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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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4

[9] 기다리던 순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간다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9] 기다리던 순간은 언제나 빨리 지나간다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4.11. 03:00업데이트 2024.04.29. 10:18   사람 그리워등  불 켜는 무렵에벚꽃이 지네 人恋[ひとこひ]し灯[ひ]ともしころをさくらちる 일본은 벚꽃 철에 입학식을 한다. 우리와 다르게 4월에 학기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광경은 길을 걷다 우연히 본 도쿄의 어느 초등학교 입학식. 자기 키 반만 한 란도셀(일본 초등학생 책가방)을 멘 아이가 학교 앞 벚나무 아래에서 엄마 손을 잡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때마침 부드럽게 불어온 바람에 하얗게 반짝이는 꽃잎들이 팔랑팔랑 휘날리며 ‘OO초등학교 입학식’이라는 입간판 옆에 선 아이와 엄마를 축복하듯 춤을 추었다. 길 건너..

[8] 토끼와 다로와 목련과 제비꽃과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8] 토끼와 다로와 목련과 제비꽃과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3.28. 03:00업데이트 2024.04.01. 17:24   봄비 내리네나무 사이 보이는바다 가는 길 春雨[はるさめ]や木[こ]の間[ま]に見[み]ゆる海[うみ]の道[みち] 우산을 들고 산책길에 나선다. 촉촉한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자, 신선한 흙 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물기를 머금은 달콤한 봄바람이 뒷덜미를 쓰다듬고, 희고 부드러운 목련 꽃봉오리가 오늘 필까 내일 필까 숨 고르는 소리를 들으며, 벌써 활짝 핀 제비꽃이 보랏빛 빗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본다. 봄비다.에도 시대 사람 오쓰니(乙二·1756~1823)는 종이우산을 썼나 도롱이를 걸쳤나, 봄비쯤이야 그냥 맞아도 좋지 하며 맨몸으로 걸었나. 조록조록..

[7] 문을 열고 폴짝 나오는 생명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7] 문을 열고 폴짝 나오는 생명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3.14. 03:00업데이트 2024.03.27. 10:23  뒤돌아보니내 발을 밟고 가는개구리로다見返[みかえ]るや我[わ]が足[あし]ふんでゆく蛙[かえる] 대지의 문이 열렸다. 봄기운을 느낀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고 밖으로 나온다. 긴긴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 한 마리가 비몽사몽 뛰어가다가 연못가에 선 인간의 발을 밟고 간다. 양말에 구두를 신었다면 개구리에게 발이 밟혀도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게다를 신은 맨발의 발등이라 폴짝 뛴 탄성이 잘 느껴졌으리라. 바야흐로 경칩의 촉감. 뒤돌아보고서야 존재를 깨닫는 시선도 경쾌하다. 에도시대 시인 신토쿠(信徳, 1633~1698)의 하이쿠다.문을 열고 나오는 건 개구리(..

[6] 베개 밑에 넣어두고 싶은 것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6] 베개 밑에 넣어두고 싶은 것 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2.29.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6  떡을 꿈속에고사리 고이 엮어베는 풀베개 餅[もち]を夢[ゆめ]に折結[おりむす]ぶしだの草枕[くさまくら] 가난한 방랑 시인은 꿈에서도 떡을 본다. 저 희고 쫀득하고 몰캉한 것을 딱 한입만 먹어보고 싶구나. 베개 밑에 떡이 있다고 상상하며 잠이 들면 꿈에서라도 떡을 먹을 수 있을 터. 옛날 에도시대 사람들은 해가 바뀌면 베개 밑에 금은보화가 가득 실린 보물선 그림을 넣어두고 돈 많이 벌 꿈을 꾸게 해달라 빌며 잠이 들었다는데, 풀고사리를 엮어 베개로 쓰는 청빈한 시인에게는 더도 덜도 말고 떡 한 점이 그립다. 길 위의 예술가, 바쇼(芭蕉, 1644~..

