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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구름 펼쳐진 남해의 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4. 24. 16:09

‘벚꽃 터널’ 끝이라고 슬퍼마라… 샛노란 ‘유채 계단’이 기다리니[박경일기자의 여행]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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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5-04-24 09:28

수정 2025-04-24 09:35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꽃구름 펼쳐진 남해의 봄

 

다랭이마을 다랑논 층층이 유채

파란 바다와 어우러져 그림같아

 

두모마을엔 ‘파라다랑스’ 조성

여름 수국·가을 메밀꽃도 장관

 

해안따라 1.5㎞ ‘물건리 어부林’

1만여 활엽수 초록 풍경 뛰어나

 

단항마을엔 500년된 왕후박나무

우산살 같은 가지로 그늘 만들어

 

나비모양 섬 사이 바다 ‘앵강만’

수면 위로 비친 보름달도 절경

 

섬의 최남단에 세워진 무민사

왜구 맞선 최영장군 제사 지내

남해 두모마을의 ‘파라다랑스’. 다랑논을 유채꽃밭으로 단장하고 주변 밭에 꽃 잔디와 튤립 등을 심어서 꽃으로 가득한 농촌 테마파크로 조성한 곳이다. 파라다랑스란 이름은 파라다이스와 다랑논의 합성어다.

남해=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남해의 봄날은 뭐니 뭐니 해도 유채꽃이지…

남해의 봄날은 유채꽃이다. 노량마을에서 왕지등대까지 꽃구름 같던 벚꽃이 한바탕 꿈처럼 지나가고 난 뒤, 남해는 이내 유채꽃으로 물들었다. 노랗게 물든 유채꽃은 금세 지고 만 벚꽃의 아쉬움을 달래주고도 남는다. 유채는 꽃이 길다. 바람 불거나 비가 온대도 꽃이 질까 조바심이 덜하다. 절정을 넘겼어도 남해 유채밭에는 아직 진한 꽃향기가 여전하다. 유채꽃이 피어 있는 한, 남해는 늘 봄이다. 유난히 긴 유통기한의 봄 여행 목적지로 남해를 권하는 이유다.

 

봄날 유채꽃이 근사한 곳으로 치자면, 남해에서는 설천면 다랭이마을이 단연 첫 번째다. 층층이 다랑논에 심어진 노란 유채꽃이 파란 바다와 어우러지는 모습이 그림 같아서다. 계단식 논은 거기 사는 농부들에게는 고된 노동의 증거이지만, 논이 그려내는 곡선은 그 자체로 빼어난 미감(美感)을 드러낸다. 치열한 일상이 저 스스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풍경. 남해의 다랑논이 선사하는 미감의 특별함이다. 벼가 아닌 꽃을 심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남해 다랭이마을은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 남해 여행의 내로라하는 대표 명소라 주말이면 몰려든 차들로 다랭이마을 주변은 북새통을 이룬다. 비좁은 해안도로 안쪽에다 만들어놓은 제법 큰 주차장도 오전 일찍 꽉 찬다. 도로변에 차가 늘어서면서 때론 악다구니가 벌어지는 일도 있고, 주차장을 놔두고 좁은 마을 길 안쪽까지 무턱대고 차로 밀고 들어오는 이들도 있다.

다랭이마을의 훌륭한 대안이 상주면 양아리의 두모마을이었다. 바다를 바짝 끼고 있지 않고 다랑논의 경사도 덜 하지만, 논마다 꽉 채운 유채꽃의 집적도만큼은 한 수 위였다. 작은 마을에 알음알음 관광객들이 찾아들었던 이유다. 그런데 작년에는 남해 두모마을에 유채꽃을 심지 않았다. 노란 유채꽃 계단을 기대하고 찾아왔다가 섭섭하게 발길을 돌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진작 다 지고 말았지만 남해 노량마을에서 왕지등대까지 이어지는 길은, 꽃구름 같은 벚꽃이 하늘을 가리는 길이다. 길옆으로는 바다 풍경이 펼쳐지고, 벚꽃 개화기를 겨눠서 일부러 찾아갈 만한 곳이다.

