히면서, 제 몸을 오체투지하면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엎드린 그를 숭상하고 엎드린 그를 경멸한다. 그물을 치고, 둑을 쌓고, 댐을 만들고 그를 먹으면서 그를 배설한다. 그가 길이다. 그의 몸이 길이다. 아니, 우리는 그를 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깔아뭉개지는 그는 뭉개질수록 우리의 가슴께로 치올라 우리의욕망을 엿보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저 뱃전에 출렁거리는 그의 힘살에 떠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뿐, 저 먼 뻘밭에 처박히고 저 먼 바다에 출렁거리려고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그를 노래하려고 하는데, 그는 침묵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내 배 위에서 죽어라!
부력과 가라앉음의 아슬한 줄 위에서
한 줄기 바람도 위태롭다 
  
국화에게

 

 

가을이 오면 꽃 피우는 줄 알았다
여린 팔 끝에 움켜쥔 손
펼치면 아무 것도 아닌
속 없는 꽃
바람 부는 길섶에선 볼 수가 없다
어디선가 무더기로 무더기로 팔려와
추모의 댓돌 위에
눈물 대신 꺾인 꽃
국화야
네가  피어야 가을이 온다
네가 웃어야 바람이 한결 낮아지고
네가 울어야 무서리가 진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밤나무 이야기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가부좌를 틀거나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때로는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잘 나가는 봄철 그렇게 보내고
 진득하게 온몸을 뒤트는 욕정의 냄새
 코 막고 얼굴을 찡그리며 지나가는
 우리의 젊음도 저러했으리라
 죄 짓고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처럼
 가시 돋혀 떨어지는 눈물을 가슴으로 받으니
 앞산도 쿵쿵 뒷산도 쿵쿵
 밤송이 하나가 적막을 울리는구나
 가시돋친 채 늙어가는 세월
 스스로 몸을 열어 보여주는 침묵의 돌멩이
 풀섶에 제멋대로 해탈하고 있구나
 
 통화중
  
  
 
열 걸음만 나오면 속세다 누구의 손바닥 안에서 싫증이 나면 늙은 스님은 길가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 자판기 옆의 공중 전화통, 통화중인 세상에서 뚝뚝 나뭇잎이 떨어진다.
자네 출세했구만, 몇 장의 흰 구름, 바쁘게 개울물로 흘러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말인가, 세상 속으로 들어갔다는 말인가
가을이 온통 빈 북 같다 
 
부메랑

 

 

몇 차례
찬 바람과 비가 흩뿌리고 나서야
나무들은 철이 들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가올 겨울에 걱정이 앞서고
그 걱정의 부질없음에 부끄러워하며
물들어 간다
세상에 떠도는 말들
함부로 뱉어댄
애비 없이 떠도는 말들이
이제야 제 가슴에 돌아오기 시작했나 보다
제 발등에 뿌려지는
눈물들
콧물들
청소부들이 정신 차리라는 듯
나무들을 흔들어댄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어
급기야 장대비로 온몸을 후려 패기 시작한다
내 정신의 퍼런 멍울이
몇 점, 안스럽게 매달려 있다

<

 

산문>
 
                그는 하찮은 일을 위해 일했다
                                            
                                                                      나 호 열

 재작년 시월이었던가. 어느 문학 동인회의 초대를 받았다. 여의도에서 유람선을 타고 잠실까지 거슬러 올랐다가 다시 돌아오는 동안 선상에서 시 낭송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강바람을 쐬면서 강을 주제로 하는 시들을 읽고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서먹하고 떠들썩하면 공연히 불안해지는 소심함 때문에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난생 처음 한강 유람선을 타본다는 즐거움의 유혹을 어찌 이길 것인가.....
그러나 시상을 가다듬으려하니 시가 되지 않았다. 노래가 되지 않았다. 품이 넉넉하고 아늑하기로 한강 만한 강이 어디 있을까, 템즈 강, 세느 강, 라인 강, 갠지스나 양자강을 가 본 사람이라면 우리의 한강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자애로운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부질없어 보였다. 막상 조심스레 한강의 숨소리를 들어보니 노래는 없고 신음 소리만 가득한 것이 아닌가. 악몽 같았지만 내 마음에 들어 찬 한강은 고행자의 발걸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릴 적 여름이면 전차 타고 인도교에 내려 놀이 배를 타고 夜遊를 즐기던 강, 광나루 너른 백사장을 가르며 멱을 감던 강, 겨울이면 스케이트 둘러매고 얼음 지치던 청정한 강, 그 강은 온데 간데 없고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패한 낙동강과 다름없어 보이는 측은함만이 가슴에 가득 하였다. 결국 나에게 남은 오늘의 한강의 이미지는 고행자의 힘든 발걸음 뿐 이었다. 유람선을 타고 도시의 야경을 음미하면서 흘러감의 유유자적, 감싸안음을 노래하겠다던 기대는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자신에 대한 야유와 남몰래 내다버린 욕망의 배설물로 가득 찬 고통의 고백으로 나의 시는 시작되고 그리고 끝이 났다. 한강 맑히기 환경 선언문을 다같이 외치며 행사는 끝이 나고 어둠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만큼 구호는 공허하게 사그러 들어갔다.

