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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선자령' 트레킹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5. 20. 12:57

한반도의 등줄기 위를 성큼성큼 걷는다, 초록 융단과 야생화 천국을 지나 하늘까지

[아무튼, 주말]
산·바다·초원 모두 만나는
백두대간 '선자령' 트레킹

박근희여행기자주말뉴스부
입력 2025.05.17. 00:35업데이트 2025.05.1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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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 선자령 정상석을 200여 m 앞에 두고 먼저 마중 나오는 건 초록 융단이다. 광활한 백두대간의 능선을 배경으로 서 있는 하얀 풍력발전기마저 선자령에선 하나의 풍경이 된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등산의 매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도전 의욕이 불끈 솟아날 만큼 이국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고? 이른 여름이 시작된다는 소식에 서둘러 꿈의 등산&트레킹 코스라는 백두대간 선자령 트레킹에 도전해본다. 수많은 등린이(등산 초보)들의 버킷리스트라는 그곳으로.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성산면에 걸쳐 있는 선자령은 한겨울 눈길 트레킹 성지로 유명하지만, 초록으로 물드는 이즈음부터 가을까지는 야생화 천국으로 옷을 갈아입어 ‘천상의 화원’이라 불린다. ‘선자령만큼은 한 번쯤 가봐야겠다’ 다짐했다면, 지금 만나러 가야 할 때다.

그래픽=송윤혜

 

◇선자령 지름길 ‘국사성황사’

 

총 13.3km로, 왕복 4~5시간 정도(대관령숲길 안내도 코스 기준) 코스라니 어쩐지 만만해 보였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걷기 좋은 데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풍경들이 장관이어서 그야말로 ‘가성비 등산 코스’로 불리는 곳. 선자령의 대표적인 등산, 트레킹 코스인 ‘선자령순환등산로’(이하 선자령 등산로) 얘기다.

선자령은 한반도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산마루를 잇는 선)에 속한 능선이다. 선자령(仙子嶺)이라는 이름엔 “선녀가 아들을 데리고 내려와 계곡에서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자령 등산로는 선자령 입구 쪽 ‘대관령마을휴게소’(이하 대관령휴게소)를 출발해 ‘국사성황사’를 지나 ‘KT 대관령 중계소’ ‘대관령 전망대’ ‘바람의 언덕’(초원, 초지)을 거쳐 ‘선자령 정상석’까지 오른 뒤 대관령휴게소로 돌아오는 원점 회귀 코스다. 중간에 사잇길을 통해 코스를 바꿀수도, 우회할 수도 있다.

선자령을 비롯해 대관령숲길에 대한 자료를 얻거나 안내를 받을 수 있는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출발 전 선자령에 대한 예습을 미처 하지 못했다면 왕복 2차로를 사이에 두고 대관령휴게소와 대각선으로 마주한 ‘대관령숲길안내센터’부터 들른다. 코스 등 탐방 안내를 받거나 지도를 챙길 수 있다.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들면 국사성황사 공공 화장실 외 공식 개방하는 화장실은 없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는 게 상책이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해도 무방하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하면 국사성황사까지, 1.2km의 임도 숲길부터 만난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시작해 ‘대관령 양떼목장’ 방향 숲길을 거쳐도 비슷하다. 이 구간을 조금 건너뛰고 싶다면 국사성황사까지 임도를 통해 차로 올라가는 방법이 있다. 국사성황사 주차 공간이 여유롭지는 않으나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구간의 동선을 절약할 수 있는 지름길. 국사성황사 초입에서 바로 보이는 나무 계단의 이정표를 따라 200m 오르면 KT 대관령 중계소 앞에서 선자령길과 합류한다. 선자령 등산로 중 ‘선자령 풍차길’(강릉 바우길 1구간)과 동쪽의 ‘대관령 옛길’(강릉 바우길 2구간)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선자령 정상에서 4km쯤 떨어져 있는 '대관령 국사성황사'. 강릉 단오제의 서막을 알리는 의식이 열리는 곳이다. 아는 사람들만 아는 '선자령 지름길'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임도 끝 ‘강원 항공 무선표지소’ 100여m 전쯤에 ‘대관령숲길’ 진·출입로가 있다. 이곳부터 선자령 정상까지는 4km 정도다.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울창한 숲길 진입이다. 완만한 오솔길을 따라 나무 아래엔 키 작은 보랏빛 얼레지가 웰컴 세러머니라도 하듯 몸을 흔들며 반긴다. 비로소 곰배령, 태기산, 함백산 금대봉과 함께 흔히 야생화 트레킹 4대 명소 중 하나인 선자령 야생화 여행의 시작이다.