 

# 파라다랑스가 보여줄 파라다이스

올해는 두모마을에 ‘꽃 사태’가 났다. 해 거른 아쉬움까지 더해서 올해 두모마을 다랑논의 꽃밭을 더 크고 더 환하게 가꾼 것. 유채꽃뿐만 아니다. 진분홍 꽃 잔디며 튤립을 비롯한 봄꽃이 만개해서 다랑논 전체가 온통 꽃 천지다.

두모마을 다랑논은 올봄 ‘파라다랑스’란 간판을 걸고 거대한 꽃밭 정원으로 거듭났다. 파라다랑스란 파라다이스의 ‘파라’에다, 다랑논의 ‘다랑’을 붙여서 만든 합성어다. 파라다이스에서는 아름다운 자연을, 다랑논에서는 전통 농업이란 문화를 가져왔으니 ‘자연과 농경문화의 조화’의 의미까지 담은 이름이다.

파라다랑스가 표방하고 있는 건 농촌테마파크다. ‘옛날 여행자’들에게 ‘농촌’이란 단어는 곧 농경이었다. 그 시절 농촌 체험이라면 감자 따위를 캐는 수확 체험이거나 떡메를 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반면 파라다랑스가 ‘요즘 여행자’에게 환기하는 건 농촌적 감성이다. 꽃을 감상하거나 산책을 하고, 차를 내리거나 바른 먹거리를 즐기는 자연으로서의 농촌이다. 농촌과 자연을 보는 뚜렷한 시선 변화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두모마을 유채꽃밭에서 출발한 파라다랑스의 중심은 여전히 꽃이다. 지금 그곳에 가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시간’을 누릴 수 있다. 꽃은 화사하고 날은 화창하며 진한 유채꽃 향기로 정신이 아찔해진다.

파라다랑스에는 봄만, 혹은 유채꽃만 있는 건 아니다. 유채꽃이 지고 나면 여름의 초입에 수국이 피어나고, 가을에는 다랑논이 흰 메밀꽃으로 채워지게 된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도 이런저런 꽃과 풀이 피고 진다. 봄부터 가을까지 다랑논 전체가 근사한 꽃 정원이 되는 것이다. 유채꽃 말고, 다른 꽃이 다랑논에 핀다면 어떤 모습일까, 다른 계절에 파라다랑스는 어떤 파라다이스를 보여줄까.

# 물건리 어부림에서 만난 봄의 기운

꽃으로 시작한 봄의 기운이 이제 연두색 신록으로 옮겨붙었다. 그래서 신록의 숲으로 간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에는 ‘물건리’가 있다. 물건리에 있는 건 죄다 ‘물건’이다. 중학교도 물건이고, 슈퍼도 물건, 교회도 물건이다. 물건중학교, 물건슈퍼, 물건교회…. 궁금했던 건 물건이란 마을 지명이 붙게 된 연유였다. 진짜 무슨 ‘물건’이 있어서 그랬을까. 알고 보니 좀 싱겁다. 마을 주민들은, 문자의 의미가 아니라 글자의 생김새로 지명 유래를 설명했다. 물건리의 물(勿)자는 뒷산의 형상에서 가져왔고, 건(巾)자는 뒷산에서 마을로 시내가 흐르는 모양을 그려놓은 것이란다.

그렇더라도 물건리에는 ‘진짜 물건’이 하나 있다. 바로 ‘물건리 어부림(漁付林)’이다. 해안가의 숲을 두고 다른 곳에서는 방풍림(防風林)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어부림으로 부른다.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넘어서, 해안가의 숲이 발치 아래에서 물고기를 키운다는 의미다.

물건리 어부림은 해안을 따라 펼쳐진 폭 30m, 길이 1.5㎞의 띠를 이루고 있는 숲이다. 숲에는 1만여 그루의 활엽수들이 자란다. 팽나무와 푸조나무, 느티나무, 윤노리나무, 길마가지나무, 말채나무…. 늙었으되 당당한 나무들이 초록의 어깨동무를 하고 숲을 지킨다. 숲 가운데에는 나무 덱으로 짠 산책로가 놓여 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오감(五感)이 즐거운 길이다.