 

 

1. 가정에서는 합성세제를 많이 사용하지 맙시다.
1. 가정에서는 독극물이나 오염된 물을 버리지 맙시다.
1. 기업에서는 공장 폐수를 함부로 내버리지 맙시다.
1. 기업에서는 물 소비량과 오염을 줄이는 생산공정을 준비합시다.
1. 기업에서는 한 기업, 한 하천 살리기를 적극 실천합시다.
1. 정부와 공공기관은 한강 맑히기 목표를 정하고 추진 상황을 점검합시다.
1. 정부에서는 서울시민으로서 한강 사랑하기 운동을 적극 실천합시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지금 당장 샴푸로 머리 감는 일을 중단할 수도 없고, 세탁기를 물만 가득 넣고 돌릴 자신도 없으며 공장 폐수를 몰래 버리는 기업을 적발하기 위해 잠복 감시를 할 수도 없다. 피켓을 들고 청와대 앞이나 정부 청사 앞에서 한강 맑히기 목표를 정하고 추진상황을 점검하라고 시위할 수도 없다. 그 일은 나보다도 먼저 다른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나니 부끄러움은 불쾌함으로 바뀌어 버린다. 어째든 나는 수돗물을 배짱좋게 그냥 마실 수 있는 용기가 없어 정수기로 걸러낸 물이나 아니면 생수를 사 먹는다. 호언장담했던 한강 상수원의 수질개선은 실패로 돌아갔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한강을 맑게 만들지 못한 이유가 뭘까? 복잡하게 따져들면 한없이 미궁에 빠져들겠지만 한 마디로 질러 얘기한다면 그것은 개개인의 이기심과 공동체 윤리의 붕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수원에 위치한 수많은 위락시설들, 축사에서 마구 버린 분뇨와 농경지에서 흘러나온 화학비료의 잔유물을 처리할 수 있는 정화시설은 막대한 설치비용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거나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겨우 시늉만 내고 있으니 갈수록 우리의 한강은 결국 우리의 목줄을 죄고 마는 것이다. 무분별한 떡밥의 투기로 물의 오염을 증가시키는 태공들의 낚시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눈 앞의 작은 이익에 어두워져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누가 나서서 나무랄 수 있는가?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How Are We To Live?: Ethics in age of self-interest』는 우주적 관점에서의 윤리적 삶을 권유하는 책이다. 이 책의 끝 부분에 소개된 헨리 스파이라는 세계적인 동물해방운동의 리더이다. 평범한 선원이었던 그는 평생 시민운동에 몸담게 된 연유를 어느 날 자신에게 다가온 질문 하나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시인으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고 괴로워 할 때 스파이라의 이 말은 금언처럼 내게 다가왔다. 스파이라 자신의 묘비명에 무엇을 적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는 하찮은 일을 위해 일했다 He pushed the peanut forward' 라고 답한다.
 

 

 한강 유역에 밀집한 공장들, 위락시설들, 축사들은 모두 안락하고 행복한 우리의 삶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끊임없이 소비되어야할 상품들, 음식 찌꺼기와 오물을 배출하는 음식점들,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해주는 돼지와 닭, 그리고 소들이 존재하는 한 한강은 더 이상 맑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한강을 맑게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까닭은 한강의 주인이 우리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강의 주인은 그 강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물고기들, 그 물고기들을 잡아먹는 새들과 더불어 사는 미물들이다. 우리는 자연에 기대어 사는 약탈자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하찮은 일을 위해 시를 쓴다. 아름다운 자연 대신 병든 자연을, 휴머니즘보다는 반 휴며니즘적인 개인의 얄팍함을 고발한다. 섣부른 희망보다는 처절한 절망이 보다 나은 미래를 직시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찮은 시를 쓰면서 하찮은 나를 몰아 세운다. 피터 싱어의 책에는 시인으로서 내가 귀담아 들어야 할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

