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2024/12/12 6

달팽이

달팽이       나호열한때는 달팽이를 비웃은 그런 날들이 있었지세상은 핑글거리며 돌아가고 있는데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겠나 하고집 속에 틀어박혀 공상이나 일삼는 철학자처럼머리 속 황무지를 개간하는 노동이 무슨 필요 있느냐고그러나 어느 날 자급자족 되지 않는 세상에 찬 바람 불어밥 굶고 신문지 이불 삼아 노숙하는 사람이 나임을 알았을 때발 부르트도록 걸어왔던 그 길이 신기루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비록 구부리고 토끼잠을 잘지언정 달팽이 네가 부러웠다집은 갈수록 멀어지고 겨울은 끝내 떠나가지 않을 듯 싶었다-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 2004 이 시는 비웃음과 부러워함이라는 대립적 정서의 마주침에 의하여 전개된다. '나'는 '달팽이'를 비웃고 또 부러워한다. 비웃는 까닭은 첫째 '달팽이'가 ..

[236] 우리는 지금 어디 해당할까

[양해원의 말글 탐험] [236] 우리는 지금 어디 해당할까 양해원 글지기 대표입력 2024.12.05. 23:54    “매일 배구 중계방송을 보는 편인데, 여자 배구만이 가진 아기자기함이 있어 흥미롭다.” 어느 영화배우가 여자 배구 깎아내리는 말을 했다고 비판받자 사과했단다. ‘아기자기’ 때문이라는데. 사전을 보니 ‘여러 가지가 오밀조밀(솜씨나 재간이 매우 정교하고 세밀함) 어울려 예쁜 모양’ ‘잔재미가 있고 즐거운 모양’이라나. 왜 문제인지 잘 모르겠으니 통과! 이어지는 기사에서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온라인에서는 해당 발언이 성차별적이고 여자 배구를 비하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해당(該當) 발언? ‘무엇에 관계되는 것. 어떤 범위나 조건 따위에 바로 들어맞음’이 ‘해당’이니 어색하기 짝이 없..

[61] 산방산으로 가는 배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61] 산방산으로 가는 배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입력 2023.05.19. 03:00  오래전 전시 일을 시작했을 즈음에 나를 기획자로 초대한 미술관과 운영 방식을 두고 설왕설래한 적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전시장 내에서 관람객의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그런 방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작품을 찍는 것만으로 타인의 예술 작품을 훔치는 것이라는 미술관 주장과 작품을 찍는 것은 전시를 향유하는 방식의 하나이니 금지할 이유가 없다는 내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지금은 어떤가. 전시장 내 ‘사진 촬영 가능’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요는 작품을 찍는 것만으로 작품이 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멋진 건물을 찍은 사진은 작품이 될 수 있을..

[204] 고보자봉(故步自封)

[정민의 세설신어] [204] 고보자봉(故步自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입력 2013.04.02. 23:12   청말 양계초(梁啓超)가 '애국론(愛國論)'에서 말했다. "부인네들이 십년간 전족(纏足)을 하다 보니 묶은 것을 풀어주어도 오히려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 걸음으로 스스로를 얽어매고 만다." 옛 걸음으로 스스로를 묶는다는 고보자봉(故步自封)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어릴 때부터 여자 아이의 발을 꽁꽁 동여매 발의 성장을 막는다. 성장하면서 발등의 뼈가 휘어 기형이 된다. 전족은 근대 중국의 낙후성을 나타내는 한 상징이었다. 뒤에 여성을 압제에서 해방한다면서 전족을 풀게 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미 정상적인 걸음걸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발을 꽁꽁 싸맨 천을 풀자 지지해줄 것이 없어 통증만..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실패자’의 운명

실제로 있지 않은 것을 기대하는 ‘실패자’의 운명중앙일보입력 2024.12.03 00:37소설 『스토너』 - 어떤 인문학자의 초상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논문을 양산하기 위해 부심하는 일, 연구비 수주에 전전긍긍하는 일, 대학 랭킹에 민감한 일, 행정 보직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일, 학술기관 회원이 되어 보조금을 타는 일, 정계에 진출하는 일, (준)연예인이 되는 일. 이런 일들이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인문학 교수가 하는 특징적인 일은 아니다. 당신이 경험한 한국의 인문학 교수들은 주로 저런 일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고? 혹시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어떤 유형의 인문학자를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세상과 불화하며 성공·인기 무심사라진 전형적 인문학자상 조명인문학 핵심은 삶에 대한 에로스그 에로..

김영민 칼럼 13:34:26

오늘에 생각해 보는 맹자의 ‘방벌’과 다산의 ‘탕론’

오늘에 생각해 보는 맹자의 ‘방벌’과 다산의 ‘탕론’중앙일보입력 2024.12.12 00:20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우석대 석좌교수동양사회는 고대부터 인의(人義)를 숭상하던 세상이었다. 그래서 지도자는 인의의 정치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이 일어나 지도자를 쫓아내거나 쳐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맹자의 방벌론(放伐論)은 그런 정치철학에 근본을 둔 민본사상이었다. 그래서 탕왕(湯王, 은나라 초대왕)과 무왕(武王, 주나라 초대왕)이 걸(桀, 하나라 폭군)과 주(紂, 은나라 폭군)를 방벌(폭군을 쫓아냄)했던 것을 정당한 주권(主權)의 행사로 여겼던 맹자를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으로 여기는 이유였다.지도자는 인의의 정치를 해야맹자의 철학 더 발전시킨 다산천자도 민중 협의로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