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고택에 은거한 봄… 금시당의 매화, ‘지금이 옳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5-04-03 09:27
- 업데이트 2025-04-03 12:40
경남 밀양의 금시당과 백곡재. 밀양강의 굽이치는 물길을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다. 금시당은 마당 끝에 있는 은행나무 노거수의 이파리가 온통 노랗게 물드는 가을도 좋지만, 한옥 처마 아래 200년 된 매화가 향을 뿜으며 그윽하게 꽃을 피우는 봄날의 정취도 그만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밀양 옛것의 매력
조선 명종때 좌승지 지낸 이광진
은퇴 후에 고향 내려와 지은 별장
봄에는 매화, 가을엔 은행 풍광
‘벼슬자리보다 더 좋은 시절’ 감탄
만마리 물고기 돌 됐다는 만어사
설법 들으려고 몰려왔다는 전설
국란때 땀 흘린다는 표충사 비석
박정희 서거전 10시간 흠뻑 젖어
밀양=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경남 밀양은 누구나 알지만, 거기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모른다. 먼저 밀양을 대표하는 곳을 꼽아보자. 표충사, 영남루, 만어사, 위양지…. 여기다가 여름철이라면 피서객이 모이는 얼음골을, 가을에는 억새로 이름난 천황산과 재약산을 끼워 넣을 수 있겠다.
밀양의 대표 명소라지만,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큼 유명한 곳은 아니다. 여행 좀 다녀봤다는 이들도 이 중 절반쯤이나 알까. 밀양에는 압도적인 명소가 없다. 오해하지 마시길. 그렇다고 지역의 자산이 빈약한 건 절대로 아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웬만큼 이름난 여행지보다 가진 게 훨씬 더 다양하고 많다. 꼭 봐야 하거나 들러야 할 대표명소가 없다는 건 대체로 약점이지만, 때로는 강점이 되기도 한다. 가장 큰 장점은 ‘선입견을 덧씌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입견 없는 여행은 자유롭다. 다들 가는 곳을 ‘나도 가는’ 식의 여행도 좋지만, 의무감 없는 이른바 ‘자기 주도 여행’이 필요한 때도 있다. 그럴 때 꺼내어 볼 수 있는 곳이 밀양이다. 정해준 코스를 그대로 따라가는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밀양 여행에서 만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 봄이라서 여기…밀양의 금시당
밀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정자와 서원, 고택과 재각이 곳곳에 있다. 깃든 얘기가 흥미진진한 곳도 있고, 안팎으로 경관이 빼어난 곳도 있다. 양수겸장. 경치와 이야기, 둘 다 갖춘 곳도 적잖다. 이만한 명소가 왜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해질 만큼 근사한 곳들이다. 봄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이즈음 고택 안팎에 매화며 벚꽃, 목련이 피어서 더 운치가 넘친다. 밀양에는 이런 곳들로 여정을 꽉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많다.
이야기의 맨 앞에 밀양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금시당 백곡재’를 끌어다 놓는다. 금시당과 백곡재는 각각의 현판을 건 두 채의 정자다. 금시당은 500여 년 전인 조선 명종 때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실 비서실장’쯤인 좌승지 벼슬을 지낸 이광진이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별장이다. 백곡재는 임진왜란으로 불탄 금시당을 복원한 5세손 이지운을 기리기 위해 훗날인 조선 철종 때 지은 서재 건물이다. 한 담장 안에 있는 두 건물은, 건축 규모나 양식이 거의 같다.
금시당과 백곡재로 밀양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는 지금이 봄이고 그곳에 매화가 피었기 때문이다. 봄이 아닌 가을이었다 해도, 금시당을 앞장세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은행잎 노랗게 물들 때의 금시당 풍경이, 매화 핀 금시당보다 적어도 열 배쯤 아름다우니까.
금시당 마당에는 450년 수령의 노거수 은행나무가 있는데, 온 천지를 노랗게 물들이는 은행잎 지는 풍경은 가슴이 다 덜컥 내려앉을 정도다. 금시당의 가을이 노란색이라면, 봄은 매화 향이다. 주위를 그윽한 향으로 가득 채우는 금시당 매화는 매혹적이다. 금시당의 매화는 이제 절정으로 치닫는 중이다. 지금 간다면 화사한 봄꽃 만발한 고택의 정취와 함께 은은한 매화 향을 맡을 수 있다.