어부림은 300년 전쯤, 바닷바람과 해일 등을 막아 농작물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주민들이 한 그루 한 그루 손수 심어 가꾼 숲이다. 한때 이 숲의 나무를 베었다가 폭풍으로 마을이 결딴이 난 뒤부터는, 한 그루라도 베어내면 백미 다섯 말을 바쳐야 하는 벌칙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 지켜온 숲이다. 어부림이 1962년 일찌감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이런 노고와 의미에 힘입은 탓이리라.

어부림의 숲은 봄을 건너 여름으로 이어지는 신록 무렵이 가장 근사하다. 연두색 이파리 색이 짙어질 무렵이면 숲에는 찔레꽃과 염주괴불주머니꽃이 앞다퉈 피어나는데, 이제 곧 그 시기를 맞는다. 그냥 숲을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어부림이 지나는 걷기 길을 걷는 것을 더 추천한다. 남해에는 걷기 길인 ‘남해바래길’이 있는데, 바래길 6코스인 죽방멸치길이 여기 어부림을 관통해서 지나간다.

위 사진은 남해 금산의 쌍홍문. 해골의 눈처럼 생긴 바위동굴이다. 상주리 쪽에서 두 발로 걸어서 금산을 오르다 보면 만난다. 아래는 수령 500년이 넘는 당당한 풍모의 창선도의 노거수 왕후박나무.

# ‘후박나무의 왕’으로 불러도 좋을…

나무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는 이야기. 남해에 그 풍채만으로도 상서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명목(名木)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은 창선도의 ‘왕후박나무’다. 후박나무보다 잎이 좀 더 넓은 변종이라 따로 붙여준 이름이라는데, 거대하고 당당한 노거수(老巨樹)의 풍모를 직접 대하고 나면 ‘후박나무의 왕(王)’이란 뜻으로 받아들일 법하다.

나무는 창선면 대벽리 단항마을의 야트막한 들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나무는 우아하고 기품이 넘친다. 먼발치에서 보면 나무는 초록 이파리를 이고 있는 거대한 파라솔 같은 형상. 가까이 다가서면 사방으로 활개 치듯 뻗은 11개의 가지가 마치 우산살을 펴놓은 듯하다. 가지 안쪽으로는 또 잔가지들이 실핏줄처럼 퍼져 있다.

이만한 나무에 전설 하나쯤 없을 리 없다. 오래전에 마을에 살던 늙은 부부가 앞바다에서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잡았더랬다. 마을 주민들과 잔치를 벌인 자리에서 물고기 배를 가르니 씨앗이 들어 있었다. 씨앗은 용왕이 보낸 선물이었던 것. 그 씨를 들판에 심었더니 지금의 왕후박나무로 자라났다는 얘기다.

왕후박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또 있다. 노량해전을 전후해 단항마을에 상륙한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이 왜군을 물리친 뒤 이 나무 아래 모여 쉬면서 전열을 정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단항마을 주민들이 왕후박나무를 ‘이순신 나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추정하는 왕후박나무의 수령은 500년 남짓. 진짜 이순신 장군이 이 나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나무의 나이는, 100살 남짓이었으리라.

남해의 지형은 두 날개를 펼친 나비를 빼닮았다. 남해로 들어가는 길은 두 개. 남해대교 건너 나비의 왼쪽 날개 위쪽으로 들어서거나, 창선대교 너머 오른쪽 날개 위쪽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남해대교 건너 나비의 왼쪽 날개 쪽으로 들고 나는 게 보통인데, 왕후박나무는 오른쪽 날개 위쪽인 창선도에 있다. 왕후박나무에 여행자들의 발길이 덜 닿는 이유다. 왕후박나무 앞에 서보면 500년을 살아온 나무 한 그루가 뿜어내는 아우라가 얼마나 강력한지 느끼게 된다. 남해를 오가면서 일부러라도 창선도를 딛고 가는 길을 택해야 하는 이유다.

