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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 온글문학 인터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6. 2. 28. 13:22

1. 먼저 녹색 시인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시를 통해서 자아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늘 낭패와 굴욕으로 끝이 났고, 그럴 때마다 자신을 여행으로 유배시킨다고 하셨는데 ,축척된 경험으로의 여행인지 아니면 자연으로 떠나는 여행인지, 그리고 정체성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졌는지요.

 

먼저 유서 깊은 문학 모임인 “온글”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이번이 두 번 째 만남이군요. 세상에는 재주가 있어 시를 쓰는 사람과 재주는 부족하지만 뭔가 창작의 욕구와 목적을 가지고 시를 쓰는 사람으로 나눠볼 수 있겠지요, 저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지요. 솔직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관심을 갖고 있고 할 말도 많지만, 그것을 시로 발언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즉, 나에게서의 시는 나에 대한 위로와 다짐 그 이상은 아닙니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행위가 시를 쓰는 이유가 될 테인데 아직도 나는 시의 미궁에 빠져 있고, 삶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으니 문제지요. 여행은 한가로운 여가활동이나 의욕 충전의 목적이 아닙니다. 어디론가 낯 선 곳에 나를 던지는 것이지요. 낯 선 장소, 낯 선 사람들과의 조우 속에서 나는 지금껏 써왔던 방법으로 그 낯 선 곳을 이해하려 하고 낯 선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하지요. 그렇지만 내가 배웠던 의사소통의 방식을 버리고 내던져졌을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존재감을 회복하고 동시에 왜소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숨거나 도피할 곳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릅니다. 남들 만큼은 돌아다녔다고 생각하는데... 글쎄.. 명확한 답변이 되었나요?

 

2. 모든 생명의 고귀함을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현실이 너무 암담하다는 데는 저도 동감입니다. 물이 죽어가고, 어느 날 숲이 파헤쳐지고 인간이 저지르는 형태를 고발하고 반성을 촉구하는 일이 자연의 숨결을 노래하는 일보다 절실하다고 했는데, 작품 ‘북’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도 되는지 또 자신을 북채를 든 사람으로 형상화 시켰다고 보아도 되는지요.

 

엘리어트가 한 말이었나요? 시는 오독의 역사라고... 「북」이라는 시는 꽤 오래 전에 쓴 작품인데, 몇 권의 시집을 내면서도 이상하게 수록하지 못했습니다. 「북」을 말씀하신대로 해석을 해보니 그렇게도 생각이 미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그저 한 말씀만 거들어 본다면 시 속의 “나”는 북채를 든 존재인 동시에 “북”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요는 “북”을 어떤 객관적 상관물로 인식 하는냐에 따라 시 감사의 편차가 있겠네요. 하여튼 이 시가 제가 좋아하는 작품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3. 작품 ‘숲에서 기적 소리를 들었다’ 삶의 이치를 숲으로 비유해 놓은 시 여러 번 읽었습니다. 살면 죽어야 한다는 약속을 쉽게 깨닫지 못한 우리들에게 강한 느낌으로 다가온 시였습니다. 숲에서 기적 소리를 들으려면 오감이 열려 있어야 하고, 생명존중이 우선 되어야 가능 하다고 보는데 그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지난 30년 동안 시를 써 오면서 소득이 있다면 날카로운 마음이 둥글어지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 확고해졌다는 것입니다. 이 시는 북미를 여행하면서 얻어들인 숲과 나무와 그 속에 깃든 여러 생명들에 대한 경외에 관한 기록입니다. 모두에도 말씀드렸지만, 낭만적이고 여가활동으로서의 여행은 저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관광의 목적이 가미된 그런 여행은 가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던져진 상태로 어슬렁거리는 것, 일정에 매이지 않고 떠돌아 다니는 것, 조금 전에 북미라고 뭉뚱거려 말씀드렸지만 더 상세히 말씀드리면 캐나다의 관활한 자연을 자주 마주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도시 곳곳에 자리잡은 엄청나게 큰 숲들, 한나절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 가운데서 받아들인 생각은 충격입니다. 광활하고, 그러면서도 춥고, 자연이 주는 위압감과 두려움,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화되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은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4. 선생님의 시가 지향하고 있는 힘, 선생님께서 지향하고 있는 것, 시가 해야 할 것, 시인이 해야 할 것을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떠올렸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선생님의  언어들이 만들어 내는 건강한 정서가 선생님의 시의 동력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는지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시를 잘 쓰는 재주가 저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나의 시로 세상을 변혁하고 사람들을 계몽하고자 하는 욕심도 없을 뿐 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시인으로 이 세상을 풍미해 보겠다는 생각 또한 없습니다. 이 땅의 많은, 훌륭한 시인들이 하나의 인간으로서는 실패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슬픔을 느낍니다. 시인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에서는 마음을 비우라고 하면서 실제로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면...시도 어차피 살아가는 방편이기도 하지만... 너무 시로서, 시를 씀으로서 뭔가 반대급부를 기대한다면 슬픈 일이 아닐까요... 시인은 見者가 아니라 견자가 되려는 자이며, 시인은 통달한 자가 아니라 통달하려고 애쓰는 과정을 보여주는 존재라는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5. 좋은 시를 어떻게 가려내는가에 대해 많은 이들이 너무 혼돈스러워 합니다. 시인, 비평가 그리고 독자들의 준거가 각기 일치 하지 못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많은 말들이 난무하는  상황입니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시를 쓰시면서 생각하신 것을 알고 싶습니다.