 

◇‘괭이밥’부터 멸종 위기 ‘제비동자꽃’까지

 

“저기, 애기똥풀이다!” 오솔길 옆 엄지손톱만 한 노란 꽃을 보고 아는 척 좀 했더니 지나가던 이가 한마디 한다. “애기똥풀이 아니라 괭이밥이에요. 잎 모양을 자세히 보면 애기똥풀과 달라요. 괭이밥은 잎이 하트 모양이에요.” 머쓱해하니 동행한 이가 웃으며 말한다. “여기(선자령)에 ‘야생화 박사’ 많네요!” 마음은 분명히 선자령 정상을 향하고 있는데 앵초와 홀아비바람꽃도 “여기 있다”고 존재감을 알린다. 홀아비바람꽃과 함께 비슷한 듯 다르게 생긴 노랑무늬붓꽃은 선자령을 걷는 내내 흔히 볼 수 있다. 때로 이름 모를 꽃들이 자꾸만 발길을 붙잡는다. 안 되겠다 싶어 스마트폰 속 렌즈 검색 기능을 켰다. 일일이 이름을 확인해보는 재미에 푹 빠져 그만 초반 속도 조절에 실패하고 만다. 숲길 진입 후 대관령전망대까지 1시간 넘게 걸렸다.

지는 보랏빛 '얼레지' 앞에 하얀 '홀아비바람꽃'이 한창이다. 선자령엔 야생화들이 철에 맞춰 쉴 새 없이 피고 지며 자연의 질서를 넌지시 알려준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전망대에 서서 강릉 시내와 동해의 수평선이 차례로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감상하고 있자니 꽃 생각은 그새 싹 사라진다. 이후 ‘산인가?’ 싶을 정도로 대체로 완만한 길이 이어지다가 오르고 내리치는 구간이 나타나지만, 등산하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치는 그 흔한 ‘깔딱 고개’(숨이 깔딱 넘어간다는 뜻의 고개) 하나 없으니 동행한 이들과 대화 나누며 산행하기에 좋다. 공식 등산로 외 이따금 산행객들이 낸 듯한 좁다란 발자국을 따라가면 탁 트인 전망이 선물처럼 기다리기도 한다.

맑은 날 '대관령 전망대'에 서면 강릉 시내와 동해가 내려다보인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대관령전망대에서 선자령 정상으로 향하는 2.5km 구간은 야생화 군락을 품고 있다. 붓꽃, 골풀, 할미꽃, 꿩의다리, 대사초, 기린초, 꽃창포, 피나물 등 계절에 따라 선자령을 물들이는 야생화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심심하지 않다. 운이 좋다면 아니 ‘눈’이 좋다면 한여름엔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멸종 위기 식물 ‘제비동자꽃’이나 땅에 붙은 듯 자라는 ‘애기앉은부채’도 볼 수 있단다. 대관령숲길 관계자에 따르면 “산삼을 본 것처럼 반갑다”는 약용 식물 ‘연영초’도 자란다.

야생화 안내판이 세워진 구간. 등산이나 드레킹뿐 아니라 야생화 촬영을 위해 찾는 사진 동호인들도 적지 않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인이 나란히 앉아 기념사진 찍기 좋은 선자령 트레킹 코스의 '의자나무'.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야생화 군락이 끝날 즈음엔 ‘의자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두 개의 가지가 곡선형으로 휘었는데 그 모양이 의자를 닮아 산행객들 사이에서 의자나무라는 별칭을 얻은 나무다. 실제로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선자령 인증 샷’ 하나 건져 가기에 좋다.

 

◇하늘 아래 초원 그리고 풍력발전기

 

야생화 실컷 봤다면 다음은 대관령 숲길과 선자령 등산로의 백미로 꼽히는 ‘고원 코스’를 맛볼 차례다. ‘목장 코스’라는 이정표가 등장하면 풍력발전기가 하나둘씩 눈에 들어온다. 선자령 정상부를 비롯해 대관령면 일대엔 풍력발전기 50여 기가 하얀 바람개비처럼 원근감 있게 펼쳐진다. 능선에 꼿꼿하게 고정된 차갑고 둔탁한 풍력발전기지만 푸른 하늘, 초원, 산 능선과 만나면 풍경의 하나가 된다.

하늘 아래 드넓은 고원과 만나는 선자령 정상부. 풍력발전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걷기 여행자처럼 천천히 걸어도 좋을 일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후 경사가 거의 없는 고원길을 지나드넓은 초지에 들어서면 감탄이 터진다. 사방에서 부는 청량한 바람에 호흡이 바빠진다. 풍력발전기가 만든 그늘 구역에 털썩 앉아 ‘산멍’ 하는 시간. 눈앞으로는 ‘대관령 하늘목장’의 목초지가 들어온다. 시야가 탁 트여 목초지 언덕으로 목장 체험용 트랙터 마차가 오가는 것도 보인다. 대관령 하늘목장은 1974년에 한일시멘트그룹의 ‘우덕축산’으로 문을 열었다가 ‘대관령하늘목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2014년부터 체험형 목장으로 유료 개방하고 있다. 선자령 정상 부근에서 목장으로 바로 입장은 할 수 없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 된다. 마주 보이는 하늘목장 이용객들은 체험용 트랙터를 타고 하늘목장 전망대에 올라 선자령을 편히 감상할 수 있다.