밀양 만어사의 미륵전. 불법을 듣기 위해 모인 1만 마리 물고기가 돌이 됐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 지금이 맞고, 그때는 틀렸던 이유
금시당과 백곡재는 앞으로는 밀양강을, 뒤로는 호두산과 용두산을 끼고 있는 배산임수의 그림 같은 자리에 들어서 있다. 조선 시대 정자는 단독으로 지어지는 게 보통이었는데, 금시당 백곡재는 여러 건물이 집합적으로 들어서 근사한 정원을 이룬다. 매화나무와 은행나무를 둘러친 금시당과 백곡재를 포함한 다섯 동의 건물이 잘 가꿔놓은 두 개의 마당을 거느리고 있다.
금시당과 백곡재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은거(隱居)’다. 금시당에 건 ‘금시(今是)’란 당호는 ‘지금이 옳다’라는 뜻. ‘지금이 옳다’는 문장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건 ‘지난날은 틀렸다’는 깨달음이다. 금시란 글은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그른 줄을 깨달았다)’란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도연명이 시에서 옳다고 하는 ‘지금’은 고향으로 물러난 삶이고, 틀렸다고 하는 ‘지난날’은 벼슬길에 올랐던 시절을 뜻한다. 그걸 가져다 썼으니 훌훌 다 버리고 돌아온 삶에 대한 자족이자, 자긍을 드러내는 당호라 하겠다.
벼슬을 내려놓고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온 이광진은, 금시당(今是堂)을 자신의 호로도 삼았다. 궁금했던 건 ‘은퇴 후에 뒷짐 지고 소요하는 자의 자족이 승승장구하던 현역 시절의 영광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여기 금시당에서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만큼 봄날의 금시당이 근사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작 벼슬을 그만두고 금시당으로 내려온 이광진은 이듬해 세상을 떴다. 야속하게도 ‘금시’의 시간이 너무 짧았다.
# 소쇄원이 생각나는 곳…월연대
밀양강 건너편에도 금시당에 견줄 만한 별장 겸 정자 ‘월연대(月淵臺)’가 있다. 월연대는 금시당 백곡재와 마찬가지로 밀양의 여주 이씨 가문 소유다. 이정표나 안내판에 월연대와 함께 월연정이 원칙 없이 쓰이는데 정식 명칭은 엄연히 월연대다. 월연대는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를 지낸 이태가 500년 전쯤 폐사한 월연사란 절집 터에다 지은 별장 겸 정자다. 금시당보다 46년 앞서 지어졌다.
금시당이 그랬듯이 월연대 역시 벼슬을 내놓고 숨어든 은거의 공간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쯤 됐던 이태는 사화와 당쟁이 격화하던 시기에 기묘사화를 예견하곤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월연대를 짓고 숨어 살았다.
월연대는 문화재청이 지정한 밀양의 유일한 ‘명승’이다. 월연대 역시 여러 건물이 집합적으로 들어서 독특한 경관을 이루는 게 특징.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영역을 구분하고 통합하는 배치가 담양의 소쇄원을 연상케 한다. 명승 목록에 월연대와 함께 주변의 쌍경당과 제헌(霽軒) 등의 집합 건물이 포함된 ‘밀양 월연대 일원’으로 이름을 올린 이유다.
월연대 일원의 설계와 배치는 입체적이다.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월연대를 남향으로 지었으며, 계곡 너머 쌍경당은 중간 높이쯤에 동향으로 지었고, 가장 낮은 자리에는 이태의 맏아들을 추모하는 제헌을 남동향으로 앉혔다. 이곳에서는 따로따로 건물을 볼 게 아니라, 자연지형과 환경을 고려해 배치한 전체적인 건축을 더 유심히 들여다봐야 한다. 월연대와 쌍경당 사이 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비롯, 건물과 건물, 공간과 공간을 잇는 동선에서 옛 선비들의 자연관과 전통 조경 양식을 느낄 수 있다.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영남루.
# 물고기가 용이 되다…어변당
이어 찾아가는 곳은 연못을 두르고 있는 정자 ‘어변당(魚變堂)’이다. 어변당은 너른 들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 무안면 연상리에 있다. 어변당의 주인은 조선 초기 인물 박곤(朴坤)이다. 그는 스물한 살에 무과에 급제한 무인 출신의 장군. 대마도를 정벌하고 남해 왜구를 토벌했다. 무인 출신이면서 공조, 호조, 예조판서를 지내고 한성부윤까지 했다. 지금으로 치면 군 출신이 국토교통부 장관과 기획재정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거쳐 서울시장까지 지낸 셈이다.
