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좋은 형제' '상생의 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천천히 너그럽게
[아무튼, 주말]
미담과 미풍을 간직한
예산 대흥슬로시티 여행

광속에 지쳐 피로해지는 요즘, 자극 없는 순한 이야기를 나누고, 무해한 풍경을 보고 싶은 날, 슬로시티로 향한다. 우리나라 15개 슬로시티 가운데 충남 예산·대흥 슬로시티(이하 대흥슬로시티)는 수도권과 가까워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한 곳. 따스한 옛이야기가 숨어 있는 소박한 시골 마을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팍팍하던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슬로시티 매력이 담긴 ‘느린 꼬부랑길’부터 예당호로 이어지는 ‘느린 호수길’까지, ‘느림의 미학’을 체험할 수 있는 대흥슬로시티로 봄 산책을 떠났다.
◇‘의좋은 형제’ 실존 마을
옛날 어느 마을에 의좋은 형제가 살고 있었다. 형제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농작물을 반반씩 나누었다. 곳간에 차곡차곡 쌓인 볏단을 보며 흐뭇해하던 형은 아우가 생각났다. ‘아우가 살림 장만을 하느라 나보다 더 힘이 들 거야.’ 형은 갓 결혼한 아우를 위해 밤에 몰래 자신의 볏단을 지고 가 아우네 집 볏단에 올려두고 왔다. 아우 역시 식구 많은 형님네 형편을 생각해 그날 밤 자신의 볏단을 형님 집 볏단에 몰래 옮겨둔다. 어쩐 일인지 집 볏단이 줄어들지 않아 밤새 옮기다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 서로 감싸안고 눈물 흘렸다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
예산 대흥면 교촌리, 동서리, 상중리를 아우르는 대흥슬로시티 여행은 ‘국민학교’ 시절 2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려 유명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으로 전해 오던 이 옛이야기는 예당저수지(예당호) 조성 당시 대흥면에서 형제에 관한 우애비(효제비)가 발견되면서 고려 말 조선 초 대흥면에 살았던 이성만, 이순 형제가 주인공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옛이야기 실제 배경인 대흥면에 들어서기 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고 적힌 커다란 표지석부터 만난다. 마을 초입 ‘의좋은 형제 공원’엔 초가집을 배경으로 볏단을 들고 나란히 마주한 형제의 조형물이 서 있다.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알린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는 대흥초교를 지나 마을 안쪽 ‘대흥동헌’(대흥관아) 앞에 자리한다. 1497년(연산군 3년)에 세워진 비는 예당저수지 축조 후 1978년에 일대 농경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돼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 전한다. 당시 비문의 일부가 포크레인에 의해 훼손되기도 했다. 국어 교과서 속 한 장면을 그대로 조각해놓은 동상도 세워져 있다. 일대는 매년 가을 여는 ‘옛이야기축제’의 무대이기도 하다. 효제비와 동상, 벽화로 다시 만나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라 더 정겹고 반갑다.

동상 뒤편의 대흥동헌 안쪽엔 목련이 만개했다. 대흥동헌은 예산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조선 관아다. 입구 현판에 쓰인 ‘임성아문(任城衙門)’의 ‘임성(任城)’은 통일신라 때 대흥 지역을 부르던 명칭. 작은 연못과 장독대 등이 있는 소담스러운 마당은 관아라기보다 시골 한옥에 들어선 듯 정겨운 풍경이다. 귀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던 전원 드라마 ‘산 너머 남촌에는’(2012년 KBS 방영) 속 종가 촬영지로도 알려진 곳.
느티나무가 드리운 뒷마당엔 흥선대원군 척화비와 함께 화령옹주 태실 터 안내판이 공간의 내력을 알린다. 대흥동헌 옆 아담한 ‘달팽이미술관’도 지나칠 수 없다. 대흥면 보건지소를 미술관으로 꾸몄다. ‘달팽이’는 ‘느림의 미학’을 소중히 여기는 대흥슬로시티의 상징물이다. 달팽이미술관에는 지역 작가들의 작품과 짚 공예품이 기다린다. 짚 공예 전수·지도자인 김영호 예산대흥슬로시티협의회 사무국장은 “짚 공예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와 함께 대흥슬로시티를 이끌어가는 중심 콘텐츠이자 마을 사업”이라며 “대흥슬로시티는 짚 공예의 명맥을 잇는 전통 체험장”이라고 했다.