 

 

시 쓰기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지 않을까 한다. 첫째, 쉬운 것을 쉽게 쓴 시, 둘째, 쉬운 것을 어렵게 쓴 시, 셋째,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쓴 시, 넷째,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쓴 시가 그것이다. 첫째는 산문의 수준에 머물고 있어 아직 유치한 단계이다. 둘째는 능력 부족이거나 남을 속이려는 시인의 작품이다. 셋째는 자기도 모르는 것을 쓴 것이니 의욕은 과하나 머리가 아둔한 경우이다. 넷째, 시에 대해 나름으로 달관의 경지에 든 시인의 작품이다. 이 네 가지 유형에 우열의 순서를 매긴다면 우수한 것부터 ①넷째, ②첫째, ③둘째, ④셋째가 될 것이다. 어려운 내용을 쉽게 쓰는 시야말로 시의 상지에 속한다.     질문은 아마도 “쉬우면서 좋은 시”가 있을 것 이라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는 데 맞나요? 위의 글은 오세영 시인의 말씀이지요, 이승하 교수 같은 이는 「좋은 시의 덕목들」이라는 글에서 새로움을 주는 시, 감동을 주는 시, 깨달음을 주는 시 이렇게 세 가지를 좋은 시를가르는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기도 하지요... 저도 「쉬운 시의 어려움」이라는 소감문을 통해서 시는 쉬워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다’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해야만 한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읽기 쉬운? 아니면 이해하기 쉬운? 이 전제는 ‘시는 노래여야 한다’ 는 시관이 성립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 전 인류적으로 보더라도- 목가적이지도 않고, 음풍농월하기에는 너무 삭막한 환경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생태에 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마는 생태론은 분명히 환경론과는 배치되는 생각입니다. 한 마디로 자연을 사랑하고 뭇 생명을 소중히 하려면 인간이 가진 욕심. 인간이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자만심, 더 나아가서 인간 또한 그러한 것들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으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결의..이런 것들이 생태론의 핵심이라고 이해합니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마음을 현대인들은 얼만큼 인내할 수 있을까요? 자연을 노래하는 시는 많을수록 좋겠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을 영탄할 수 있는 마음의 너비는 얼마나 될까요? 시의 위기, 문학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는 요즘 세태에서도 시는 아무에게나 읽힐 수도 없고 ,대중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인류 역사의 압축이지요. 그냥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시에 대한 식견을 넓히고 난 다음에야 접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의 세계, 나아가서 예술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감각적이고, 난해한 시들이 많습니다. 창작 행위가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할 때 감각적이고, 난해하다는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가 어려워지고 길어지는 이유가 시인 자신의 威勢와 관련된다면 문제가 되겠지요. 너무 말이 길어졌는데요.. 저의 좋은 시의 요점을 추려보겠습니다. 시인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 표현주의의 차원에서 미적 요소를 구현하는 시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발자국만 더 나간다면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목 마르고 먼 길 가는 자의 에너지가 되는 시, 저자에서 횡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목마르고 힘든 자들을 무한히 기다리는 의지가 의자가 되는 시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6.  어떤 시인에게서나 유년이란 시 공간은 특별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유년의 낙원적인 이미지와 같이 선생님께서 특별히 체험하신 유년의 의미를 선생님의 시와 결부시켜  묻고 싶습니다.