그런 그가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정자를 지었다. 정자 툇마루 앞에 만든 연못은 풍류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 연못에 물고기를 풀고 정성으로 길러 그걸로 부모를 봉양했단다. 충(忠)의 인물에다 효(孝)를 보탠 영웅담이다. 영웅담은 판타지로 발전한다. 어느 날, 그의 효성에 감동한 물고기가 붉은 비늘 두 개를 남기고는 용이 돼 승천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런 뒤부터 정자 앞뜰의 연못을 ‘적룡지(赤龍池)’라 불렀고, 정자는 물고기(魚)가 변해(變) 용이 됐다는 뜻으로 어변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 박곤은 어변당을 자신의 호로 가져다 쓰기도 했다.
물고기가 주고 간 비늘 두 개는 어떻게 됐을까. 박곤은 비늘을 말안장 장식으로 썼는데 그러자 말이 용과 같이 빨라져서 그걸 탄 박곤이 왜적과의 전투 중에 신출귀몰했다. 왜병들이 박곤을 두고 ‘비룡장군’이라 부르며 벌벌 떨었다고 전한다. 만일 지금 그랬다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을 법한 얘기도 있다.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의 눈에 들었던 그는 벼슬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대신 세 명의 미인을 ‘하사’받아 살다가 세 아들을 낳았다는 것. 그 아들이 표(瓢)씨 성을 받았고, 후손들이 지금도 중국에 살고 있단다.
밀양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영남루의 야경.
# 불타서 숯이 된 은행나무가 살아있다고?
후손들은 박곤의 이런 영웅담이 자랑스러웠겠지만 ‘용의 승천’이나 ‘비늘 말안장’ ‘미인 하사’ 같은 야담과 전설로만 전하는 게 좀 민망했던 모양. 후손들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정사 기록을 샅샅이 뒤져서 박곤을 전설 아닌 역사로 끌어냈다. 남해안 일대의 왜구를 토벌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의 국경을 정비하는 등의 업적을 적어 비석을 세우고 지역 사림(士林)의 뜻을 모아 1998년 ‘덕연서원(德淵書院)’으로 격을 올려 현판을 걸었다.
연못 적룡지 옆에 은행나무 노거수가 있다. 박곤이 심었다는 얘기를 믿는다면 수령 600년을 넘긴 나무다. 나무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나무 안쪽이 온통 검게 탄 숯이다. 어찌 된 일일까. 주민들에게 물으니 15년 전쯤 이웃 마을의 가난한 부부가 섣달그믐날 촛불을 피우고 치성을 드리다가 그만 불을 냈단다. 나무 앞에 촛불을 켰는데 바람이 불어 불이 자꾸 꺼지자, 썩은 부위의 나무 둥치 안쪽에 초를 켠 것이 나무로 옮아붙어 그리됐다는 얘기.
남편은 인지장애가 있고, 부인은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었다고 했다. 높은 둥치 안쪽으로 타들어 가는 나무를 보며 속수무책으로 발만 굴렀는데, 소방차가 와서 겨우 불을 껐다고 했다. 부부의 딱한 사정을 감안해 책임을 크게 묻지 않았다는데, 마을회관에서 만난 마을 주민들은 “불낸 부부의 집안에 이유 모를 흉사(凶事)가 이어졌다”며 목소리를 낮췄다.
거대한 숯덩이가 되다시피 한 나무 안쪽을 들여다보면, 살아남은 게 기적적이다. 나무 심지 부분은 거대한 숯덩이가 돼버렸는데도, 바깥쪽은 살아서 새순이 텄다. 뿌리 주변으로도 잔가지가 아우성처럼 올라왔다. 탔으되 죽지 않은 어변당의 나무 이야기가 후세로 전해진다면, ‘용의 비늘’처럼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될까.
만어사 미륵전에 모신 돌미륵. 만어사 너덜겅의 돌 중에 가장 큰 바위인데, 고래의 모습을 빼닮았다.
