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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세설신어

[204] 고보자봉(故步自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2. 12. 14:08

[정민의 세설신어]

[204] 고보자봉(故步自封)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입력 2013.04.02. 23:12
 
 
 

청말 양계초(梁啓超)가 '애국론(愛國論)'에서 말했다. "부인네들이 십년간 전족(纏足)을 하다 보니 묶은 것을 풀어주어도 오히려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 걸음으로 스스로를 얽어매고 만다." 옛 걸음으로 스스로를 묶는다는 고보자봉(故步自封)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어릴 때부터 여자 아이의 발을 꽁꽁 동여매 발의 성장을 막는다. 성장하면서 발등의 뼈가 휘어 기형이 된다. 전족은 근대 중국의 낙후성을 나타내는 한 상징이었다. 뒤에 여성을 압제에서 해방한다면서 전족을 풀게 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미 정상적인 걸음걸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발을 꽁꽁 싸맨 천을 풀자 지지해줄 것이 없어 통증만 극심해졌다. 그녀들은 결국 제 손으로 발을 다시 동여 전족의 속박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연(燕)나라 소년은 조(趙)나라 사나이들의 씩씩한 걸음걸이가 늘 부러웠다. 어깨를 쫙 펴고 앞가슴에 탄력을 넣어 튕기듯 걷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따라 하고 싶었다. 소년은 큰 용기를 내서 조나라의 서울 한단(邯鄲) 땅까지 걸음 유학을 왔다. 거기서는 다들 그렇게 걸었다. 못난 제 걸음이 더 바보 같아 보였다. '참 잘 왔구나'싶었다. 막상 그 멋진 걸음걸이를 배우려 하니 예전 버릇이 자꾸 걸림돌이 되었다. 어깻짓을 겨우 익히고 나면 발짓이 그대로고, 발짓에 집중하자 어깻짓이 따로 놀았다. 아무리 해도 안 되고, 어떻게 해도 따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실망해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새로운 걸음걸이를 익히느라 예전 자기가 어떻게 걸었는지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울면서 엉금엉금 기어 연나라로 돌아갔다. 이것은 한단학보(邯鄲學步)의 고사다.

발을 싸맨 천을 풀어주고 '너는 자유다' 하는 선언은 무책임하다. 도로 싸맨 발을 보며 '그러니 늘 그 모양이지' 해서도 안 된다. 휠 대로 휜 발등은 전족을 푸는 순간 자유가 아닌 고통만 안겨준다. 그녀들은 그나마 걸음조차 뗄 수 없게 되었다. 조나라 사나이들의 걸음걸이가 멋있어도 잘못 배우면 엉금엉금 기어가게 되는 수가 있다. 그저 있느니만 못하게 된다. 바꾸는 게 능사가 아니다. 바꾼다고 잘된다는 보장도 없다. 변화에도 단계와 전략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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