# 보름달 뜬 밤바다를 보셨나요… 앵강만

가장 근사한 ‘보름밤의 바다’가 남해에 있다. 남해 토박이들이 자랑해 마지않는 바다 ‘앵강만(鶯江灣)’이다. 앵강만은 나비 형상의 남해 섬 아래 오목하게 바다가 밀려 들어온 만(灣)을 부르는 이름이다.

‘꾀꼬리 앵(鶯)’자에 ‘물 강(江)’자를 쓰는 앵강의 지명 유래를 놓고 유래가 분분하다. 인근 산에 꾀꼬리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란 이야기도 있고, 바다가 큰 항아리같이 생겨서 ‘큰 독 앵(甖)’자를 썼다가 한자가 바뀌었다는 주장도 있다. 재미는 없어도 가장 설득력 있는 건,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 굴강(掘江)을 파서 만든 곡굴강을 ‘꾀꼬리강’으로 부르다가 그걸 한자로 바꾸면서 앵강이 됐다는 설이다.

사실 앵강만에 가도 외지인들은 거기가 특별하다는 걸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앵강만의 바다는, 말하자면 덤덤하고 심심한 쪽이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별 대수롭지 않은’ 평범한 바다다. 장쾌하지도, 그렇다고 아기자기하지도 않다. 바다는 평면적이고, 풍경에 강약이나 긴장감도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밋밋한 풍경이 가져다주는 건 뜻밖에도 아늑하고 푸근한 위안이다. 금산이나 호구산, 설흘산에 올라서 앵강만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앵강만 안쪽에 방풍림을 끼고 있는 신전마을이며 홍현마을, 숙호마을, 두곡마을, 원천마을에서 해안가를 산책하는 것도 좋다.

앵강만의 진면목을 보는 데는 요령이 있다. 되도록 오래 머물면서 느리게 움직이는 것. 그래야 무덤덤한 바다의 경관이 일상이 돼서 밋밋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니까. 그중 최상은 보름날에 맞춰 가는 것이다. 요즘 같은 봄날이라면 금상첨화. 앵강만 바다 위로 휘영청 뜬 보름달이 수면에 반사돼 은빛으로 반짝이는 장면은 쉬 잊히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힘든 어느 날에 이 장면을 문득 꺼내 보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남해 금산은 대부분 차를 타고 신전리 쪽으로 가서 산 턱밑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르는데, 파라다랑스가 있는 두모마을 쪽에서 오르는 코스도 있다. 그 길을 택해 오른 금산의 부소암 부근에서 두모마을과 바다를 내려다본 모습.

# 최영 장군은 왜 남해 수호신이 됐을까

남해는 이름난 관광지이지만, 이야기가 새겨진 여행지는 드문 편이다. 그런 여행지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여행자들 사이에서 별반 인기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보자마자 확 시선을 잡아끄는 명소들이 즐비한데 누가 고리타분한 이야기에까지 귀를 기울이겠느냔 말이다.

그렇더라도 어딜 가든 다양하게 보자. 시각적 미감이나 자극은 덜 하지만, 이야기가 스민 곳을 찾아가서 시간을 뒤적여보는 건 적어도 여행을 더 풍성하게 만든다. 여기다 속도와 완급까지 조절한다면 여행에 리듬감과 입체감이 살아난다.

먼저 무민사(武愍祠)로 간다. 남해 섬의 최남단, 미조면 미조리에는 무민사가 있다. 무민사는 고려 말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 겸 합참의장으로 요동 정벌을 주장했던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남쪽의 섬인 남해에서도 가장 외진 남쪽 끄트머리에, 왜 최영 장군 넋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을까.

남해 섬은 조선 팔도를 통틀어 왜구의 노략질 피해가 가장 극심한 곳이었다. 고려 말 혼란기를 틈타 남쪽 바다에서 왜구들이 창궐했다. 무능한 조정은 백성의 안위조차 지키지 못했다. 그때 왜구를 격퇴하며 백성을 지켜줬던 건 최영 장군이었다. 나이 마흔하나에 황해도 장연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400척의 왜선을 궤멸시켰으며, 나이 쉰아홉 때는 삼남지방을 휩쓸던 왜구를 부여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왜적을 잡은 공로로 예순넷에는 수군총사령관인 해도도통사가 됐고, 예순여덟에는 국왕을 보좌하고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최고의 벼슬, 문하시중 자리에 올랐다.

