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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초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4. 28. 12:19

예술가의 초상

                                   나호열

 

 예술가는 불멸을 꿈꾼다. 아니 모든 사람이 불멸을 꿈꾼다. 단지, 예술가임을 자각하는 사람들은 불멸에 대한 열망이 좀 더 강하다고 얘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짐멜이 Simmel 이 단순한 생명의 연장 more life 이 아니라 그 본능을 넘어서는 more than life 열망을 가진 존재로 인간을 파악했을 때 예술과 예술가는 비로소 탄생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죽음은 한 편으로는 생의 종결이고 또 한편으로는 생의 완성이다. 인간은 죽고, 예술이 남는다. 시간은 흐르고 대부분의 예술가는 영원히 소멸하고, 소수의 예술가는 작품으로 살아 남는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끊임없이 불멸이라는 화두를 놓고 生과의 대결을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덧씌워진, 허망한 보편적 진리를 향하는 차가운 로고스와, 영감과 정열로 한껏 뜨거워진 파토스 사이에서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한다. 그 고통의 신음은 그의 내부로 메아리칠 뿐, 결코 세인들을 향하여 새어나가는 법이 없다. 이윽고 그 고통이 종말을 告할 때, 그 고통의 集積이며 縮約인 작품은 완성되고 독창성과 새로움이라는 세인의 잣대는 예술가를 완전히 죽여버리거나 영생의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그 狂暴를 견디지 못한 예술가들은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 광인이 되거나 신화가 된다.
 
  해가 갈수록 春來不似春의 불길한 반복이 이어지는 느낌이다. 황사가 불고, 느닷없이 영하의 날씨가 휩쓸고 지나가다가 불현듯 산수유가 피고 매화가 핀다. 갑자기 예술가가 그리워진다, 정치에 귀를 세우고, 경제에 눈길을 돌리는 그런 사이비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림으로, 음악으로, 시로, 소설로, 연극으로, 춤으로 散華했던 그런 예술가의 초상이 그리워진다.
 이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선동의 봄에 꽃 대신 불꽃 같은 삶을 살아간 예술가들을 떠올리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709쪽 짜리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와 『황홀한 명작기행』을 읽으면서 작가의 탄생과 죽음을 몸서리치게 각성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에 가깝다.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 (1932-1963)는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즈TedHughes(1930-1998)와 결혼하고 몇 년 뒤 남편의 외도로 빚어진 별거상태에서 가스를 마시고 자살한 시인이다. 그녀의 결혼과 죽음은 많은 의문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남편 테드 휴즈는 페미니스트들의 공격대상으로 죽을 때까지 그 멍에를 안고 살았다.
아주 오래 전에, 테드 휴즈의 시를 영어강독 시간에 읽은 기억이 있는데, 그와 함께 실비아 플라스의 시도 함께 읽었던 것 같다. 모든 여성의 선망을 함께 받았던 날카로운 지성과 준수한 외모를 지닌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격정에 휩싸여 사랑을 하게되고 결혼하여 두 아이를 갖게 되지만, 두 사람의 성장 배경과 상이한 성격은 그들의 만남을 오래 지속시켜 주지 못했던 것 같다. 버지니아 울프를 동경하고,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지 못했고, 결국 그 죽음을 삶의 한 방식으로, 놀이로 받아들였던 몽환이 오fot동안 실비아 플라스를  여백을 지닌 시인으로 남게 했는지 모른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테드 휴즈에 의해 편집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로 테드 휴즈 자신에게 불리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했다는 의혹을 받은 책이다.

  우리는 종종 천수를 누리지 못한 작가들의 빈 공간에 신화적 요소를 채워 놓고 신화의 반열에 올려진 작가들을 위안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범속한 작가의 내면과 일상은 사상하고, 영롱한 환영은 더욱 짙은 안개로 가리고 난 후 영원히 우리의 머리맡에서 별로 빛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책이 빛나는 것은 신비로 가리워진 천재의 비범함과 영감으로 가득 찼던 한 예술가의 생애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범속한 인간으로 성적 욕망과, 분출, 세속적 명예욕을 지닌 채 그것들을 한꺼번에 포섭하는 예술로 어떻게 달려나갈 수 있었는지를 추적하는데 있다. 로고스와 파토스의 싸움이 예술가가 마주치는 내면의 풍경이라면, 세속적 성공을 염원하면서도 고고한 인간성을 추구하는 이중적 의식의 충돌은 삶의 외피에 해당될 것이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의 짧았던 생애 뿐만 아니라, 테드 휴즈가 그녀를 기리며 88편의 시를모은 『생일편지 』Birthday Letters를 통해서 사후에 더욱 더 아름다워졌다. 이 아득한 아이러니라니!

  한소운 시인의『황홀한 명작기행』은 저자가 마주쳤던 작품들 - 문학 작품에서, 그림, 심지어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의 내용 소개와 자신의 사유를 직조하므로서 독자들에게 글 읽기의 즐거움과 작가와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소통하게 하는 여유를 준다. 연극과 영화의 주인공, 흘러간 옛 가요, 박수근이나 고갱 같은 화가들, 노자와 장자와 같은 사상가들까지 熱情과 狂氣로 가득 찼던 아름다운 藝人들의 모습을 선연하게 보여준다. 평범한 일상에서 보면 우리와 별다르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불후의 명작을 낳고, 불행의 늪 속을 허우적거릴 수 있었는가? 동전의 양면처럼 고매한 인격의 표면과 그 속에 감추어진 비열한 세속적 욕망을 奇行으로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예술가의 행운인가? 아니면 특권인가?
 
  권경업은 이 년 전 여름 인사동의 한 모임에서 만났던 부산의 시인이다. 그는 등반 전문가로 설악산 토왕성폭포 직등을 처음으로 성공하고,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며 산악시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한 시인이다. 우리가 만난 것은 저녁 무렵이었는데, 이미 전작前酌이 있었는지 거의 눈도 못 뜰 지경이었다. 그러니 내게 남겨진 그의 인상은 거칠고 투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신문에서 우연히 그와 조우했다. 생계를 위해서 차린 국수집에서 결식노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그런 독지가가, 봉사자가 어디 한 둘 이겠는가? 그런데, 그 기사 사진 속, 음식을 나르는 그가 음식점 주인이 아니라 진정한 시인의 얼굴로 - 진정한 시인의 이데아가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내게 환히 비추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뜨거운 꽃
 
  권경업
  
 
 아무리 아름다워도, 꽃이
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뛰는 가슴이 없기 때문이다

꽃잎 쉬 바람에 지우지 않는
식지 않는 피 심장을 가진 뜨거운 꽃아
이제는 네 곁에서, 나도
따뜻한 꽃으로 피고 싶다
초라한 삶에도 화사하던
내 생의 단 한 송이 꽃
 
 
 아무래도 예술가는 세상과 싸우면서도 끝내 세상을 사랑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Even among fierce flames / The Golden lotus can be planted
격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이라 해도 / 황금빛 연꽃은 심겨질 수 있다.

테드 휴즈가 실비아 플라스의 묘비에 새겨놓았다는 글이 정수리에 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