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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문화와 예술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5. 5. 02:48
 

지역문화와 예술인


                    나호열(시인, 한국문화예술위워회 지역문화위원)



 문화의 시대. 지역문화나 지역균형발전이니 하는 말들은 어느덧 우리 귀에 친숙한 말들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지역’의 의미가 무엇이고, ‘문화’가 무엇이냐고 되물어 볼 때 얼마나 많은 이해의 차이와 곡해가 있는지 알아채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 만이라도 그 용어들의 함의含意를 되새겨 보기로 하자.


 지역은 중앙과 지방이라는 종속적 개념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 용어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 사회, 경제 전 분야에 걸쳐서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실감하고 있다. 농촌, 산간지역, 어촌, 도서지역의 인구가 격감하고 있으며 그곳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대도시 특히 수도권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거기다가 KTX와 같은 고속 교통수단의 발달은 쇼핑, 교육, 경제활동 등에 있어서 지역의 자생력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수도권 편중현상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이래서는 이 좁은 국토의 대부분이 무주공산이 되고 불모지가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중앙과 지방이라는 낡은 틀을 벗어던지고 다 같이 지역자치제도의 한 단위로서 자결권을 갖자는 제도적 전환이 김영삼 정부의 정책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행정 단위의 자치제도는 각 지역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경제적 편차에 따라 오히려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촉발시키고 여전히 중앙정부의 선처를 기다려야 하는 얄궂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의 균형적 발전은 우리가 모두 함께 풀어나가야 할 숙제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공공기관의 강제적 지방 이전, 산업단지의 조성 등의 인위적인 정책만으로는 풀 수 없을 것이며 님비현상이라 일컬어지는 또 다른 지역이기주의가 분열을 일으키고 있음은 누구나 절실하게 느끼고 목격하고 있는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력하게 떠오르는 것이 ‘문화’의 개념이다. 


 도시로 떠나고 서울로 떠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향토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경제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관이나 산업체가 유치되어야 한다. 도시에 버금가는 질 높은 교육기관이 있으므로 굳이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교육 서비스체제가 갖추어져야 한다. 첨단화된 정보통신 수단의 보급으로 심심산골에서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정보 수집이 가능해지고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의 자긍심이 고취되어야 한다. 만일 이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행복감을 느끼기에 부족하다면 문화의 항목을 곁들이면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오늘날을 ‘문화의 시대’라고 일컫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절대적 빈곤에서 해방되고 정치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이른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느 정도의 생활의 여유가 찾아질 때 비로소 ‘인간다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찾고 싶은 욕구가 분출되기 마련이다. 영화관람, 여행, 독서, 전시회 관람, 스포츠 활동, 외식 등등 우리에게 정신적 포만감을 줄 수 있는 항목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들을 포괄해서 문화 활동이라고 정의할 때 ‘빵 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명제는 매혹적이다.


