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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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에 대하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8. 22. 01:53
 

배신에 대하여


어제 저녁 나는 한 편의 시를 썼다. 우울하고, 침울한 마음이 행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그 시를 쓰고 난 후, 나는 심한 오한과 발열상태에 빠져 온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맑은 시냇물을 본다는 것이 그만

나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

교회의 첨탑, 또는 굴뚝

아니면 구질구질한 골목으로 가득찬 도시

권태에 길들여진 밤고양이들의 붉은 눈

살을 태우는 연기들만이 승천하는

이 곳, 이 생에는 별 볼 일이 없다는 듯이

흙탕물 속에는 미꾸라지 한 마리 없다

나를 빗겨 지나가는 세월의 굉음과

바람 없이도 스스로 떨어지는 그림자

거울을 본다는 것이 그만

이빨 빠진 그믐달을 들여다보고 있다

무작정 우회도로를 지나고 있다는 느낌

신기루를 지나 또 다른 신기루를 향하여

걷고 또 걸으며 꽃 피우는 하루

나는 이정표를 믿지 않는다


                                        - 시 「거울 앞에서」 전문



교단에 처음 설 때 마음으로 새겼던 몇 가지 약속이 있다. 학생들을 공평하게 대할 것, 매 시간 최선을 다하여 강의에 임할 것. 어려운 것을 쉽게 가르칠 것..... 가르친다는 일이 힘들고 권태스러워 질 때, 그저 시간이나 때우고 싶어질 때면 나는 교단에 처음 섰을 때의 두근거림과 감격이 섞인 흥분의 순간을 되새겨 보곤 한다.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학식이 넓고 깊은 것은 분명 아니나, 내가 살면서 느끼고 행동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자랑도 하고, 반성도 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며 체험을 공유하고자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때로는 분필을 집어던지고, 거친 언설로 면박을 줄 때도 허다하지만 수많은 학생들과 가슴과 가슴으로 맞대기를 원하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준 학생들은 의외로 많다.



 수 년간 나는 시를 공부하고자하는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좌를 계속해 오고 있다. 그들은 정규 코스를 밟고 있는 어린 학생들보다는 이해와 판단의 능력 면에서는 현저히 떨어지지만,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끈기는 훨씬 역동적이다. 나 역시 체계적으로 시를 공부한 처지가 아니라 한걸음씩 독학으로 시의 경지를 더듬어온 처지이기에 그들이 어려워하고 아쉬워하는 부분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배운다는 수동적 위치가 아니라 오히려 선생인 나를 가르친다는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하는데, 그러한 수평적 관계는 문학과 인생의 훌륭한 덕목들을 깨우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시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만으로 어떻게든 문단에 발을 들여놓겠다는 조급함으로 자신의 지적 연마를 뒤로 돌려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파악하고 끈기 있게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데 주저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급함이 앞서는 사람들은 쉽게 떠나고, 그래서 매 학기마다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기도 하고, 어느새 인가 슬그머니 더 좋은 선생을 찾아 떠나는 이들도 부지기수이다.

나는 생각한다. 학생은 선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지금은 선생이 제자를 가려 뽑는 세상이 아닌 까닭에 무릇 선생이란 만남과 떠남에 있어 애증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만남과 떠남의 일상사에 초연하기가 어찌 쉬운 일인가!

ㄱ씨는 참으로 글쓰기를 즐겨하고 노력하는 분이었다. 2, 3년을 그렇게 열심히 강좌에 참여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도 조금씩 향상되었기에 때를 보아 모 원로 시인에게 그의 작품을 보여 드렸다.

그런데 원로 시인은 아직은 좀 더 다듬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말씀해 주시므로, 섭섭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있는 그대로 ㄱ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나무가 겨울의 혹한을 견디어야 야물어지듯이 채찍을 받으며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좀 더 기다려 보자고...

그리고 나서 ㄱ씨는 강좌에 나오지 않았다. 가끔씩 격려의 전화를 주고받으며 몇 년이 지나갔다.

어제 저녁, 내가 관여하고 있는 문학 웹진에 게제할 기사거리를 찾기 위해  몇 종의 잡지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중의 한 잡지에 ㄱ씨의 이름이 보였다. 당선소감과 함께 실린 사진을 보니 틀림없는 ㄱ씨였다. ''선생님이 그렇게 애써주셨는데 배신한 거네요'' 옆에 있던 시인이 나의 서운한 마음을 헤아렸는지 위로의 말을 던졌다. 배신이라! 며질 전에 우연히 마주쳤던 원로 시인도 몇 년 전의 그 일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ㄱ씨의 안부를 물었었는데...

아주 잠시 그에 대한 섭섭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결국 그에게 훌륭한 선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나보다는 연장자였기에 사람을 가려 읽는데 나보다는 훨씬 깊은 안목을 지녔을 지도 모를 일. 성숙되지 못한 나의 인격과 더불어 지행합일 하지 못하는 선생으로서의 자질부족에 대해 그는 얼마나 실망했을 것인가! 나는 오히려 그에게 감사한다. 그의 등단은 또 한 번 자만에 빠진 나를 되돌려 세우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아집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나는 오히려 그에게 마땅히 축하의 편지를 보내야만 한다. 군림하고 소유하려는 사람에게는 배신의 의미는 하늘만큼 넓고 무거운 짐이며 치욕이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거울삼아 스스로를 비춰보는 쓰라림은 아주 값진 선물일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