 

 

부끄럽게도 저의 유년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50년대 생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배고픔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고요. 저는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저의 본적지는 농촌이고요. 생애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습니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서울에서 마쳤으니 서울사람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온당하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낸 유년의 장소는 서울이면서도 전통적 농촌의 풍습이 보존되어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뒤산에는 꿩이 날고 바로 코 앞에 북한산 맑은 물이 쉬임없이 흘러 논밭을 키웠으니 동네 어른이 돌아가시면 곳집에서 상여 나가는 전통적 두레의 마지막 풍습을 지켜본 세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배밭골 - 북악터널이 뚫리기 전 정능의 마지막 산자락 동네가 배밭골이다- 로 소풍가던 기억, 미아리 고개 넘어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한강 인도교에 가서 놀잇배를 타고 바리바리 싸간 도시락을 먹으며 밤풍경을 즐겼던 여름 밤, 짧아서 더욱 소중한 기억들은 급속한 산업화에 밀려 아득히 밀려나고,지금은 풀이름,나무 이름,꽃 이름 하나 제대로 알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나이가 되어 버렸다. 풀을 모르면 풀의 세계를 모르고,나무와 꽃을 모르면 나무와 꽃이 싸안고 있는 공간을 이해하지 못한다.서로를 품어주고 깃들게 하는 만물일체의 크나큰 품이 없다면 생의 약동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와야 할까! 「시와 서울」이라는 글에 소회를 밝혀 놓은 바와 같이 농촌과 도시의 경계에서 유년을 보낸 것이 저에게는 축복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럼에도 저의 유년은 가정이 해체되고, 어쩔 수 없이 핍박받는 생활을 하게 되어 이 사회에 대한 반감, 반항의식이 싹트게 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시를 씀으로서 그 모난 마음이 둥글어졌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저는 시인으로 사는 것이 기쁩니다.

 

7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를 보면 나무라는 자연물을 통해 기대고 싶은 현실적 존재를 표상하신 듯 합니다. 때로는 나무를 동반자로 생각 하십니까?

 

 

나무는 시인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주제이고 소재입니다. ‘나무’ 가 주는 고독감, 의지, 포용의 이미지들이 매력적이기도 하지요. 저는 박목월의 「나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존재에 대한 질문과 해답이 나무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상의 나무는 한 마디로 당산나무로 표징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무에 인격을 부여하는 마음말이지요. 몇 년 전 여름 새벽에 경기도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만났는데, 천 년 전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에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오늘의 巨樹로 자랐다는 그 나무를 보는 순간, 엄청난 공포가 밀려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천 년이라는 시간의 축적이 이 보잘 것 없는 나라는 인간을 압도한 것이지요. 다행히 삼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가 다니는 학교는 나무와 숲이 어우러진 천혜의 축복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를 만들고 한 권의 시집의 제목으로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8.  선생님의 시“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가 떠오릅니다.   어떤 특별한 여행지나 집필 장소가 있으십니까? 혹은 집필을 하기 위해 그 장소를 다녀와서 집필을 하십니까? 무엇이 어느 순간 선생님의 시에 나타나는 그 전체적인 느낌을 가져오는지 궁금합니다.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입니까?

 

 

 

저는 15층 아파트 15층에 삽니다. 제 방의 창문을 열면 도봉산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저는 이 아파트에 18년 째 살고 있습니다. 50년을 산을 바라보며 살아오다 보니 산이 없는 삶이 무의미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산을 자주 찾는다는 것은 아닙니다....이 노마드의 시대에 저에게는 농경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저는 방에서 글을 씁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여행을 많이 다니기는 하지만 특별히 사진을 많이 찍는다는가 하는 기록을 남겨두지는 않습니다. 어떤 인상이나 느낌이 찾아오는 순간이 오지 않으면 시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주마간산으로 다녀온 유럽에 대해서는 한 편도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알프스도 몇 번 가보았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산에 한 번 올랐다고 알프스를 알 수는 없는 것이지요. 수 많은 여행시들이 시로 실패하는 이유는 짧은 경이로움으로 다 알았다는 식의 감상을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시를 기다린다’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전까지는 시를 찾아다녔는데요..

