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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세설신어

[132] 발호치미(跋胡疐尾)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1. 28. 15:03

[정민의 세설신어]

[132] 발호치미(跋胡疐尾)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1.17 23:03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반대했다. 홍천(洪川)으로 귀양간 뒤 다시 여주(驪州)로 이배(移配)되어 10년 가까이 고생했다. 인조반정 당일 인조는 그를 영의정으로 다시 불렀다. 반정 직후라 민심이 안정되지 않아 여론이 흉흉했다. 이원익이 부름을 받아 가마를 타고 동대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완평 어른께서 오셨다!"며 기뻐했다. 동요하던 민심이 즉시 안정되었다.


훗날 임금이 국가의 원로로 높여 그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자,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이식(李植)이 하례하는 시를 올렸다. 첫 네 구절이 이랬다. "풍운의 큰 운세 되돌아오니, 조정에서 원로에게 예를 표하네. 서울에선 다투어 절을 올리니, 동쪽 살며 오래도록 고생하셨지.(風雲回泰運, 廊廟禮高年. 自洛爭加額, 居東久跋前)"

넷째 구절의 '발전(跋前)'은 "시경" 빈풍(豳風) '낭발(狼跋)'에서 나온 말이다. "이리가 나아가려다 턱을 밟고, 물러서려다간 꼬리 밟아 넘어지네. 공은 큰 미덕을 사양하시니, 신으신 붉은 신이 편안도 해라.(狼跋其胡, 載疐其尾. 公孫碩膚, 赤舃几几)" 발호치미(跋胡疐尾)는 진퇴양난(進退兩難)과 같은 뜻으로 쓴다. 호(胡)는 늙은 짐승의 늘어진 턱밑 살로 멱미레라 부른다. 늙은 이리가 나아가려다 제 멱미레를 밟아 고꾸라지고, 뒤로 물러나려다 제 꼬리에 밟혀 자빠지고 만다는 뜻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죽자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했다. 주공(周公)이 성왕을 도와 섭정(攝政)을 했다. 주공이 장차 어린 성왕을 밀어낼 것이란 유언비어가 퍼져, 성왕까지 주공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가만있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주공은 조금의 동요 없이 동쪽으로 옮겨가 평상시와 다름 없이 태연자약하였다. '낭발'이란 시는 환난에 임한 주공의 늠연한 태도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다.

나라의 여론이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여서 대화도 타협도 실종된 지 오래다. 툭하면 뜬금없는 유언비어로 금세 큰일이라도 날 듯 들끓는다. 물러서면 배신자라 하고, 버티자니 이렇다 할 명분이 없다. 그야말로 발호치미가 따로 없다. 들끓는 시대에 민망(民望)에 부응할 '완평 어른'을 대체 어디서 만나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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