[5] 강가에 핀 봄소식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5] 강가에 핀 봄소식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2.15.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5   버들강아지빛줄기에 닿으니봉긋해지네 猫柳日輪[ねこやなぎにちりん]にふれ膨[ふく]らめる 날이 한결 포근하다. 우리 집 강아지 연필도 봄바람에 들떴다. 한 번 산책에 나서면 허공에 코를 킁킁대며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 이봐, 봄이야. 이건 봄이라고. 그런데 집에 들어간다? 인간, 감성이 메말랐구나. 조금만 더 돌자. 그런 눈빛. 네 마음은 알겠는데 얼른 가서 오늘의 하이쿠 찾아야 해. 하지만 30분 정도 더 도는 건 괜찮겠지. 그렇게 봄날 강아지 마음에 져서 마을 한 바퀴를 더 돈다. 그럴 때면 탐스러운 꼬리가 한껏 말려 올라가 ‘봄이다, 봄이야’ 하고 재..

[4] 두려움에 맞서는 계절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4] 두려움에 맞서는 계절 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2.01.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5   머지않아 봄매화꽃님 보세요눈 속의 여인 春浅[はるあさ]し梅様[うめさま]まゐる雪[ゆき]をんな 단 한 줄의 편지. 머지않아 봄. 수신인은 매화다. 발신인은 아름다운 눈의 여인. 눈보라 치는 한밤중, 백옥처럼 새하얀 여인이 그윽하게 매화를 바라본다. 매화님, 그간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나요. 이리도 추운 계절에, 그리도 곱게 피어계시다니. 매서운 추위에 맞서는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여인은 엄동설한에 핀 매화가 안쓰러워 짧은 글을 띄운다. 그래요, 봄이 머지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이렇게 하찮은 제가 당신을 응원합니다.이 여인은 누구일까..

[3]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을 때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3]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을 때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1.18.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4  꾸벅 졸면서나에게로 숨을까겨울나기여 居眠[いねぶ]りて我[われ]にかくれん冬[ふゆ]ごもり 아아,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대지진 당시 도쿄에서. 일본 친구와 함께 그날 본 조조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다가 심상치 않은 진동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온 세상이 흔들린다. 신주쿠의 빌딩 숲. 도망칠 곳이 없다. 숨을 곳이 없다. 땅이 파도치니 뱃멀미하듯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의 고층 건물이 앞뒤로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벽 울림이다. 저 벽이 무너지면 나는 죽겠구나...

[2] 새해가 밝다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 새해가 밝다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4.01.04.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3    새해가 밝아생명 또한 그대로밝아오누나 初[はつ]あかりそのままいのちあかりかな 새해 새날이 밝았다. 그 환한 빛으로 만물에 새삼 생기가 도는 듯하다. 신년의 계절어 ‘하쓰아카리(初あかり)’는 한 해의 맨 처음 밝아오는 빛을 이른다. 그 빛이 세상을 비추자, 지상의 생명도 환하게 밝아온다. 새해 첫 빛을 만끽하며 살아 있는 감격을 노래한 이 시는 하이쿠 시인 노무라 도시로(能村登四郎, 1911~2001)가 썼다.새해에는 우리네 얼굴에도 환하게 해가 뜬다. 조선의 서촌에 살며 이런저런 사람 사는 모습을 글로 남긴 김매순(1776~1840)의 ‘열양세시기’에는 “설..

[1] 동짓날 팥죽과 유자 목욕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 동짓날 팥죽과 유자 목욕정수윤 작가·번역가입력 2023.12.21. 03:00업데이트 2024.03.22. 16:52   동짓날 햇살다정하게 다가와무릎에 앉네冬至の日しみじみ親し膝に来る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동지에 해가 짧아져 추워진 줄만 알았는데, 태양이 가장 낮게 뜨니 햇살이 창문 너머 가장 깊숙한 곳까지 다가와 무릎에 앉는다. 데면데면하게 창가에서 놀던 햇살은 어느새 곁에서 속살대는 벗이 되었다. 연중 밤이 가장 긴 동지는 햇살과 가장 다정해지는 날이기도 하다. 북반구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소를 지을 법한 이 하이쿠는 온화한 작풍으로 이름난 도미야스 후세이(富安風生·1885~1979)가 썼다.동짓날 햇살에 다정한 마음이 있다면, 동지팥죽 속에는 쫀득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