해발 1157m 지점에 있는 '백두대간선자령' 정상석.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풍력발전기 아래 초원은 ‘바람의 언덕’이라고도 불린다.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온다. 낮잠 한숨 자고 싶은 욕망은 바람과 함께 실어 보내고 다시 선자령 정상석으로 향해본다. 고지가 불과 200m 앞에 있으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드디어 ‘백두대간 선자령, 해발 1157m’라고 쓰인 정상석 앞에 서니 에베레스트라도 정복한 것처럼 감격스럽다. 정상석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발왕산이, 서쪽으로 계방산이, 서북쪽으로 오대산과 황병산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맑은 날엔 강릉 시내와 동해까지 조망할 수 있다. 정상에서 만난 진민순·김성기씨 부부는 “여름·가을·겨울 선자령에 몇 번 다녀가고, 봄은 이번이 처음인데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며 환하게 웃었다.

◇계곡, 풍해조림지 거쳐 하산길로

 

하산할 때 되돌아가는 코스 대신 ‘재궁골삼거리’로 방향을 틀면 계곡을 곁에 두고 걷는 호젓한 숲길이 기다린다. 하산길에 접어들자마자 오대산과 황병산의 능선이 겹겹이 이어지며 배웅한다. 마지막 꽃을 피우는 산철쭉도 “잘 가라” 손짓한다.

걷다 보면 심심찮게 돌탑도 등장하는데, 때에 따라 돌탑을 쌓은 주인공과 조우할 수도 있다. “등산객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돌들을 치울 겸 돌탑을 쌓고 있다”는 이는 전 스키 선수 출신 김영교 대관령스키역사관장이다. 대관령 트레일 코스와 정보를 발굴·제공하는 ‘사단법인 대관령두메길’ 초대 회장이던 김 관장은 “이 돌탑 쌓으면서 하루에만 100명이 넘는 등산객과 마주친다”며 “올해 안으로 선자령 등 대관령면에만 1004개의 돌탑을 쌓을 예정”이라고 했다. 5월 현재 선자령엔 20여 개의 돌탑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후 돌탑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걸림돌을 치워 돌탑을 쌓고 있다"는 김영교씨의 돌탑은 선자령 걷는 재미를 더한다. 소원을 빌며 돌탑에 돌을 하나 더해본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재궁골삼거리' 방향으로 하산하면 신록을 뽐내는 숲길도 지난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샘터' 부근의 계곡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물멍'은 필수. 여름엔 선자령 등산로에서 '고진감래'를 느끼게 해주는 오아시스같은 곳이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샘터’와 가까워지면 계곡 물소리가 동행한다. 청정 계곡은 발을 담그고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풍해조림지’도 지나칠 수 없다. 풍해에 의해 조림이 어려웠던 대관령숲길의 생육 환경을 개선해 성공한 인공 조림지. 산림청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등록됐다.

산림습원 복원지의 모데미풀 군락지 등엔 습지 보호를 알리는 줄이 둘러 있다. 습지 가까이엔 작은 조릿대 줄기, 대나무 축소판처럼 생긴 ‘속새’를 비롯해 ‘끈끈이주걱’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양떼목장 보거나, 국사성황사 가거나

멀리 ‘대관령양떼목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양떼목장 전망대’는 하산하던 방향대로 걸으면 만날 수 있다. 양떼목장은 1988년 ‘풍전목장’이란 이름으로 시작해 2000년 겨울부터 대관령양떼목장으로 이름을 바꿔 ‘대관령하늘목장’ ‘대관령삼양목장’과 함께 대관령 체험형 목장으로 유명하다. 해발 800m에 있는 목장 산책로는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알프스 어딘가처럼 이국적 풍광을 자랑한다.

만약 국사성황사에 주차 후 출발했다면 풍해조림지 부근에서 국사성황사 이정표를 따라 20~30분 다시 올라가는 코스를 택해야 한다. 국사성황사는 국사성황(범일 국사)을 모시는 신당, 옆의 산신당은 대관령 산신(김유신 장군)을 모시는 신당이다. 국사성황사에선 매년 강릉 단오제의 시작을 알리는 국사성황제를 열고 있다. 기운이 좋다고 알려져 평일·주말 할 것 없이 전국 무속인들이 찾아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

올해 강릉 단오제(27일~6월 3일)를 앞두고 지난 12일 대관령 국사성황제와 대관령 산신제 등이 봉행됐다. 국사성황사에서 주차 질서를 관리하던 주민은 “단오제 기간이나 요즘처럼 날씨 좋은 주말엔 여행객이 많아 국사성황사 주차가 어려울 수 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하산하며 다리가 뻐근해질 무렵 스마트폰 속 걷기 앱을 켜니 어느새 ‘2만보 달성’ 축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푸른 하늘과 맞닿은 ‘천상의 화원’에 다녀오기까지 2만보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