대흥면은 옛 동헌, 향교, 고택 등 문화유산 80여 점을 보유한 마을로 2009년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지난해엔 지속 가능한 생태 보전과 짚 공예를 기반으로 지역 주민들의 활발한 커뮤니티 활동 등의 성과를 인정받아 국제슬로시티 총회로부터 ‘국제슬로시티 우수 사례 콘테스트’ 우수상을 받았다. 달팽이미술관 전시장엔 짚으로 만든 복조리부터 짚신 등 공예품이 눈길을 끈다. 김 사무국장은 그중 ‘육바라기 짚신’을 들어 보이며 “스님이 신는 이 짚신은 바닥이 성기고 거칠게 삼은 것이 특징인데, 발바닥에 밟힐 수 있는 작은 생명체 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불교 철학이 담겨 있다”고 했다.
◇1000년 느티나무와 상생의 나무
봉수산을 병풍 삼아 키 낮은 집, 논밭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마을 길을 거닐다 보면 시골집에서 보낸 어린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자극적이지 않은 평온한 마을 풍경은 때로 거창하고 극적인 풍경보다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목적지를 따로 두지 않고 마을에서 길을 잃고 헤매도 좋지만, ‘느린 꼬부랑길’ 푯말을 따라 촌사람처럼 빈둥거리며 산책하다 보면 대흥슬로시티의 매력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느린 꼬부랑길은 다시 ‘옛이야깃길’ ‘느림길’ ‘사랑길’로 나뉜다. “그중 옛이야깃길과 느림길을 걸어볼 만하다”는 게 김 사무국장의 말. 두 길 모두 4.6km로, 한 바퀴 둘러보면 각각 60분쯤 걸린다.

의좋은 형제 공원과 이성만 형제 효제비, 대흥동헌, 달팽이미술관 등을 거치는 코스는 ‘옛이야깃길’이다. ‘백제 부흥의 길’과 이어진 등산로를 따라 ‘임존성’까지 이어가 볼 수 있다. 이름처럼 가는 길마다 옛이야기가 숨어 있다. 마을 안쪽 냇가 옆 ‘배 맨 나무’라 불리는 상중리 느티나무는 중국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을 공격할 때 배를 매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높이 19m, 둘레 7.5m로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는 충남 최고령 나무다. 매년 2월 1일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신제를 지내는 이 나무의 수령은 1050년 이상으로 추정한다.

멀지 않은 곳에 영험한 나무가 또 한 그루 있다. 대흥향교 앞 은행나무는 ‘상생의 나무’라고 불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은행나무가 느티나무를 품은 모양새다. 김 사무국장은 “일종의 연리지인데 은행나무 안에 느티나무가 자라는 특이한 형태로 함께 살아가는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지금보다는 단풍철에 향교 건물과 어우러져 매력을 뽐내는 나무”라고 했다.
걷다 보면 낮은 돌담에 주먹만 한 달팽이 조형물을 올려놓은 집들과 마주친다. ‘손바닥 정원’이 있는 집 표시란다. 누구나 마을 사람들이 직접 가꾼 정원을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지금은 꽃샘추위 때문에 마을에 볼거리가 적지만, 4월 말쯤 꽃이 활짝 피면 끝내줘유~.”
◇봉수산휴양림 지나 임존성까지
옛이야깃길은 봉수산 자연휴양림을 지나 임존성과 마을을 잇는 중간 지대인 백제 부흥의 길을 거친다. 등산객이 즐겨 찾는 봉수산 정상까지는 대흥슬로시티 방문자센터에서 왕복 3시간 정도. 임존성은 봉수산에 축조된 백제시대 산성으로 예산 제4경에 꼽힌다. “대흥슬로시티의 숨은 명소이자 옛이야깃길 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안단테’(느리게)이던 발걸음이 자연스레 ‘알레그로’(빠르고 활기찬)로 바뀐다.