왜구에 시달리며 살아오던 섬사람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최영 장군이 눈물 나게 고마웠으리라. 그가 아니었다면 섬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를 누구에게 의탁할 수 있었을까. 이 먼 남쪽 끝에다 최영 장군의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음력 3월 13일 제향을 지내는 이유다.

# 남해로의 초대장… 재방문 혜택권

최영 장군이 섬사람들의 수호신이 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신이 된다는 건 영웅적 면모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당은 원통한 마음을 푸는, 이른바 ‘해원(解寃)’의 공간이기도 하다. 요동 정벌을 꾀하던 최영 장군은 이성계의 쿠데타로 투옥된 뒤 죽임을 당했다. 길에다 시신을 내버리는 모욕적 죽음이었지만, 억울한 그의 최후는 당당했다. 무고한 그의 억울함은 ‘무덤에 풀이 돋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무민사 마당에는 최영 장군으로 추정되는 석상이 있다. 투구를 쓰고 팔짱을 끼듯 앞으로 팔을 모았는데 크고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이다. 이 석상을 수년 전에 누군가 훔쳐가다가 붙잡혔다고 했다. 어딜 감히. 참으로 겁 없는 도둑이다.

남해에는 고려 말 성리학을 이 땅에 처음 들여온 백이정을 모신 난곡사가 있고, ‘사씨 남정기’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이 유배 왔다가 죽은 작은 섬 노도(櫓島)도 있다. 남해읍 선소리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유격대장 장량상이 ‘명나라가 조선을 구하고 수군 제독 진린이 왜적을 무찌른 공적’을 기려 새긴 마애비가 있다. 달라진 국제질서에도 몰락한 명나라를 쫓으며 그 앞에서 단을 쌓고 제를 지내던 관료들의 사대의 자취를 읽을 수 있는 자리다. 겹쳐진 이야기들을 뒤적여가며 읽을 수 있는 곳들이다.

아, 그리고 이 얘기를 덧붙인다. 올해는 남해군 한정 ‘고향 사랑 방문의 해’다. 이를 기념해서 남해군은 올 연말까지 남해 공영관광지를 방문해 입장권을 사면 재방문할 때 무료 혹은 요금을 할인해주는 ‘재방문 혜택권’을 준다. 거북선전시관, 유배문학관, 남해 힐링숲타운 등 공영관광지는 재방문 시 무료. 남해대교유람선이나 남해 토피아랜드, 남해 3대 양떼목장은 각각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혜택을 받으려면 올해 안에 남해를 다시 와야 하는 게 아니냐고? 아니다. 재방문 혜택권은 남에게 양도가 된다. 남해 여행을 오는 다른 이들에게 줘도 된다는 뜻이다. 사실 소소한 관광지 입장권 가격 조금 깎아주는 게 뭐 그리 큰 혜택일까. 몇몇 지방자치단체들이 ‘반값 여행’을 내놓으며 목청 크게 호객하고 있는 사정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그렇더라도 남해를 다녀와서 얻은 재방문 혜택권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해보면 어떨까. 푼돈 몇 푼 아끼는 할인권이 아니라 받는 이에게는 남해로의 여행을 초대하는 초대장이 되지 않을까.

■ 남해 봄 멸치의 맛

지금 남해에 멸치가 딱 제철이다. 남해 멸치는 4월 말 조업을 시작해 11월까지 잡는다. 굵은 씨알의 멸치(대멸) 맛이 가장 좋을 때는 뼈가 부드러워지고 살이 탄탄해지는 5월이다. 남해에서는 어디서든 싱싱한 멸치를 맛볼 수 있다. 미조면 미조항과 삼동면 지족항에 멸치음식점이 모여 있다. 제철 멸치는 갖은 양념으로 고아 만든 쌈밥도 좋고, 싱싱한 미나리를 넣어 새콤하게 버무린 생무침도 훌륭하다.

박경일 전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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