  나는 세계에 대해 강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다. 단지 나의 만족만을 위해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세계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시인이라면 이 세상에서 나의 만족만을 위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기꺼이 독자들에게 알려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최선의 의무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그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 석가는 悉有佛性으로 풀어 설파했고 공자는 修己治人의 道를 말했다. 아무 일을 하지 않는 듯하나 모든 일을 행하는 자연의 無爲를 깨닫기를 노자는 희망했다.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자연의 법칙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때,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과 대등한 오히려 자연을 정복하려는 허튼 꿈을 꾸게 될 때 닥쳐올 재앙은 지금 이 순간도 충분히 예습되고 있다. 욕망을 소비하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직 인간 멸망의 시간을 늦출 수 있는 기회는 아직 우리에게 있다. 덜 먹고 덜 쓰는 법, 덜 편해지고 느리게 가는 법을 시민교육의 첫 머리에 두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면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 
 

傲霜孤節의 품위로 국화는 사랑을 받아왔다. 한적한 가을 들녘에 바람에 흔들리는 국화는 '뒤안길을 돌아서 온 내 누님 같은 꽃'이다. 그러니 배경 없는 꽃은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국화는 봄에도 피고 여름에도 피고 겨울에도 핀다. 온실 속에서 자란 국화는 뿌리를 잘리운 채 사시사철 조화의 맨 앞에 놓인다. 도축되는 소와 돼지, 그리고 닭들과 마찬가지로 국화는 생명을 거세당하고 인간의 상징에 목을 매달고 마는 것이다.       
 한여름의 진득한 밤꽃 냄새가 지나가면 어느덧 가을이 찾아온다. 서울 근교의 산에도 밤나무가 많아 오며가며 밤을 줍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물지 않으면 밤송이는 가시로 덮혀 있지만 이윽고 여물게 되면 밤송이는 반쯤 제 몸을 연다. 사람들은 서둘러 밤송이를 주으러 산을 헤맨다. 공짜인 자연의 선물을 누가 마다할 것인가... 그렇지만 한 됫박도 안되는 밤을 나누어 가져가 버리면 산의 주인인 다람쥐를 비롯한 뭇 생명들은 무엇으로 겨울을 견딜까? 인생의 의미는 기다려주고 그것들이 필요한 생명들이 다 거두어가고 난 다음에 보물찾기하듯 그것들을 찾는 일이다. 초겨울 낙엽에 묻혀버린 밤송이 하나를 힘겹게 찾아내었을 때의 기쁨이야말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은 경계가 없다. 인생의 진리는 강에도 있고 산에도 있으며 나무에게도 있다. 순창 강천산 강천사의 스님이 그것을 알려 주었다. 절간 앞에 등산객들을 위해 커피자동판매기가 있는데 한 스님이 자판기 커피를 빼고 남은 동전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일면식도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지만 그의 행동거지를 바라보면서 경계 긋기를 좋아하는 어리석음과 시간의 밧줄에 매달려 아둥바둥대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속세를 떠났는데 그는 어디로 전화를 거는 것일까? 아니면 이곳이 속세인지라 피안인 어느 곳, 부처와 통화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런 愚問에 텅 빈 산이 북처럼 울렸다.    
 
 가로수로 팔려 온 은행나무가 매를 맞고 있다. 건강에 좋다는 은행을 줍겠다고 매를 드는 사람들, 은행잎이 약이 된다고 흔들어대는 사람들, 그러고도 악착같이 남아있는 퍼런 이파리들을 떼어내려고 이번에는 청소부들이 빗자루를 휘둘러 댄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때 우리나라의 환경미화원들은 힘이 몇 배로 든다. 길을 길답게 만들기 위해서 쓰레기 자루에 낙엽들이 가득해 진다. 내가 저 길가 은행나무인 것 같다. 전생에 나는 나무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부질없이 해 본다. 인간만이 길을 만든다. 산으로 막히면 터널을 뚫고, 강이 가로막으면 다리를 놓는다. 그 길 가운데 막연하게 서 있는 느낌, 겨울이 깊어갈수록 산에는 사람이 다닌 길만이 선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