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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세설신어

[133] 매독환주(買櫝還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2. 8. 17:44

[정민의 세설신어]

[133] 매독환주(買櫝還珠)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1.11.24 23:45
 
 
 
 
 

신지도(薪智島)에 귀양 갔던 명필 이광사(李匡師)가 '해동악부(海東樂府)'란 책을 짓고 직접 글씨를 썼다. 정약용이 그 책을 빌려 보았다. 이광사 자신이 득의작으로 여겼으리만치 글씨가 훌륭했다. 다산은 내용만 한 벌 베껴 쓰고는 원본은 돌려주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상자만 사고 구슬은 돌려준 셈이로군요." 다산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네. 구슬이 상자만 못해도 나는 구슬을 사는 사람일세." 글씨가 값져도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해동악부 발문'에 나온다.

홍담(洪曇)이 자제들에게 말했다. "학문의 요체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게 행동하며, 말을 삼가고 행실을 바로 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실질은 버려두고 화려함에만 힘을 쏟으니, 상자만 사고 구슬은 돌려주는 격이다. 깊이 경계하도록 해라." 폼으로 공부하지 말고 내실을 다지라는 당부다.

두 글에 보이는 매독환주(買櫝還珠), 즉 상자만 사고 구슬은 돌려준다는 말은 '한비자(韓非子)'에 나온다. 초나라 사람이 정(鄭)나라로 진주를 팔러 갔다. 값을 높게 받으려고, 목란(木蘭)으로 상자를 만들어 좋은 향기가 나도록 한 다음, 온갖 주옥으로 화려하게 꾸며 장식했다. 길 가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얼마요?" 초나라 사람은 의기양양해서 이 진주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한참 설명한 후 가격을 말했다. "내가 사겠소." 정나라 사람은 돈을 한 푼도 깎지 않고 제 값을 다 치렀다. 물건을 건네받자 뚜껑을 열더니 안에 든 진주를 꺼내 초나라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내게 필요 없으니 가지시오. 음, 상자가 참 아름답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가버렸다.

결과적으로 둘 다 흡족한 거래를 했지만, 뒷맛이 영 개운찮다. 사본축말(捨本逐末), 본질은 버려두고 지엽말단만 쫓아갔다. 초나라 사람은 구슬을 돋보이게 하려고 상자를 꾸며, 상자만 팔고 구슬을 돌려받았다. 그는 남는 장사를 한 걸까? 정나라 사람은 멋진 상자가 욕심났을 뿐, 구슬은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그는 겉치레를 중시하는 어리석은 소비자일까? 겉포장에 눈이 팔려 알맹이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큰 문제다. 하지만 싸구려 구슬을 상자만 그럴싸하게 만들어 파는 일이 세상에는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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