 

 

9.  시를 쓰는 입장에서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다 보면 이런 작품들은 정말  어떤 영감이 방문했구나 하는 순간의 느낌이 던져주는 경우가 있거든요 정말 무언가 강렬한 순간을 포착하실 때 간혹 꿈속에서 쓴 작품이 걸작이 되었다든지 시인에게는 그런  에피소드가 있기도 하잖아요. 특별히 의식이 작열하는 순간이라든지 뭔가 확 터져 나오는 그런 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순간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요소에 의해 점화 되는지요? ‘

 

 

시를 기다린다’ 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 자신이 유명세를 타는 시인도 아니고 좋은 시를 많이 생산한 입장도 아니므로 조급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시를 쓰는 이유가 인간으로서의 속물성을 탈피하려는 것이라면 보다 저 자신에게 엄격해야할 필요를 느낍니다, 술을 끊은 지 10년이 넘었는데, 술을 마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흥취를 느낄 수 있고, 더군다나 시를 대할 때 마음이 맑지 않으면 스스로 기분이 나빠지는 스타일입니다. 저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휴머니즘의 세계를 노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이 세상은 아름답기보다는 더럽고 유치합니다.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지요. 자본주의 시대의 탐욕과 물질에 찌들은 인간이 훨씬 많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극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름다움과 인간다움을 노래하는 것은 저에게는 가짜의식입니다. 제가 시를 기다린다는 것은 좀 더 공부하고 좀 더 자신을 낮추고 좀 더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길거나 짧거나 한 편의 시를 단숨에 완성하고자 노력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는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됩니다. 그 직관에 의해서 파악된 것을 날것 그 자체로 옮기는 작업이 가장 중요합니다. 퇴고를 하다보면 날 것의 이미지가 손상되고 변형됩니다. 그래서 저는 시가 되는 작품 아니면 시가 안되는 작품, 이렇게 두 가지 부류로 저의 시를 평가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의 시가 아직은 더 성숙되어야 한다는 명령 앞에 놓여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  선생님께서 혹시 여성 시인이나 남성 시인의 차이를 느끼시는 점이 있으신지요. 있다면 여쭙고 싶습니다. 스타일이나 주제뿐 아니라 시를 쓰는 목적에 대한 생각 시적 비전을 추구하는 방식도 아울러 여쭙고 싶습니다.

 

이미 세상은 변했습니다. 질풍노도와 같은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 전반을 휩쓸고 벌 써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한 느낌입니다. 남성과 여성을 우열의 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저는 이 차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 시단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간극을 넘어서는 시들이 많이 생산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성 시인들의 시를 더 많이 읽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름을 가리고 시를 읽어보면 이것이 남성의 시인가 여성의 시인가 확연히 구분이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는 교육수준의 평준화가 이루어진 까닭도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세상을 읽는 방식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질적 격차를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문제는 시를 쓰는 여성들이 난 여성이니까..지레 생각을 만들고 여성성을 정형화하는데 힘을 쏟다보면 감상적이고 지연주의적인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누차 말씀드린 것이지만 아마튜어 시인이 있고, 프로 시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튜어 작품과 프로 작품만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저는 시인은 隱者의 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땅의 훌륭하고 좋은 시인들이 대중 앞에 자주 나서고, 그러다가 명예와 부를 얻는 경우도 봅니다만 그것은 시인의 덕목을 끊임없이 소모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저 또한 그러한 욕망 앞에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샘물이 목마른 자를 찾아다닐 수 없듯이 의자가 먼 길걸어 다리 아픈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 없는 것처럼, 시는 시인은, 나무처럼 한 자리에 오래 서서 기다라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외롭기도 하겠지요, 고통스럽기도 하겠지요. 저는 시인이 그런 면에서 궁핍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궁핍은 형용할 수 없는 것이지요. 억지로 대중으로부터 숨으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드러내려고 안달을 하는 태도도 옳지 않다고 봅니다.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정신, 그것이 어디에 도달하는 길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시인으로서 아름다워지는 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저의 식견이 “온글”의 여러분께 조그마한 보탬이라도 되어야 할텐데 걱정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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