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게 바침 땅에게 바침 당신은 나의 바닥이었습니다 내가 이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던 평생 동안 당신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몸을 굳게 누이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고개를 숙이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이 보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당신은 안개꽃처럼 웃음 지었던 것을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의 힘으로 당신은 나를 살게 하였던 것을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3.11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 구백 걸음 걸어 멈추는 곳 은행나무 줄지어 푸른 잎 틔어내고 한여름 폭포처럼 매미 울음 쏟아내고 가을 깊어가자 냄새나는 눈물방울들과 쓸어도 쓸어도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편지를 가슴에서 뜯어내더니 한 차례 눈 내리고 고요해진 뼈를 드러낸 은행나무 길 구백 걸음 오가는 사람 띄엄띄엄 밤길을 걸어 오늘은 찹쌀떡 두 개 주머니에 넣고 저 혼자 껌벅거리는 신호등 앞에 선다 배워도 모자라는 공부 때문에 지은 죄가 많아 때로는 무량하게 기대고 싶어 구백 걸음 걸어 가닿는 곳 떡 하나는 내가 먹고 너 배고프지 하며 먹다 만 떡 내밀 때 그예 목이 메어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마는 나에게는 학교이며 고해소이며 절간인 나의 어머니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3.07
수평선에 대한 생각 수평선에 대한 생각 그리워서 멀다 외로워서 멀다 눈길이 먼저 달려가도 닿을 수 없는 너를 향하여 나는 생각한다 목을 매달까 저 아슬한 줄 위에 서서 한바탕 뛰어볼까 이도저도 말고 훌쩍 넘어가 버릴까 매일이라는 절벽을 힘겹게 끌어당기며 나는 다시 생각한다 아직도 내게는 수평선이 있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2.26
석류나무가 있는 풍경 석류나무가 있는 풍경 심장을 닮은 석류가 그예 울음을 터뜨렸을 때 기적을 울리며 떠나가는 마지막 기차가 남긴 발자국을 생각한다 붉어서 슬픈 심장의 고동 소리가 남긴 폐역의 녹슬어가는 철로와 인적 끊긴 대합실 안으로 몸을 비틀어 꽃을 피운 칡넝쿨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고요가 저리할까 스스로 뛰어내려 흙에 눈물을 묻는 석류처럼 오늘 또 한 사람 가슴이 붉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2.20
옛길 옛길 당신에게도 아마 옛길이 있을 것입니다. 운하처럼 서로 얽히고 설켜 피를 나눈 길들이 당신의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을 것입니다. 헤어질 때에는 될 수 있으면 뒤로 돌아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얼굴을 마주 한 채로 뒷걸음을 치면서 고통스럽겠지만 조금씩 멀어져가는 당신의 얼굴이 점으로 보일 때까지, 길이 휘어져 더듬더듬 사라질 때까지, 제각기 자기 갈 길을 가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이 지나간 길을 되짚으며 가는 것이 이별이라고 말해야겠지요 옛길은 무너지고 쉬어 간 발자국처럼 들꽃이 피고 가끔씩 하늘이 내려와 가슴을 땅에 대어 보기도 하고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한 옛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먼저 가고 뒤를 따른 것일 뿐 그래서 아직 찾을 수가 없을 뿐 옛길은 자꾸 한 걸음씩 마음속으로 내..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2.02
안아주기 안아주기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1.29
눈부신 햇살 눈부신 햇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1.26
백지 백지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네가 외로워서 술을 마실 때 나는 외로움에 취한다 백지에 떨어지는 눈물 한 장의 백지에는 백지의 전생이 숨어 있다 숲과 짐승들의 발자국 눈 내리던 하늘과 건너지 못하는 강이 흐른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1.22
북 북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1.18
밤에 쓰는 편지 밤에 쓰는 편지 먹을 갈아 정갈해진 정적 몇 방울로 편지를 쓴다 어둠에 묻어나는 글자들이 문장을 이루어 한줄기 기러기 떼로 날아가고 그가 좋아하는 바이올렛 한 묶음으로 동여맨 그가 좋아하는 커피 향을 올려드리면 내 가슴에는 외출중의 팻말이 말뚝으로 박힌다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그의 먼 안부 동이 트기 전에 편지는 끝나야한다 신데렐라가 벗어놓고 간 유리구두처럼 발자국을 남겨서는 안 된다 밤에 쓰는 편지는 알코올 성분으로 가득 차고 휘발성이 강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가 깨어나 창문을 열 때 새벽 하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푸르러야 한다 맑은 또 하나의 창이어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어둠을 갈아 편지를 쓰기 위하여 적막한 그대를 호명하기 위하여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1.15
촛불을 켜다 촛불을 켜다 밝고 맑은 날에는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어둡고 길 잃어 힘들어질 때 저는 비로소 당신 곁으로 달려가 당신의 빌 밑에 엎드리는 작은 불빛입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저는 예비합니다 밝고 맑은 날에도 저는 영혼의 심지를 올려 어둡고 비바람 치는 날이 오지 않기를 사랑의 촛대 위에 눈물을 올립니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1.12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그러나 모든 경계를 허물지 않고 죽지 않을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1.08
가을 편지 가을 편지 당신의 뜨락에 이름 모를 풀꽃 찾아 왔는지요 눈길 이슥한 먼 발치에서 촛불 멀어지듯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꽃 어느 날 당신이 뜨락에 내려오시면 이미 가을은 깊어 당신은 편지를 읽으시겠지요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이 보낸 당신을 맴도는 소리 죽인 발자국과 까맣게 타버린 씨앗들이 눈물로 가만가만 환해지겠는지요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씨앗들은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세요 그냥 상처는 웃는다라고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뜨락에 또 얼마만한 적막이 가득한지요 바람과 놀다 (2022.12) 2024.01.04
연꽃 연꽃 진흙에 묻힌, 그리하여 고개만 간신히 내민 몸을 보아서는 안된다고 네가 말했다. 슬픔에 겨워 눈물 흘리는 것보다 아픔을 끌어당겨 명주실 잣듯 몸 풀려나오는 미소가 더 못 견디는 일이라고 네가 말했다. 바람과 놀다 (2022.12) 202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