# 서원 마당의 600년 된 차(茶)나무
밀양의 전통마을 가운데 봄날의 정취를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곳을 꼽으라면 산외면 다원마을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주변에 차밭이 많았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 지명이 ‘다원(茶院)’이다. 지명 유래를 증명하듯 600년 된 차나무가 혜산서원 마당에 있다.
다원마을은 일직 손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한복판에는 혜산서원과 손씨 고가(古家)를 비롯한 고택이 여러 채 있다. 다원마을은 뒷짐 지고 걸으면서 보아야 하는 곳이다. 되도록 느릿느릿 걷자. 특히 마을 입구에서 혜산서원으로 이어지는 운치 있는 돌담길에서는 속도를 늦춰야 한다.
마을의 중심은 혜산서원이다. 서원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온 문신 손조서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혜산서원의 건물 배치 양식은 다른 서원과는 사뭇 다르다. 서원은 조선 영조 때 만들어졌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됐는데, 서원을 보존하기 위해 서원 건물을 주택으로 쓰거나 재실로 위장했기 때문이다. 지금 혜산서원은 1971년에 다시 짓거나 다듬어진 것이다.
다원마을 경관의 정점은 ‘상례문(尙禮門)’이란 편액을 내건 혜산서원의 솟을삼문이다. 서원의 정문으로 이어지는 흙담 골목 양편의 소나무들이 구불구불 몸을 뒤틀고 도열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신도비각과 신도비 주변의 소나무 노거수의 위용도 대단하다.
# 시 한 줄을 읽고서 서원을 찾아가다
밀양에서 딱 한 줄의 시문(詩文)을 읽고 찾아간 곳이 있으니, 무안면 내진리의 용안서원이다. 용안서원은 벽진 이씨 문중의 조상을 모신다. 서원이 배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고려 말에 대제학을 지낸 이견간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중국 창저우(常州)의 숙소(객관)에 머물렀는데, 거기서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는 시 한 수를 지었다. 시로 쓴 문장 한 줄이 그야말로 절창(絶唱)이다. “창 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도록 들리니/ 그 울음에 진 꽃잎 몇 겹이나 쌓였을꼬.” 봄꽃이 피고 지는 요즘 같은 봄날이었던 모양이다.
이 시는 중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도시 곳곳의 기둥이나 벽에 이 시가 새겨졌다니, 요즘으로 치면 ‘K-팝의 히트’쯤으로 비유할 수 있을 듯하다. 학문의 성취를 문장으로 평가하던 시절. 그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원나라의 태학사 주방(周昉)이 이견간을 두고 ‘천하제일의 선비’로 추켜올렸을 정도였다.
한 줄 문장을 길잡이 삼아 찾아간 곳이라서 경관은 큰 기대를 안 했는데 웬걸, 탄성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근사하다. 저수지를 끼고 있는 마을 뒤편에 숨은 듯 들어선 자리부터가 기가 막히다. 서원 앞 솔숲의 분위기도 훌륭하고 서원 주변의 농원에서 심어 기른 울창한 꽃나무 숲길도 정취를 보탠다. 마을 깊은 안쪽 자리에 들어선 덕에 서원에서는 민가도 전봇대도 보이지 않는다.
어변당 연못 곁의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노거수. 15년 전쯤 불이 나서 안쪽은 숯이 됐는데 나무는 죽지 않았다.
# 밀양의 명소 세 곳…영남루와 만어사, 위양지
밀양에는 우리나라 3대 누각 중의 하나라는 영남루가 있다. 진주의 촉석루, 대동강의 부벽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누각이다. 영남루는 누각의 규모부터가 남다르다. 중심 건물 양쪽으로 침류당과 능파당을 거느린다. 거느린 건물을 계단식으로 연결하면서 층층이 덧댄 지붕이 독특하다.
영남루는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것도, 바깥에서 누각을 감상하는 맛도 좋다. 낮에는 누각의 마루에 앉아서 강바람을 쐬며 풍류를 즐길 수 있고, 밤이면 강 건너편에서 야간 조명으로 환하게 떠오른 영남루를 바라보며 봄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밀양의 만어사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만어산 아래 절집 만어사는 발치쯤에 돌이 무너져 이룬 거대한 너덜겅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데,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몰려온 동해의 용과 물고기들이 변해 돌이 됐다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너덜겅의 돌을 부딪치면 금과 옥의 소리를 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지천으로 깔려 있는 돌 하나를 들어 다른 돌을 내리치면 맑은 종소리가 난다. 돌무더기 가장 위쪽에는 큰 바위 하나를 전각에 모셔두고 있는데, 그 바위가 바로 동해의 용이 돌로 변한 형상이라고 전해온다.
