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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고 온 것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7. 29. 21:46

내가 두고 온 것들
                     김명규
  
  자존심의 뚜껑을 열어 보이는 일이었다. 주홍글씨처럼 구차하게 따라다닌 것은 가난의 산물이었다. 네 차례의 전셋집을 전전하던 남루한 이삿짐. 그 중에서도 나의 처지와 형편을 가장 잘 노출시켰던 것은 문짝이 덜컹거리는 포마이카 장롱이었다. 묶어놓은 촌닭 같은 이삿짐을 주인집 마당 한쪽에 풀어놓을 때면, 한눈에 우리 식구들의 인격까지 평가받는 듯하였다.
 
  다섯 번째 이사는 시내 종점에서도 먼 변두리에 날림으로 집 모양새만 갖춘 내 집을 마련하고서였다. 우리의 생활수준에 걸맞은 후진 동네여서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포마이카 장롱만 던져버린다면 내 자존심의 보호색이 되어 궁색함을 가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나마 여섯 식구의 살을 덮을 이불과 의복을 간수할 데가 없었다. 
  1981년 그 해 남편이 지방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은 무상 배급을 받아가라는 전갈처럼 기쁜 일이었다. 상금 일백만원을 받게 되면 어디에다 보람있게 쓸 것인지 시어머니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였다. 재주는 원숭이가 넘고 돈은 주인이 챙긴다더니 그 날 시상식 자리에서 내조의 노고를 치하하며 상금은 내 손에 전달되었다.
 
  상금으로 자개장롱이나 마련하자고 하는 내 의견에 가족들은 동의하였다. 결혼할 즈음 친정 집이 기울어 혼수를 제대로 못해 보낸 부모의 아픔과 내 생채기의 딱지를  떼어내고 싶은 것이 그때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시어머니와 나는 가구점을 찾아다녔다. 백만원에 맞는 물건은 도무지 눈에 차지 않았고 맘에 드는 것은 턱없이 돈이 모자랐다. 며칠을 헤매다가 동네 아주머니의 주선으로 장롱을 직접 제작하는 공장을 뒤져 그런 대로 괜찮은 것을 주문하였다.
 
  멕시코에서 수입한 소라 껍질로 수공을 한 장롱이라고 하였다. 소라 껍질은 불빛에 반사되어 보석인 양 무지개 빛깔로 찬란하였다. 어머니가 쓰시는 안방에 장롱을 들여놓고 보니 과연 예술품이 따로 없었다. 그 날부터 우리 집의 품격이 높아 보여 그 앞에 서 있으면 온몸에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어머니와 나는 틈만 나면 반질반질 윤이 가시지 않게 닦고, 또 닳도록 쳐다보았다. 먼 훗날 아들이 결혼하게 되면 가보처럼 대물림하리라 마음먹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었고 누가 찾아와도 떳떳하게 눌렸던 기도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순도순 고부간의 미운 정 고운 정을 엿듣고, 우리 집의 한 역사가 묻힌 그 장롱이 거추장스러워진 것은 주거문화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급속히 발전하면서부터였다. 안방마다 버티고 서서 그 집의 부를 상징하듯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자개장롱들이, 이제 가구점에도 언제부턴지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우리도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두 번 이사할 때까지만 해도 그 장롱은 변함없이 소중한 재산이었으며 시를 쓰는 남편의 업적으로 길이 기념할 물건이었다.
 
  이제는 마지막이 아닐까 싶은 일곱 번째 이사는 서울이었다. 의논도 없이 큰딸은 아파트 한 칸을 마련해 놓고 무조건 이사만 오라는 거였다. 삼종지도라던가, 늙어서는 자식 곁에서 의지할 우리 내외는 못 이긴 체 합의하였다. 서울 변두리의 전세 값에도 못 미치는 광주의 오십 평 아파트를 팔고 세간도 대폭 줄여야 했다.
 
  서른 여덟 평으로 집을 줄여 가자니 삼십여 개의 화분과, 이만여 권의 책도, 안방의 장롱도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이삿날을 앞두고 서울에 사는 친구와 통화하면서 그 고민을 나누었지만 친구는 장롱이 수 천 만 원짜리가 아니거든 그냥 던져버리라고 단호히 충고하였다. 이사할 집을 둘러보고 돌아온 후부터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많은 세간을 끌고 가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 골똘히 궁리하였다. 아무리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지만 장롱을 없애는 건 식구를 하나 버리는 일만 같았다. 우리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집안의 기쁜 일 괴로운 일들도 함께 소곤거리며 살아온 식구였다. 장롱을 들여놓고 남부러울 것 없이 우리는 한때 행복했었다.
 
  시장 안에서 중고 가구를 수리도 하고 매매도 하는 아저씨를 찾아갔다. 날카로운 배신의 날을 마음깊이 품고 나선 길이었다. 아저씨는 내 뒤를 좇아 우리 집 장롱을 선보러 왔다. 안방에 들어선 그는 장롱을 보자 실망의 빛으로 경직되었다. 백만 원짜리 장롱이 혹하고 장사꾼의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수 천 만 원짜리라도 헐값에 사서 이문을 보야 할 터인데. 가타부타 말이 없더니 속으로 값을 매기고 있었나 보다. "한 이 만원이나 칩시다." 아저씨는 비웃음을 섞어 내뱉었다. 말문이 막혀 나는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가구점 아저씨를 보내고 나는 몹시 서글펐다. 내 삶의 가치관이 장사꾼의 잣대에 터무니없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과 함께 남편의 자존심까지 내팽개쳐지는 것 같아서였다. 그 일을 내색하지 못하고 혼자서 처분 방법을 모색하였다. 남편이 알면 그도 상심이 클 것이었다. 
  정이 두터워 우리 집 내막을 터놓고 지내던 이웃사촌 은혜네 엄마에게 장롱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주고 가야겠다는 말을 꺼내보았다. 그는 반색을 하며 자기 집에 두고 가면 나를 보듯 정붙여 쓰겠다고 하였다. 우리가 떠나게 되어 그렁그렁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에게 선물하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이삿날, 짐을 다 꾸린 후 낯선 집 안방에 들어갈 장롱의 반질거리는 문짝을 쓰다듬으며 자개장롱과 이별을 나누었다. 남편도 다른 사람이 아닌 은혜 엄마가 쓰기로 한 것에 다소 덜 서운한 눈치였다.
 
 허물을 벗듯이, 삼십 여 년을 살았던 광주 땅에 벗어두고 온 것이 어디 책 가지와 장롱뿐이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청춘의 세월과 숱한 추억을 묻고 우리는 돌아섰다.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일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온다. 새 생활이 시작된 서울에서 다시 또 두고 가야 할 것들을 일궈야겠지. 무등산의 미소 대신 관악의 푸른 정기가 손짓하는 이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