임존성은 백제가 멸망한 후에 백제인들이 부흥 운동을 시작한 거점이자 마지막까지 항거했던 곳으로 의의가 있다. 둘레 약 2468.6m(GPS 측량값), 면적 55만3697m²로 웅장하다. 성벽은 외벽만 돌로, 안은 돌과 흙을 다져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1300여 년 전 요충지이던 임존성엔 반면교사 삼을 이야기가 숨어 있다. 660년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사실상 멸망한다. 이후 백제인들이 주축이 된 이른바 ‘백제부흥군’에 의해 임존성에선 다시 한번 전투가 벌어진다. 백제 최고의 장수 흑치상지가 백제부흥군에 합류하며 나당연합군 손에 들어갔던 성 200여 개를 되찾기에 이른다. 하지만 백제부흥군은 내부 분열로 성들을 다시 빼앗기기 시작했고, 최후의 보루였던 임존성마저 함락된다. 적장의 중심엔 당으로 귀화한 흑치상지가 있었다는 뼈 아픈 교훈이 남아 있는 성이다.

이야기를 뒤로하고 보면 평화롭고 고요한 산성은 ‘사색 맛집’이다. 탁 트인 전망은 임존성의 선물. 동벽 건물지로 향할수록 발아래로 평온한 풍경이 펼쳐진다. 대흥슬로시티와 예당호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포인트. 푸른 하늘까지 더해지니 눈이 시원하다 못해 시리다. 다만, 명품 전망을 보기 위해 일명 ‘깔딱고개’는 피할 수 없다. 일부 구간은 가파르다. 임존성까지 마을 길과 임도를 이용해 차로 닿을 수도 있으나 굽이진 외길이 2~3km가 이어져 곡예 운전이 불가피하다. 차를 이용한다면 광시면 ‘마사리마을회관’ 부근 마을길로 진입하면 된다.
◇‘느린 호수길’ 따라 예당호로
발걸음은 자연스레 임존성에서 내려다본 예당호로 향한다. 이제 막 새순이 돋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낚싯대를 던지고 입질을 기다리는 낚시꾼들, 이따금 커다란 날갯짓을 하며 호수를 가르는 황새가 그림 같은 곳. 의좋은 형제 공원 앞 ‘예당호중앙생태공원’을 출발점 삼을 만하다. 5km의 목책로를 포함해 수변 산책로인 느린 호수길이 7km가량 이어진다. 예당호중앙생태공원에서 출발해 ‘예당호 수문’까지 완보한다면 40km쯤 되는 예당호 둘레길의 5분의 1쯤 돌아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각공원을 비롯해 예산의 명물인 예당호 출렁다리, 물 위에 뜬 다리인 부잔교 등을 지난다. 2019년 개통 후 예산의 명물이 된 길이 402m의 출렁다리는 시간에 맞춰 음악 분수, 야간 조명이 더해지면 볼 만하다. 낮 시간대 음악 분수가 가동되면 물방울에 의해 무지갯빛이 관찰되기도 한다.



다리가 뻐근해질 무렵 집집마다 굴뚝에서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동요 ‘노을’의 한 구절이 눈앞에 그려진다. 이왕 슬로시티를 찾았으니 시골 밥상 한 그릇 해도 좋을 일. 마을 가까이 있는 ‘예당소쿠리밥상’에서 소쿠리보리밥정식(2인 이상 1인 1만4000원)을 주문하니 새참처럼 소쿠리(채반)에 찬을 푸짐하게 내 온다. 보리밥에 색 고운 나물, 우렁된장, 고추장 넣어 쓱쓱 비벼 한 그릇 하니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부럽지 않다. 마음속 허기까지 채우고 다시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맨다. 도시의 속도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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