밀양에는 이팝나무 꽃이 필 때 황홀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연못 위양지가 있다. 신라 때 축조했다는 연못 위양지는 인근에 커다란 가산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물 대는 일’의 쓸모를 잃었지만, 그대신 이팝나무와 왕버드나무, 소나무 울창한 숲을 거느리고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위양지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늦봄이다. 벚꽃이 다 지고 난 뒤에 이팝나무가 꽃잎을 터뜨릴 때면 위양지는 그야말로 선경(仙景)을 보여준다. 연못 가운데 들어선 정자 완재정 주위로 휘휘 늘어진 버드나무의 연둣빛과 이팝나무 꽃의 순백이 어우러지는 장면은, 마치 실재하지 않은 ‘완벽한 이상(理想)의 풍경’처럼 보인다. AI가 그려낸 합성사진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밀양에서는 벚꽃이 이제야 피기 시작했으니, 이팝나무꽃은 아직 보름쯤 더 기다려야 한다.
# 표충비가 진짜 땀을 흘려야 할 때
마지막으로 밀양의 ‘표충비’ 얘기다. 밀양에서는 ‘표충(表忠)’이란 이름이 여행자를 여간 헷갈리게 하는 게 아니다. 밀양 단장면에는 절집인 표충사(表忠寺)가 있고, 절집 안에는 사당인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무안면에 있는 건 표충비(表忠碑)다. 표충이란 ‘충(忠)을 밝힌다’는 뜻. 모두 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적에 맞서 싸운 사명대사를 기리는 곳이다.
이 중 비석 표충비 얘기를 해보자. 표충비는 지금으로부터 280년 전쯤, 사명대사의 불법을 이어받은 5대 불제자가 경북 경산에서 검은 돌을 가져다 세운 비석이다. 사명대사의 수행 행적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눈부신 활약에 대해 비석에 적었다. 비가 기리는 사명대사의 구국의 정신도 의미 있지만, 못지않게 흥미로운 게, 나라가 위태로울 때 비석이 흘린다는 땀 얘기다.
표충비를 ‘한비(汗碑)’라고도 부른다. ‘땀 흘리는 비석’이란 뜻이다. 나라에 큰 사건이 있을 때를 전후해 비석에 땀방울이 맺혀 흘러내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석이 흘리는 땀은, 나라와 국민을 염려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란 주장이다. ‘미신 같은 얘기’라고 웃어넘기기도 좀 뭣한 게, 비석이 땀을 흘린 시기와 흘린 땀의 양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안내판이 있어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비석은 동학농민운동 7일 전인 1894년 11월 19일 3말 1되의 땀을 흘렸고, 해방을 사흘 앞둔 1945년 8월 12일에는 3말 8되의 땀을 흘렸으며, 1979년 10월 21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5일 전에는 10시간 땀을 흘렸다. 북한 수재민에게 양곡을 지원하던 날에도, 중국 어뢰정 사건 때에도, 일본과 독도 영토문제 대립 당시에도 땀을 흘렸다고 기록돼 있다. 비석을 유심히 살폈는데 땀의 흔적은 없었다. 나라에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비석이 진짜로 땀을 흘린다면, 정치적 갈등이 극한에 달한 지금이야말로 폭포수처럼 땀을 흘려야 하는 게 아닐까. 표충비를 찾는다면 유심히 볼 일이다.
■ 일곱 살짜리 아이가 쓴 글씨
영남루의 현판 글씨 중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 누각 정면 안쪽에 걸어둔 ‘영남루(嶺南樓)’와 대들보에다 매단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다. 불이 나서 다 타버린 영남루를 1844년에 다시 지으면서 새로 건 글씨다. 영남루는 밀양 부사의 일곱 살 아들이 썼고, 영남제일루는 열한 살 먹은 아들의 솜씨다. 내로라하는 고관대작의 글씨를 걸었더라면 시비나 폄훼가 끊이질 않았으리라. 정치적 변동에 따라 글씨가 떼어지기도 했겠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쓴 기특한 필치라면, 누가 흠을 잡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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