 선거에 의해서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이 자신의 업적을 펼쳐보이는데 ‘문화’라는 트랜드 만큼 확연하게 드러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웅장한 공연장을 짓고 연주회를 개최하며 공연장의 임대를 통하여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예회관, 도서관 등의 건립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축제 하나쯤을 곁들이면 지역주민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국에 육 백 개에서 천 개에 이르는 축제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물론 모든 축제가 과시용, 전시용으로 개최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역의 특성을 살리면서 외지인들에 의한 관광 수입을 올리는 꽤 괜찮은 축제들도 많으며 국제적인 영화제나 음악축제의 육성, 인천 아시안 게임이나 대구세계육상대회 등의 스포츠 행사나 여수 세계 박람회 유치 등도 지역의 발전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되는 동인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외면적 화려함은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는데 장기적 처방이 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지난 노무현 정부 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문화의 산업화는 자본주의적이고 소비적인 속성 때문에 일반 대중들의 문화의 향유를 촉발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문화 文化란 무엇인가? 소박하게 정의를 내린다면 질박한 것에서 장식적으로의 전환, 야만으로부터 진화하는 인간다움의 느낌을 누구나 자족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 문화를 덧붙이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을 보자. 술, 성, 음식, 정치, 주거, 청소년. 군대 등등의 낱말 뒤에 우리는 얼마든지 문화를 붙여서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단독적이고 개인적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가시적인 행동의 양식이 문화라고 정의될 수 있고  문화는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무형의 가치 즉 정신적 가치를 생산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축적된 개념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그러므로 앞 서 열거했던 바와 같이 인위적이고 가공적인 문화정책이 치명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이 일반 대중들의 능동적 참여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언하건대 정부나 정치적 집단에 의한 문화의 창달은 일반 대중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능동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 지난 10 년간의 실험이 대중들에 대한 일반적인 계몽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것에 소모한 것은 내일의 문화입국을 지향하는데 지나치게 교조적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정말 없는 것일까? 일반 대중들의 자본주의적 문화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까지 고취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그 대답은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민간기구로 출범하면서 내건 “문화의 중심에 예술이 있다”는 깃발이 상징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간과해 왔던 것이 예술(작품)과 예술인에 대한 관심이었다. 경향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다수의 예술인들이 궁핍한 경제적 여건 속에서 분투하고 있음은 익히 아는 바다. 서울이나 그 밖의 광역 단위에서 활동하면서 인구에 회자되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서 악전고투하면서 예술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눈물겹다. 자신이 나고 자라서 그 지역에 뿌리내리고 사는 많은 예술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삼시 세끼 끼니 걱정을 하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세계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도전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각 지역에 문화재단 등의 지원기구가 속속 결성되고 있지만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은 한시적이고 한계적이다. 점점 더 정밀하고 과학화되는 평가도구를 통해서 ‘수월성’이 담보되지 않고, 기획력과 사후 결과가 강력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그 평가는 냉혹하리만큼 차갑다. 그렇다면 문화의 중심에 예술이 있다는 것이 진정으로 표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인들은 대도시에 활동하는 예술인에 비해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감내하여야 한다. 작품의 수월성을 바탕으로 경쟁을 해나가면서 자신이 뿌리내리고 있는 지역 문화의 날줄과 씨줄을 엮어야하는 난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수월성으로 중앙 무대에서 인정받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보다 더 어렵다. 그러하므로 지역의 예술인들은 뛰어난 작품의 생산을 위해서 분투해야하는 것은 물론 애향심을 잃고 타지로 떠나려하는 사람들을 위무하고 자긍심을 높이는데 앞장 서야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예전처럼 일반 대중들이 예술인을 지극하게 대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평등교육의 이념은 지식인= 예술인 이라는 이념을 깨버렸다. 그러면서 다른 한 편에서는 편향되고 왜곡된 교육 정책으로 야기된 예술교육의 약화로 예술을 향유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 오늘의 대중이기도 하다. 관행으로 이어내려온 방식으로는 높아진 대중들의 눈길을 붙잡기도 어려워졌고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도 역부족이 되어버렸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너는 예술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압한 사례는 없다. 예술의 길을 걷는 것은 예술인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며, 그 길이 험로임을 아는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접어들기를 꺼려한 그 가시밭길을 당당하게 걸어들어가겠다는 자유의지를 표명한 까닭에 예술의 가치와 예술인의 위상이 남다른 것이다. 일반 대중들이 감히 걸어가기를 두려워 한 그 길을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 그러면서도 내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과 이 하늘을 아름답게 증언하는 모습을 통해서 같이 살고 있다는 동질감과 마치 성스러운 구도자를 보는 듯한 존경심을 절로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급격하게 대두되고 있는 생활예술의 영역을 기피할 것만이 아니라 그 영역 속에 과감히 들어가 때로는 선구자로서, 때로는 동업자로서 대중들과 호흡할 때 지역 예술인들의 활로는 활짝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대중들의 기호에 영합하거나 고압적으로 자신의 작품세계에 몰입하기를 바라는 것은 다 같이 위험한 발상이다. 그래서 대중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면서 다양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이 그 지역을 대표하고 상징성을 갖는 위치를 확보하려면 다원예술이라는 장르를 눈여겨 볼 필요도 있다. 단순히 장르간의 작품을 나열하는 수준이 아니라 타 장르를 이해하고 포섭하면서 변용의 창조를 꾀하는 것도 활동 영역을 넓히고 확고히 하는 한 방법이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예술인의 위의 威儀는 예술인 스스로가 갖춰야 한다. 영감 靈感과 열정과 더불어 지역문화 현장의 선두에 서 있다는 사명감으로 우리의 분투는 거듭되어야 한다. 최근 문화부가 예술인 복지 향상을 위한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지역문화의 활성화를 위한 문화예술위원회의 정책기조가 변화될 것이라는 조짐도 보인다. 그 내용과 결과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 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우리 예술인들이 만족할 만한 혁명적 아이템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방방곡곡에서 축제의 한마당이 꽃처럼 피어나는 계절이다. 김유정은 춘천에서 정지용은 옥천에서 조병화는 안성에서 윤이상은 통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축제는 성대하다.


오늘을 사는 예술은 고난이지만 여전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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